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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제4장 여진 봉쇄령(3)



요동의 중심지였던 무순성(撫順城)은 고작 반나절 만에 무너졌다.

누르하치의 6만 대군이 진격하자, 무순성의 대장이었던 유격 이영방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버렸다.

이전부터 이영방은 누르하치와 모종의 밀약을 맺고 있었다. 후금의 거병에 합세하고자 무순성이 열렸다. 이윽고 이영방은 누르하치의 손녀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금나라의 총병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무순성이 함락되었다!”

“어서 조정에 알려야 한다. 다음은 심양성(瀋陽城)이 될지도 모른다!”

요동의 전령들은 잇달아 북경으로 향했다.

이 참사를 반드시 알려야 한다. 후금이 드디어 발호하기 시작하였으니 천하가 크게 요동칠 터.

누르하치를 막지 못한다면 천하의 패권을 여진족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놈 누르하치, 오랑캐 따위가 감히 폐하의 성채를 침범하느냐! 내 당장 놈을 죽여 대명의 위엄을 되살리겠다!”

총병 장승음은 요동의 군사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는 여진족에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후금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된통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지 않았던가. 감히 바닥이나 기어야 할 오랑캐 따위가 황제의 영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곧 하늘의 심기를 건드린 것과 같았다.

“광녕순무(廣寧巡撫) 이유한, 합류하겠습니다.”

“요동절도사(遼東節度使) 신백, 오랑캐 토벌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총병 장승음은 요동성의 병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명에 요동마병(遼東馬兵)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북로남왜(北虜南倭)에 대비하고자 절강보병(浙江步兵)과 함께 신설된 병단으로, 지금까지 요동은 물론 요서에 걸쳐 드넓은 벌판을 지킨 정예병들이었다.

대명의 정예들이 집결했다. 무순성의 함락을 명나라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었고, 누르하치를 위험한 적으로 간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진은 몽골의 군사를 흡수했고, 무순성에 무혈입성 하여 그곳의 병사들 역시도 흡수했을 것입니다. 가벼이 공격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유한은 장승음에게 고언을 올렸다.

무순성을 장악하면서 여진족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이었다.누르하치는 군략에 능하고, 그의 아들들은 맹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분명 무순성을 점령한 이후까지도 모두 계획에 두고 있을 터이니, 무작정 놈을 공격했다가는 낭패를 볼 위험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 대명의 군대가 저깟 오랑캐들에게 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놈의 병력이 6만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6만은 무슨. 부족도 다른 놈들이 서로 오합지졸처럼 모였을 뿐이네.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칠 테지.”

총병 장승음은 자신이 여진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껏 하나로 통합되지 못해 사분오열했던 여진족이었다. 누르하치의 이름 아래 단결했다 해도, 불리한 상황에 직면하면 몽골족처럼 뿔뿔이 흩어질 게 분명했다.

장승음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부족들 간의 이기주의. 그것은 여진족이 평생의 숙제로 안고 가야 할 고질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총병! 이번에는 다릅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들이 인정한 맹주가 아닙니까. 나라까지 세우고 연호까지 정한 자입니다. 지금껏 싸워온 어느 오랑캐보다도 강합니다.”

“그대들이 이끌고 참전한 요동마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가? 대명의 우수한 기마군단을 보내면 저들은 분명 알아서 도망칠 터인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진은 끈질기고 강인한 족속입니다.”

요동절도사 신백 역시 동일한 의견이었는지, 장승음에게 재고할 것을 요구했다.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무순성의 이영방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것부터가 미심쩍은 일이었다.

요동의 지방관들은 계산에 능했다. 변방으로 보내져 오랑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부족에 붙어야 유리할지, 어느 부족의 편을 들어야 도움이 되는지를 헤아릴 줄 알았다.

“유격 이영방이 조정을 버리고 여진족에게 항복했다는 것은 분명 놈들에게 승기가 있음을 느꼈다는 뜻일 터……. 누르하치의 군대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팔기군을 우습게보아서는 안 됩니다. 몽골 군대를 물리치고 놈들의 칸까지 죽이지 않았습니까.”

지금껏 명나라도 못한 일을 여진족들은 단숨에 해냈다.

몽골을 대파하고 칸을 죽였다. 팔기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쩌면 북방의 전력으로 명성을 떨친 요동마병을 상회하는 전력일지도 모른다.

“나만 믿으시오. 어린진(魚鱗陳)으로 놈들의 중심만 뚫으면 죄다 흩어져 달아날 게요.”

총 2만에 달하는 명군이 요동에 집결했다.

불과 1주일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에 모여든 것인데, 그 말은 곧 요동이 군사적 요충지로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불행이라면 총대장이 총병 장승음이라는 점이었다.

장승음은 요동에서 총병과 도독을 역임한 이성량의 후임자였는데, 전투에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 전임자보다도 크게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자였다.

누르하치가 장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승음을 살려 보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진족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응전할 준비를 갖춰라. 단 일격으로 놈을 끝내버릴 것이니!”

척후병의 보고에 장승음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물고기 비늘처럼 밀집시킨 진형. 오로지 일점돌파를 위해 그는 병마들을 빼곡하게 집결시켰다.

“어찌 생각하오, 잘 될 것 같소?”

“해봐야 알 일이지요. 무릇 전투라는 게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한과 신백은 이야기를 나누며 결의를 다졌다.

물론 총병을 의심하는 마음은 컸다.

