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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제4장 여진 봉쇄령(1)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매던 만력제는 꿈을 꾸었다.

아침 해가 뜬 초원 위에 오랑캐 여인이 있었다. 멧돼지 가죽을 머리에 두른 채, 가느다란 허리에는 쇠로 만든 띠를 찼다.

이윽고 여인은 왕성한 혈기를 띤 준마에 오르더니, 초원을 가로지르며 한참을 내달렸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등자가 부딪치며 금속음이 들렸다. 여인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일 뿐임에도, 이를 지켜보던 만력제는 알 수 없는 오한과 가슴을 옥죄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대체 저 여인은 누구인가? 하얀 피부의 여인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것뿐이거늘… 어찌 이리도 무섭단 말이냐. 하늘 위의 태양과 지평선 너머의 초원들이 모두 저 여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구나.’

강한 바람이 분 탓일까. 하늘 위를 점령한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잠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던 중. 말을 타고 있던 여인이 곧장 만력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주익균아, 내가 너의 천하를 가져가겠다!”

그 외침에 만력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 오랑캐 여인 따위가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단 말인가.

그럼에도 오랑캐 여인은 박차를 크게 가하면서 달려들었고, 이윽고 손에 쥐고 있던 창을 휘두르며 만력제의 가슴을 찔렀다.

“으아아악!!”

그 장면을 끝으로 만력제는 꿈에서 깨게 되었다.

그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의복까지 모두 푹 젖을 정도로 대경실색하고 말았는데, 꿈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공포가 가시지를 않았다.

상서롭지 못한 꿈인 건 확실했다. 오랑캐 여인이 천하를 훔치겠다고 선언한 불길한 악몽이 아닌가.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아직도 병세가 심각하십니다. 일어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정 귀비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만력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해몽을 맡기기 위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비롯해, 명석한 식견을 가진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었다.

신하들은 난데없이 궁궐로 입조하여 꿈 풀이를 해야만 했다.

“경들은 서둘러 기탄없이 말해보라.”

그 말에 한 신하가 답했다.

“오랑캐 여인은 분명 여진(女眞)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폐하.”

“여진?”

“여인이 멧돼지 가죽을 두르고 있으니 이는 곧 누르하치를 말하는 것이옵고, 쇠로 된 띠는 누르하치의 부족인 아이신(愛新)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멧돼지 가죽은 만주어로 하면 노이합적(努爾哈赤), 즉 누르하치가 된다.

쇠는 아이신이요, 여진족에게 있어 허리띠는 부족장을 상징하는 치장이다. 쇠 부족은 누르하치의 출신 부족이며, 부족장은 누르하치를 뜻하는 것이리라.

만력제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완벽한 해몽이었다. 그 오랑캐 여인은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분명해보였다.

“과연 그러하다. 만주 오랑캐들이 감히 짐의 강산과 천하를 강탈하려 하는구나!”

한낱 개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력제는 꿈속에서 오랑캐 여인에게 맞은 창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슴이 얼얼하게 아파오는 것 같았다.

지금껏 황실에서 호의호식하며 부족할 것 없는 만승천자의 인생을 보낸 만력제에게 있어, 오랑캐 여인의 도전은 매우 불쾌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도저히 꿈이라고 묵과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불안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이 꿈은 분명 대명(大明)의 선조들께서 짐에게 보내는 경고일 것이다. 모든 장수들을 소집하라! 여진족 놈들을 이대로 가만둬서는 안 되겠다. 놈들을 기필코 말려죽이리라!”

30년 만에 만력제가 소집령을 내렸다.

여진 봉쇄령.

걸출한 무장들을 국경으로 모두 투입시키는 것과 동시에, 만주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에도 여진족과는 그 어떤 교류도 해서는 안 된다는 봉쇄령을 내렸다.

비록 명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고는 해도, 황제의 권위는 아직까지도 건재했다.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서 국경을 강화하는 한편, 만주에 있던 명나라 상단들을 모조리 복귀시키면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 * *



비록 여진족과 여러 번이나 마찰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명과 여진은 서로의 특산품과 물자들을 교류하면서 무역을 해오고 있었다.

이번 일로 만주와 교류하며 금력을 쌓아가던 상단들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황제가 직접 엄명을 내렸기 때문인데, 만주의 인삼과 모피들을 잔뜩 사들이던 그들만 결국 독박을 쓰게 된 꼴이었다.

“국경을 함부로 넘는 자들은 예외 없이 엄벌할 것이다!”

“황명을 따르지 않으면 역적죄로 처단할 뿐이다!”

국경선으로 장수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가난과 궁핍에 지쳐 만주로 떠나는 유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조정이 가렴주구를 일삼는 통에 백성들이 오랑캐들에게 귀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만주로 이어지는 국경이 모두 봉쇄되면서 헛걸음을 해야 했다.

‘이거 우리 쪽이 먼저 선빵 날린 거 맞죠?’

[선빵? 크흠… 황실이 먼저 여진에게 칼을 들이민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급한 결정이었다.

아직 대명은 여진족의 진정한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지금의 여진족은 몽골을 흡수하면서 기세등등해진 상태였다. 무역 봉쇄령은 여진을 크게 분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곧이어 벌어질 사르후(薩爾滸) 전투의 원인으로 작용하겠지. 명나라와 후금의 천하를 건 전면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군사들을 모두 관문에 배치시켰습니다.”

