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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제3장 북원 전쟁(4)



총구가 겨눠졌다.

화승총을 쥐고 조준하는 모습부터, 방아쇠를 당기는 과정까지.

노련한 경험을 갖춘 용골대는 살의를 맡는 직감이 뛰어났다. 성벽 위의 남성에게서 자신을 죽이려는 살의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직감적으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타아앙!!

고요한 정적을 깨는 총성. 새하얗게 물든 세계 속으로 한 발의 총성이 호쾌하게 울려 퍼졌다.

“크악!”

용골대는 이를 악물었다.

어깨부터 지면에 떨어지며 충격을 버텨냈다.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용골대는 노련하게도 말을 방패삼으면서 몸을 숙였다.

“오랑캐 놈들에게 자비는 없다! 애초에 인간도 아닌 산짐승들이니 모조리 쏴 죽여라!”

주유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벽 위에 포진하고 있던 모든 총병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윽고 쏟아지는 총탄세례. 사정거리가 매우 아슬아슬했지만, 여진족에게 닿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총탄에 직격당한 여진족 전사들은 비명횡사를 해야 했고,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피투성이 상태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이놈! 갑자기 방아쇠를 당기다니… 그러고도 네가 명나라의 황족이냐!”

용골대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냈다.

일반적인 화승총의 사정거리가 아니었다. 용골대와 부하들이 사정거리 밖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성 위의 조총병들은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사격을 가해왔다.

‘놈들에게 새로운 무기가 있단 말인가? 저 화승총은 비정상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 어서 본대로 돌아가 보고해야 한다.’

얼마 후, 총성은 제법 잦아들었다.

분명 장전된 탄환을 모두 쓴 것이리라. 그 틈을 타 용골대는 다시 말 위에 올랐고, 고삐를 당기며 전력질주로 빠져나갔다.

“퇴각하라!”

“후퇴! 후퇴!”

살아남은 기수들이 제법 많았다.

정백기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성장한 정예병들이다. 비록 화승총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해도, 그들의 날랜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타고 있던 말들을 화살막이로 희생시킨 그들은 전사한 동료의 말을 이용해 장소를 이탈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용골대는 누르하치의 심복입니다. 건드렸으니 분명 보복을 해올 겁니다.”

홍승주의 우려에 주유검이 답했다.

“오랑캐들에게 목소리조차 못 낸다면 어찌 대명의 병사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이번 행동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상대적으로 명나라는 오랑캐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 오랑캐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것밖에는 없었다.

“소장이 병사를 이끌고 놈들의 뒤를 쫓겠습니다.”

“눈으로 길이 가로막혀 진격이 어렵다. 더욱이 시야 역시 어둡지. 놈들의 매복 공격을 당한다면 낭패를 볼 위험이 있다.”

조문조의 의견에 주유검은 고개를 저었다.

용골대가 산해관에 애써 모습을 비춘 이유가 뭘까. 그저 으름장을 놓기 위함도 있겠지만, 후방에 본대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눈이 몰아치는 날씨에 굳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산해관까지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불시의 기습이었는데도 죽은 병사가 겨우 2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그만큼 모두 정예라는 뜻이겠지. 누르하치가 자랑하는 팔기군의 실력이 궁금했었는데… 정백기 부대는 초인에 가까운 놈들이구나.’

여진족은 하늘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천하를 이어받을 패자들. 쇠락한 국운을 떠안고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는 몽골족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진족들은 천하를 쟁취하겠다는 열망으로 넘쳤으며, 또한 한족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증오심이 대단했다.

저들이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넘는 순간.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 * *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정백기는 후퇴했다.

전투에서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불굴의 부대였지만, 장성 위에서 무자비하게 사격을 개시한 총병부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후퇴한 그들은 얼마 후 본대와 합류했다. 1천에 달하는 부대가 정백기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혜의 요새를 공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고작 1천의 병력으로 산해관을 뚫을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면목… 없습니다. 이 실책은 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용골대는 차가운 눈밭에 자신의 이마를 찧었다.

감히 대가한(大可汗)의 병사들을 잃은 죄. 목숨으로 갚아도 모자랄 일이었다. 용골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내놓았고, 살아 돌아온 병사들 역시 전우들의 희생을 갚기 위해 죽음을 청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명장 용골대와 정백기 부대를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설마 천하의 용골대가 이런 식으로 낭패를 볼 줄이야. 용골대라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군. 안 그런가?”

“초전부터 총탄을 퍼부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무섭고 사나운 자입니다. 소장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눈빛이었습니다.”

수천 년을 거쳐 내려온 한족들의 오만함.

마치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서 태어난 망령을 보는 듯했다. 그놈은 분명 한족 그 자체였다. 오만하고 교활하며, 위선적이면서도 가혹하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 동안을 접했을 뿐이지만, 용골대는 신왕 주유검이라는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확신했다.

“놈들이 다짜고짜 총격을 가해왔습니다. 게다가 무장한 조총들은 일반적인 조총보다도 위력이 상당했습니다. 놈들이 새로운 조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새로운 조총이라… 신왕 주유검이 다른 황족과는 달리 색목인과의 교류에 열중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설마 저들의 무기를 구하기 위함이었나……. 기술과 화력 면에서는 저들이 앞서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과연 명나라에도 인재가 있었다는 건가.”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

그가 주유검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후금에서 그야말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만주 최고의 명문가인 예허부(葉赫部)의 공주를 모친으로 두고 있었다. 그런 모친을 닮아 미형의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략과 무예에도 모두 능통하였기에 부친 누르하치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그가 1천의 병력을 대동하고 산해관에 온 것은 그의 변덕 때문이었다. 아직 후금은 산해관을 공격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몽골에게 한 방 먹여준 신왕 주유검이라는 자를 알아보기 위해 모험을 했을 뿐이었다.