하지만 적을 앞에 두고 불신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전장에 선 이상, 그의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여길 필요가 있었다.

“무, 무슨!”

“맙소사, 머릿수가 대체 얼마야?”

선두에 선 명의 기병들은 비명을 토해냈다.

지평선을 돌파하며 달려오는 팔기군의 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총 8개의 부대로 구성된 후금의 정예기병들이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깃발을 등에 멘 채 개별성을 두고 있었다. 그 부대들을 이끄는 대장은 모두 누르하치의 혈족들이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 등, 주로 그의 혈족들이 지휘권을 잡았다.

“흐하하! 드디어 싸움다운 싸움을 해볼 수 있겠군!”

“그 유명한 요동마병이 상대라! 부족에 돌아가서 자랑하기에도 충분하겠구려.”

여진의 부족장들은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다.

팔기군에 소속된 부족들은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총 6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차츰 갖춰가고 있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누르하치로서는 최대한으로 동원한 병력이었으며, 동시에 후금의 모든 전력이기도 했다.

“오합지졸? 저 용맹한 군세에게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오?”

신백의 물음에 이유한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요동에서 병마를 관장하면서 수많은 오랑캐들을 상대해보았다. 오랑캐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그동안의 싸움에서는 오랑캐 병력이 적게는 수백, 많아도 수천에 불과했다. 맹세컨대 변경의 무관으로서 보낸 10여 년의 세월들 중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오랑캐 병력을 상대해본 적은 없었다.

부우우우!!

부우우우우우!!!

대기를 울리는 고각소리가 널리 퍼졌다.

여진족들만의 나팔이었다. 물소의 뿔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으며, 그 어떤 접전에서도 귀에 들릴 만큼 소리가 컸다.

“총병! 어서 돌격 명령을 내려주시오.”

명령은 내리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 장승음에게 이유한이 다가와 말했다.

“고, 공격 명령을 내리시오. 저 오랑캐들을 모두 쓸어버립시다!”

여기서 도망치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장승음은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기병이라 할지라도 여진족의 팔기군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할 테니.

“공격하라!”

“진격! 오랑캐들을 여기서 잡는다!”

2만에 달하는 병마들이 일시에 움직였다. 명나라의 일반적인 조정군이었다면 부리나케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상대는 요동에 종군하며 지금껏 오랑캐들과 싸워온 용사들이었다. 비록 불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이 전장에서 도망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말발굽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퍼져나갔다. 대지를 진동시키며 요동마병들이 움직였고, 곧이어 팔기군 역시 응전을 시작하면서 대규모 기마전이 시작되었다.

“크아악!”

“이놈들이!”

이윽고 요동마병과 팔기군이 전장에서 충돌했다.

말 머리가 부딪치면서 허리가 꺾였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하며 달렸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결사의 각오를 담은 돌격들이 연이어 펼쳐지면서 함성이 드넓은 전장을 가득 메웠다.

“놈들이 아주 제법입니다. 아군을 보고서도 도망치지 않다니.”

“그러니 재밌는 일이지!”

용골대와 홍타이지는 정백기를 지휘하며 전장을 횡단했다.

팔기군은 정확히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으로 나뉜다. 중앙으로 적의 어린진 공격을 막고, 좌익군과 우익군이 두 날개를 펼치면서 물고기의 비늘을 감싸 안았다.

속도를 늦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돌격을 감행하는 것은 용맹한 공격이나, 속력이 줄어든 돌격은 도리어 아군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격이 될 것이다. 그것도 기마전이 중심이 된 싸움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양람기(镶藍旗), 양황기(镶黃旗)가 적의 돌격을 막아라. 양백기(镶白旗), 양홍기(镶紅旗)는 뒤에서 지원하라.”

누르하치는 무예와 군략에도 능통했지만, 병법에도 뛰어났다.

대규모 전면전은 누르하치의 장기 중 하나였다. 천하를 거머쥘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전면전을 거쳐야 할 터. 전면전을 통해 수많은 적들을 죽이고 어마어마한 전리품들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양람기는 뒤로 빠져라. 양백기가 대신 나선다!”

병력의 신속한 지원과 교대. 후금은 병력의 우위와 뛰어난 지휘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명군의 어린진 돌격을 버텨내기 시작했다.

장승음의 말처럼 여진족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면 요동마병의 돌격을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금의 팔기군은 정예였다. 그들로서도 2만의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일 터인데도 능숙하게 대처하며 반격에 나섰다.

“선봉이 무너졌습니다!”

다급하게 뛰어온 전령이 장승음에게 보고를 했다.

그 말에 장승음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번의 일격으로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원대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일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돌격에 동원된 병력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병, 퇴각하셔야 합니다.”

“우선은 물러나셔서 후사를 도모하십시다.”

부장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승음은 기어코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그들의 말처럼 일격은 실패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사들을 버려두고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총대장이 되어 싸움을 지휘한 이상, 그는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전장에 남아 있을 결심을 했다.

“대명의 총병이 되어 어찌 적에게 등을 보이는 수치를 겪겠느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살아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이 장승음은 싸움에서 도망친 비겁자라는 오명을 쓴 채로 살 바에야, 차라리 용감한 군인으로 남기 위해 이 요동에서 죽으련다!”

장승음이 박차를 가하며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의 부장들과 호위 병력들 역시도 장승음의 뒤를 따라 치열한 전황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