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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제3장 북원 전쟁(3)



명나라와 북원의 관계는 빠르게 냉각되었다.

한겨울의 눈보라보다도 차가운 냉기가 몰아쳤다. 서로의 입장이 달라 결코 화의(和議)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원(北元) 6부족의 우두머리인 링단으로서는 아직 몽골의 혼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줘야만 했다. 한편 명나라로서도 한족의 자존심을 걸고 결코 오랑캐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이 한겨울이라는 점이오. 눈이 녹을 때까지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니.”

황태자 주상락이 좌우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북원이 군사를 움직이려면 적어도 내년 4월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야 할 터인데, 눈 더미로 길목이 모두 막혀 있으니 크게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는 명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사를 소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본격적인 추위와 혹한이 몰아치는 한겨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을 섣불리 건드린 게 화근입니다! 오랑캐들이 북쪽으로 밀려 올라갔다고는 하나, 놈들의 기세는 여전히 사납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부시랑 심관은 신왕 주유검의 군사행동을 비판했다.

그는 몽골의 대대적인 침공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나라 조정의 장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황제가 사로잡히고 근왕군이 대패하는 등,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병부에서는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주유검과 인연이 깊은 병부시랑 광시정이 예부의 의견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예부시랑께서는 오랑캐들에게 폐하의 백성들이 납치당했는데 그걸 두고 봐야만 했다는 말이오? 대체 예부시랑은 어느 나라 백성이오!”

“너무 성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견일 뿐입니다. 적어도 사로잡은 오랑캐들만큼은 석방해도 좋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백성들을 살육하고 가축을 빼앗았으며, 아녀자들까지 범한 놈들이오. 어찌 살려 보낸단 말인가! 신왕 전하께서는 오만한 오랑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오.”

광시정의 의견에 대다수의 신하들은 동조했다.

물론 대부분은 몽골과의 전쟁을 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광시정의 말에 찬성해야 했다. 장차 황위를 물려받게 될 황태자의 앞이었기에, 황태자의 아들인 신왕 주유검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지금은 폐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비상시국이오. 오랑캐들에 대한 경계는 병부가 맡아 관장하고, 각 부의 경들도 모두 경거망동을 삼가시오.”

황태자가 내린 명령은 모두 정석에 가까웠다.

별다른 명안도 아니고, 뛰어난 혜안이 담긴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하들에게서 감탄을 받았다.

작금의 황제가 워낙 업무를 싫어하는 암군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암군에게 시달리던 신하들로서는,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주상락의 모습에 크게 감격할 정도였다.

“은전 7만 냥을 풀어 요녕성을 지원하고, 황실의 내탕금으로 오랑캐들에게 피해를 겪은 태원군을 지원토록 하겠소. 그 일은 호부에서 맡아 관리하도록 하시요.”

“명을 받잡겠습니다.”

육부의 재상들은 모두 예를 취하며 그의 명을 받들었다.

제대로 된 조정회의가 대체 얼마만이던가? 전임자는 물론 그 전임자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조정회의가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황제의 병환이 곧 황실의 큰 축복으로 찾아왔다.

어느 누구도 차마 말 못할 현실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러했다. 황태자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조정은 마침내 성군이 왔노라 기뻐했고, 북경의 백성들 역시도 크게 기뻐했다.



* * *



황태자가 직접 요녕성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그 덕분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막대한 양의 군량들이 보급되었고,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만세를 불렀다. 아직 즉위도 하지 않은 황태자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것은 불경이었지만, 너무도 기뻤기 때문에 장수와 무관들까지도 덩달아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

“이게 얼마만의 음식인지!”

“어서 먹도록 하세나.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

병사들은 밥을 아귀처럼 먹었다.

입에 쑤셔 넣으면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산해관(山海關)의 병사들은 그동안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터무니없는 취급만을 당해온 것이다.

만리장성의 최동단에 위치한 산해관은 절대로 뚫려서는 안 되는 요새였다. 수도인 북경과의 거리는 고작 760리였다. 다시 말해 산해관이 뚫리면 곧장 수도까지 직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요새를 담당하는 병사들을 홀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풍광이 어떠냐? 산해관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 실로 절경이지 않느냐?]

숭정제의 말에 주유검이 답했다.

“그러네요.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습니다.”

주유검은 새하얀 입김을 토해냈다.

산해관의 첨탑 위에서 바라보는 지상은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새하얀 지평선이 끝도 없이 뻗어 나가 있었다.

그 지평선을 가로막듯 버티고 있는 장성 역시 훌륭했다. 장성은 오랑캐와 구분하기 위한 경계선에 가까웠지만, 산해관은 오로지 방어만을 목적으로 지어진 군사적 요새였다.

산해관이 돌파당하면 수도는 끝장이다. 명 왕조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보수와 증축을 거치면서 산해관은 불굴의 요새가 되었다.

[저 넓은 지평선 너머는 네가 언젠가 정벌해야 할 땅들이다. 요동부터 시작해 만주에 이르기까지, 천하를 다스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들을 제패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뭘 또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세요? 일단 몽골을 때려눕히고 여진족을 상대하는 것만 생각합시다. 거기까지 생각을 했다가는 분명 머리에 쥐가 나버릴 겁니다.”

제법 큰 바람이 불었다.

높은 요새에 위치한 첨탑이라서 그런 걸까. 첨탑이 크게 흔들렸다. 밑에는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

주유검이 홀로 첨탑 위에 오르겠다고 할 때부터 반대했던 그들이었다. 혹시라도 첨탑이 무너져 내릴까, 강풍이 불 때마다 그들은 크게 기겁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그 놈들이 그렇게 강해요? 물론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명장들이니 나라를 세웠겠지만.”