“개별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대가한께서 아신다면 분명 진노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아버님께서는 불같은 성정이시니.”

용골대의 말에 홍타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생각한 것보다도 제법 시간이 많이 걸린 노정이었다.

눈으로 가득한 가로를 지나 산해관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해가 질 것이니 서둘러 초원을 지나 본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눈이 녹는 봄이 되면 몽골과 대명은 전쟁을 벌이겠지. 과연 누가 이길지… 한 번 지켜볼만 할 거야.”

시대의 격류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과연 누가 천하를 차지하게 될지, 누가 명나라로부터 천하를 찬탈하게 될지, 홍타이지는 그것이 자못 궁금했다.



* * *



눈이 녹고 길이 열리면 몽골군이 침공할 것이다.

그리 예상한 명나라의 병부는 군사를 소집했다. 뛰어난 장군들을 모두 조정에 입조시키는 한편, 요녕성을 관리하고 있던 주유검 역시 황태자의 부름에 따라 자금성으로 입성해야 했다.

‘다 죽어가는 송장 같은데.’

이것이 황태자 주상락을 보고서 주유검이 느낀 점이었다.

황제의 삼남(三男) 주상순은 비대한 몸집을 가진 거구였다. 하지만 장남인 주상락은 뼈와 가죽밖에 없는 송장에 가까웠다. 혈색도 나쁘고, 허여멀건 한 것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태생적으로 몸이 나쁜 건가?

주유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숭정제가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젊을 적부터 조부의 미움을 받아오셨다. 천한 궁녀 출신에게서 태어났다는 게 그 이유였지.]

‘하지만 지금의 황제도 궁녀의 소생이잖아요?’

자괴감 때문이었을까.

자신처럼 천한 혈통을 타고난 맏이에게 미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스로에 대한 미움이 형상화되면서 나타난 감정이겠지. 만력제는 유독 황태자를 미워했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음의 울화병이 육신을 좀먹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비를 보고도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너무 반가워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주상락의 말에 주유검이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황태자를 보면 혈육의 정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기에 놀랐다.

“태원군에서의 승전보는 매우 훌륭했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토록 하거라. 기대하고 있으마.”

황태자는 매우 짧은 말을 남기고는, 주유검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지간이 맞기는 한 걸까. 만약 이 광경을 누군가 보았다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주상락은 쌀쌀맞기 그지없었고, 주유검의 주위에 있던 숭정제는 살아있는 아버지를 보고서도 별다른 말도 없이 침묵했다.

[부황은 감정 표현이 박한 편이었다. 나도 형님도, 크게 좋아하지 않았지.]

‘명나라 직계황족들의 특징은 정신병인가요? 황제는 천하가 인정한 정신병 환자에, 황태자는 말라비틀어진 건어물이네요. 무슨 정신병원도 아니고, 왜 이렇게 환자들이 많아?’

물론 숭정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이후, 과거로 돌아와서 살아있는 조부와 아버지를 보게 된 상황임에도 그는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하다는 감정을 보였다. 육친의 정이 조금도 없는 모습. 황제인 할아버지도, 황태자인 아버지도. 심지어 같은 아버지를 둔 형에게까지도. 홀로 고독하게 자라온 숭정제는 가족들에게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내 어머니는 아버님에게 매일 구박과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목을 맸지. 짐이 불과 일곱 살이던 시기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아버님은 궁녀와 내관들을 뇌물로 매수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단순 사고사로 위장시켰지. 그 이후부터 혼자 남은 짐 역시도 어머니처럼 온갖 구박을 받으며 유년을 보내야 했다. 아버님에게 있어 짐은 그저 하찮은 소실(小室)에게서 태어난 아들일 뿐이니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이 몸의 심장이 왜 육친의 정으로 두근거리지 않는지……. 오히려 악감정이 넘쳐흐르는지.’

[아버님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마라. 오히려 실망만 할 뿐이다.]

‘황태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음에도 후광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거네요. 난이도가 워낙 빡세다보니 허탈감도 안 드네.’

주유검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짐작이 됐다. 명나라 황실에서 어떤 비극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비극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막장가족들의 일화에 주유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황제와 황실가계의 일이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긍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뭐부터 해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유검은 자금성의 전각들을 바라보았다.

이쪽 세계로 넘어온 이후부터 그는 항상 바쁘게 살았다. 빈번하게 이곳을 들락날락거린 적은 있었어도, 유유자적 자금성의 으리으리한 생활을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저는 황손인데도 왜 왕비(王妃)가 없는 거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황제에게서 왕작(王爵)을 하사받은 황손이거늘, 정실부인조차 없다. 물론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바로 옆에 지아비인 숭정제가 있는데, 설마 부인인 사람과 노닥거릴까.

[궁에서 황태자로 인해 죽은 숙녀(淑女)의 아들인데 누군들 좋아하겠느냐? 연관되었다가는 집안에 화를 미칠 것이라 생각하겠지.]

‘아까 들어서 충분히 짐작 가는 이유이기는 한데……. 그럼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요? 적어도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럼 별수 있겠느냐.]

숭정제는 짧게 답을 했다.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젊은이에게는 매우 가혹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