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8화] 제4장 여진 봉쇄령(2)



1619년 5월(만력 47년. 광해군 11년).

한양부(漢城府) 편전(便殿).



여진에 내려진 무역 봉쇄령은 조선(朝鮮)에 있어 치명적이었다.

지금껏 조선은 여진(女眞)과 왜(倭)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어왔다.

무역선을 보유하지 못한 여진은 모피와 인삼을 인접한 조선에 팔아야 했고, 조선은 여진에게서 구입한 모피와 인삼을 몇 배의 가격으로 후려쳐 왜에게서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명나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국경의 모든 관문들이 철폐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명은 재조지은의 나라이니, 응당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사옵니다.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니, 이를 견제해야 할 것입니다.”

조정은 친명배금(親明背金)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대북(大北)의 영수인 정인홍과 이이첨은 급진적인 강경파였고, 후금과 손을 잡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

그에 반해 이혼은 명과 후금을 저울질하면서 중립외교를 펼치고 싶어 했다.

힘을 잃은 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명나라를 맹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만주의 늑대로 군림하게 된 여진족들을 계속 무시하는 것도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북파 신하들은 강경한 의견만을 내놓았다. 서인(西人)보다도 더 맹렬하게 친명배금을 주장할 정도였다.

“만약 여진이 아국으로 쳐들어온다면… 어찌 대응할 생각인가?”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막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청야전술을 펼치고 있으면, 대명이 구원군을 보내줄 게 분명합니다. 대명과 조선은 굳게 다져진 군신(君臣)관계이니 당연히 보내주지 않겠습니까.”

“아국의 국운을 대명에 걸자는 말인가.”

이혼의 되물음에 이이첨은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피했다.

근자에 이혼은 군사를 정비하고 있었다. 조세를 높이면서 백성들에게 부담을 안기면서까지 훈련도감에서 정예를 육성했다. 화포와 조총으로 무장하여 두 번 다시는 오랑캐들에게 국토를 짓밟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바란다는 건 아니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가.’

대명은 아직도 여진족을 한참 아래에 있는 오랑캐로 여기고 있었다.

요동을 빼앗기고 수도 없이 많은 참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조정은 여진족에 대해 그 어떠한 경각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족 국가였던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천하를 빼앗겼을 때도 바로 이러했을까. 이혼은 지금 이 시기가 천하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릴 격동기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왜란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직감이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무역을 봉쇄하였으니 여진족들은 굶어죽을 게 분명합니다.”

이이첨의 말에 이혼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과연 누르하치가 얌전히 당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굶주린 맹수가 가장 사나운 법이다. 상대를 물어뜯어 죽이지 않으면 살코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절박한 생존권을 담보로 잡힌 여진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도 대북파 신하들과 마찬가지인 의견을 내놓았다.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을 배척하자. 대명은 어버이의 국가이니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여진족은 멸시했던 오랑캐들이니만큼 결코 화합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진족들이 한강으로 내려와 말들의 목을 축이게 해서는 안 된다. 저 후금이 쳐들어오면 그대들은 붓으로 싸울 것인가, 혀로 싸울 것인가! 어찌 이리도 세상물정을 모른단 말인가!”

대북파 인사들의 의견은 무책임하고 비논리적이었다.

지금의 후금은 왜(倭)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 후금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데는 20일이 걸렸다. 하지만 기마민족인 여진족은 그 절반의 시일이면 충분할 것이다.

‘천하를 건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우리 조선은 그 풍파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떠한 적들에게도 굴복당하지 않는 강한 조선을 만들고자 하였건만, 시대가 받쳐주지를 않는구나.’

앞날을 헤아릴 줄 모르는 신하들.

폐모 사건에 휘말려 쫓겨난 재야인사.

매번 조정에 불만을 드러낼 뿐인 지방 세력들까지.

이 모든 게 자신의 부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이혼은 조세를 크게 올려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폐모에 반대한 서인들을 모조리 유배 보내는 식으로 폭군의 모습까지 보였다.

‘설령 폭군이라 불릴지라도, 옥좌에서 쫓겨날지라도, 과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사명(捨命).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완수해야 할 일이었다.



* * *



누르하치는 만주(滿洲)를 농업국가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식량의 대부분을 명나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명나라가 식량을 모두 끊어버릴 것을 우려한 누르하치는, 농업을 확장하여 인구를 크게 불릴 계획 역시 갖추어 왔다.

하지만 실패했다.

만주족은 농사에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만주는 험준한 산맥들이 대부분이라서, 농토로 개간할 수 있는 지역도 부족했다.

“대가한, 하다부(哈達部)와 호이파부(輝發部)에서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오. 아직은 괜찮을지도 모르나… 겨울이 되면 지옥이 될 거요.”

“개간에도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명나라와 조선이 모두 교역을 끊었기 때문에 식량을 충당할 곳도 없습니다.”

건주여진의 부족장들은 연이어 부정적인 보고를 올려왔다.

한족의 유민들을 동원한 농업정책은 실패했다. 하다부(哈達部) 지역에서 개간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지만 미비한 성과만을 얻었을 뿐, 제대로 된 성과는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식량을 거둬 자급자족할 수 있을까.