“해안은 물론, 부두와 나루터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승주와 조문조가 주유검에게 보고를 올렸다.

황실에서 내린 봉쇄령은 요서군을 다스리고 있던 주유검에게도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조정이 직접 주유검을 자금성으로 소환한 것 역시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만주로 통하는 길들은 모두 요서군과 이어져 있었고, 이를 다스리게 된 주유검으로서는 봉쇄령을 우선시해야만 했다.

“홍이포를 가져와라. 조금이라도 흠집을 냈다가는 엉덩이를 갈라주마!”

“조심히 다뤄!”

무장들은 홍이포를 수송하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서양 상인들을 통해 구입한 30문의 홍이포. 그 중 11문을 산해관에 배치했다. 여진족이 대규모 공습을 시작한다면 분명 만리장성의 최동단을 노릴 것이고, 반드시 산해관이 격전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운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장수들은 격앙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팔기군이 언제 덮칠지 몰라 두려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분명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요!”

“여진족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뎁쇼. 그 불같은 성질의 오랑캐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요?”

그동안 여진족과 교류했던 상단들은 강한 우려를 표했다.

대명과 조선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도 여진족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다시 말해 여진족이 그동안 특산물로 팔던 인삼과 모피들이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

지금까지 외국과의 무역으로 금력을 주무르던 여진족으로서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쟁여놓은 인삼은 썩게 되었고, 귀중한 모피 역시 개털이 되어버렸다. 수입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던 여진족 부족들은 굶주림을 겪었다.

“저,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선교사 아담이 주유검을 향해 달려오며 말했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걸 외국에서 온 선교사라고 모르지는 않을 터.

병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경계를 서기 시작했고, 국경의 관문들마다 병력이 크게 보강되었다.

이것은 분명 전쟁의 징후였다. 지금껏 중원에서 전쟁을 겪은 바가 없던 아담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병사로 징집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설마 색목인 선교사를 병사로 쓰겠나. 넌 그냥 교회로 달려가서 애들이나 가르쳐라.”

“그, 그래주신다면야 감사하죠. 저 같은 건 써봤자 밥만 축낼 게 분명하니까요. 말라깽이인 제가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충실한 종이라면서 하는 말하고는. 지금 당장이라도 순교시켜버리고 싶군.”

원나라 시절에는 색목인도 병사로 차출되고는 했다.

무관으로 활동한 적도 있으며, 한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나 도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세워진 명나라는 달랐다.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았던 원나라와는 달리 색목인을 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담이 자발적으로 입대를 결심했더라도 무관들이 거부했겠지. 그 정도로 명나라는 색목인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혹시 성당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겠죠? 어떻게 세운 성당들인데…….”

만약 아담의 말을 다른 장수들이 들었다면 불경하다며 볼기짝을 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유검은 아담을 썩 괜찮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괘념치 않았다. 지금까지 한족들로부터 괄시를 당하다가 겨우 성당을 세우고 포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갑작스레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누구나 아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피해가 없을 리가 없지. 나라가 멸망하는데 과연 성당이라고 온전할 수가 있을까?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하면서 불살라질 게 뻔하다.”

썩 괜찮게 생각한다고 했을 뿐, 짓궂은 장난을 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주유검의 장난 아닌 장난에 아담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독스런 야차(夜叉) 같은 여진족들이 장성을 넘어와 군현들을 모두 약탈하게 된다면, 귀중한 장식품들이 많은 성당이 가장 먼저 노려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성당은 갈 곳 없는 미망인과 고아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아녀자들을 약탈하기 좋아하는 오랑캐로서는 성당을 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전하! 전 이제 여기가 아니면 갈 곳도 없습니다! 게다가 성당과 신도들을 두고 도망칠 수도 없고요!”

“우리가 이기길 기도해라. 손발이 닳도록 빌고 또 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호, 혹시 신의 기적을 바랄 정도로 상황이 절박한가요?”

“절박한 수준을 넘어 위태롭기 그지없지.”

주유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아담은 입에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반응했다. 요서군에 모여든 천주교 신도들만 하더라도 족히 20만은 넘었다. 단지 무료배식이나 타먹으려는 백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둘씩 진정으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개종을 하면서 신도들의 수도 대폭 늘었다.

아담으로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만약 이곳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두 번 다시 중원에서 포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서둘러서 예수회에 일러 지원토록 하겠습니다! 여기가 무너지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질 테니까요. 신도들을 버릴 수도 없는 일이구요.”

동방의 선교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회로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사안이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무역 봉쇄령을 실시하면서 더 이상 여진족과는 화의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무식한 야만인들은 말귀가 통하지 않는 자들이다. 물론 지금까지 명나라 조정의 견제로 제대로 된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지만, 적어도 문명화된 한족들과 교섭하는 쪽이 훨씬 수월했다.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에서 더 많은 신식 총기들을 들일 수 있겠는가? 이번 전쟁으로 신식총기들의 우수성을 여실히 깨달았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돈이 모자라니 외상으로 달아뒀으면 하는데.”

“그쪽 상인들이 얼마나 돈을 밝히는데요! 선교사인 제가 목을 걸지 않고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방법을 쓰도록 하지. 선교사가 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면 저들도 듣는 시늉은 할 테니까.”

“예?”

주유검의 말에 아담은 어깨를 크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