[강하다. 아마 네가 만난 상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겠지. 오랑캐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짐조차도 신장(神將)이라 인정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놈들이 이끄는 비장(飛將)들 역시도 군략에 능한 지장(智將)과 무예에 출중한 맹장(猛將)들이다.]

숭정제의 말에서는 일말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반평생 동안 여진족을 상대해 온 그였다. 그렇기에 뼈저리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진족이 가진 무지막지한 과감성과 기동력, 그를 뒷받침하는 잔인성까지. 한족의 멸시로 단련된 여진족의 증오와 분노도.

그들은 명나라 왕조를 단숨에 멸망시키고 주춧돌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불태웠다.

“미치게 어렵다는 뜻이군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데…….”

주유검은 찐 감자를 베어 물었다.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는 명나라 때에 전래되어 온 것들이었다.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작물들의 보급은 곧이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불러 일으켰고, 오랫동안 기근이 반복되고 있었음에도 명나라는 1억 8천만 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호적으로 확인된 인구만 해도 2억에 가까웠다.

대대적으로 호적조사를 실시한다면 그 2배가 넘는 인구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조정이 각 군현의 호적을 조사하지 않았으므로, 그 정도는 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영감님은 괜찮으세요? 나 같은 놈을 그렇게 맹신해서는 곤란한데요. 고단하고 힘들다면서 도망칠지도 모르고, 여진족에게 목숨을 구걸할지도 몰라요. 어쩌면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살면서 구차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죠.”

주유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차지하고 있는 몸은 신왕 주유검이라고 해도, 안에 든 알맹이는 21세기 대학생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문과(文科). 적어도 공과(工科)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문돌이에 불과한 놈이라 알고 있는 미래지식이 도움이 될 일도 적었다.

쓸모없는 종자.

주유검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다. 하지만 주유검의 조소 어린 자책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빙긋 웃으며 주유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소리냐? 장정들을 이끌던 너는 어느 누구보다도 황제에 가까웠다. 군략이 부족해도 좋다. 학문에 능통하지 못하고 부족해도 좋다. 너는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친 적이 없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슴을 펴라. 만백성들이 너를 따를 것이다.]

“역시 황후에 후궁까지 총 아홉을 들이신 영감님답게 언변에 능통하시네요. 앞으로는 그런 거나 좀 가르쳐줘요.”

[크흠! 쓸데없는 소리를!]

그 뒤로 얼마간 대화를 이어 나간 후, 주유검은 곧바로 첨탑에서 내려왔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 홍승주와 조문조 등의 장수들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첨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내려오는 중간에 자칫 다리라도 헛짚는 날에는 최소 불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그렇게 보면 그대들이 내 아버지라도 된 것 같아.”

“혹여라도 옥체가 위태로워질까, 소장들은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옵니다.”

홍승주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첨탑으로 올라오기 전에 그는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조정에서 내려온 은전들을 병사들에게 하사해서 밀린 봉급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칫 시세가 폭등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주유검은 병사들의 은전 사용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 은전을 식량 구입에 사용토록 권장하면서 각 지역에 은전을 골고루 유통토록 했다.



“전하!”

그때, 요동어사(遼東御史) 웅정필이 황급히 뛰어왔다.

어찌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지체 높은 무장이 얼음장에 나뒹구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무슨 일인가, 장군. 웃기려고 한 것이라면 훌륭했네.”

“그, 그게 아닙니다! 여진족 기병대가 이쪽을 향해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진족? 이 한겨울에?”

웅정필의 안내에 따라 주유검은 여진족 기병대가 훤히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성문에 도착하자 과연 보고대로 여진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병력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300여 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진 기병대들은 모두 팔기군(八旗軍) 중에서도 정예로 이름 높은 정백기(正白旗) 소속이었다. 정백기의 병사들은 고향인 만주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한 불굴의 용사들이며, 그들은 포로를 잡지 않고 모두 몰살시키기로 유명했다.

“나는 타타라(他塔喇) 부족의 일원이며, 팔기군 정백기의 무장인 타타라 잉굴다이다! 여기에 신왕 주유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먼 길을 달려왔으니 응당 손객으로 대우해주길 바란다!”

여진족들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건장하고 용모가 출중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다른 기병들과는 달랐다. 적국의 관문을 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결코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웅정필이 그를 가리키며 주유검에게 설명을 했다.

“만주어로는 잉굴다이라 부르옵고, 우리나라 말로는 용골대라 불리는 여진족 장수입니다. 누르하치가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날랜 비장이라고 알려져 있사옵니다.”

“용골대라.”

주유검의 중얼거림에 조문조가 용맹하게 앞으로 나섰다.

“소신이 저 무례한 놈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과연 맹장다운 호쾌함이었다.

7척에 달하는 체격의 무골은 용골대가 그 상대였음에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산해관의 장수들은 용골대에게 겁을 먹은 모습을 보였으나, 조문조만큼은 당당하게 대장전을 펼치겠다며 용맹함을 보였다.

“놈의 유인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유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앞에 나섰다.

그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용골대라 이름을 밝힌 젊은 청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용골대 역시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 정체를 간파했는지, 입가를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총이 있는데 직접 나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미 심지에 불이 붙은 화승총이 겨눠졌기 때문이었다.

장전은 마친 뒤였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주유검은 용골대를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