누르하치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고심해왔지만, 결국 여진족들의 선택은 ‘약탈’ 말고는 답이 없었다.

“빌어먹을 황제 놈, 설마 선수를 칠 줄이야. 그럴 배짱도 없는 놈이라 여겼거늘.”

누르하치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천자의 명령에 조선과 제후국들이 모두 움직였다. 아직도 천하는 명나라가 쥐고 있었다. 황제의 가렴주구와 신하들의 무능으로 쇠퇴기를 겪고 있다고는 해도, 한족 국가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 하지만 몽골군을 흡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몽골을 앞세워 명나라를 침공하시지요.”

“아직 몽골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가벼이 몽골족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다이샨의 말에 동생 도르곤이 반박을 했다.

북원을 격파하고 링단 칸을 죽였다고는 하나, 그를 대신해 그의 아들 에제이(額哲)가 칸(汗)의 자리에 오르며 사태를 수습했다.

몽골의 투멘과 다루가치들은 여진족에 항복했다. 그로 인해 여진족의 골칫덩이이던 병력부족을 해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몽골이 다스리고 있는 북쪽 초원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차하르 부족이 여진족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명나라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들라하라.”

누르하치는 먼 길을 달려왔을 명의 사신을 들이게 했다.

과연 어떤 궤변을 늘어놓을지 들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여진족의 부족장들은 명나라를 원수처럼 취급했다. 그동안 명나라가 여진족의 주인 노릇을 하며 수많은 악정(惡政)을 펼쳐왔기 때문이었다.

적의와 분노로 가득한 자리에 명나라 사신이 들어왔다.

사신으로 온 이는 총병 장승음이라는 자였다. 여진족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한족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건주여진의 족장 누르하치에게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시었소.”

장승음이 황제의 서한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누르하치의 아들들은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맹렬한 성격으로 유명한 다이샨은 칼자루에 손을 올리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건방진 한족 사신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감히 건주여진의 족장이라니!

해서여진과 야인여진까지 모두 통합해 금나라를 건국하고 천명(天命)이라는 연호까지 세웠거늘, 명나라 사신은 누르하치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듯했다.

“지금 족장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와 백성들은 모두 아국의 요동총병 이성량의 재산이오. 그러니 응당 족장은 영토와 백성들을 모두 조정에 반환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키시오.”

“반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라?”

누르하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족이 입으로만 떠벌리길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무지할 줄은 몰랐다.

여진의 병력이 이미 명나라 전토를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이거늘, 황제는 아직까지도 사태파악을 못한 채 알량한 권위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건방진 명령이 곧 여진족에게는 전쟁의 명분이 되어줄 터.

만력제는 궁녀들과 주색잡기를 하며 세월을 보낸 탓에,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황제 놈이 이리도 무능할 줄이야. 황제라는 놈이 이러할 진데 그 장수들은 또 얼마나 어리석을꼬?”

“지금 뭐라 하시었소!”

한낱 오랑캐 족장 따위가 감히 황제를 능멸하다니!

장승음은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누르하치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무능하니 중원 통일도 머지않았음을 확신했다. 그 신하라는 사신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신하들 대부분이 탁상공론으로 생각할 뿐인 어리석은 작자들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명나라가 비록 대국이라고는 하나, 요동과 요서의 성에 수많은 군대들을 주둔시키지는 못할 터! 그 많은 성과 요새에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겠는가? 설령 명나라가 많은 군세를 끌고 온다 해도, 우리 용맹스런 전사들이 네놈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버릴 것이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누르하치의 강경한 발언에 장승음은 아연실색한 모습을 보였다. 감히 대명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셈인가? 지금껏 요동과 요서에서 약탈이나 일삼던 무식한 오랑캐 따위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황제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들은 아이신(金)의 후예들이다! 거란의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며, 너희 한족들이 세운 송(宋)을 장강 이남으로 쫓아 보냈다!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한을 완수하기 위해 기꺼이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누르하치는 장승음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장수들은 거만한 한족 사신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누르하치의 생각은 달랐다. 장승음은 요동군을 이끄는 총병이다. 분명 요동을 공격하면 그가 군사를 이끌고 참전할 터.

무능한 총병이 군사를 지휘한다면 그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이샨, 홍타이지!”

누르하치가 두 아들들을 불렀다.

드디어 천하를 도모할 때가 왔다. 그 첫 번째 단계로 누르하치는 요동의 도시인 무순(撫順)을 점령코자 했다.

여진의 가장 큰 골치병인 인구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인구가 곧 국력이니, 명나라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수순이었다.

“오만한 한족 놈들! 우리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지, 얼마나 오랜 인내를 거치며 복수의 이빨을 갈아왔는지, 이제부터 우리들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후금이 보유한 병력은 7만에 달했다.

팔기군(八旗軍)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들이 그 중심이었다.

그들은 험준한 지형에 살면서 주변의 부족들과 싸우며 성장해왔다. 비록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그 담력과 용맹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아이신! 아이신! 아이신!”

“명나라 황제의 목을 취하자!”

여진 전사들은 소리를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족들에게 번번이 수탈을 당해온 자들의 복수. 저들에게 당한 것을 백 배, 아니 천 배로 갚아줄 것이다.

그게 바로 금나라 후예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