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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제3장 북원 전쟁(2)



태원군(太原郡)에서 명나라는 대승을 거뒀다.

이 일을 두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무리한 군사작전이라며 큰 우려를 보냈었다. 하지만 우려가 무색하게도 신왕 주유검은 다수의 몽골족을 죽이고 포로로 잡으면서 화려한 승전보를 띄웠다.

“경하 드립니다, 전하. 이로써 전하께서는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당당하게 첫 승전보를 이뤄내신 것입니다.”

홍승주는 기쁜 모습을 보였다.

어떠한 황족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 아니던가.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다들 가렴주구만을 일삼을 뿐, 황족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본국을 약탈한 오랑캐들을 정벌한 사례는 없었다.

그렇기에 값진 일이었다.

천하에 신왕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황족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지 백성들에게 알려주기에도 충분한 일이었다.

[천하에 중요한 것은 명성이다. 오랑캐와의 전쟁만큼 명성을 드높이는 데 적격인 것도 없지. 훌륭하게 잘해주었다. 신왕 주유검의 이름이 더욱 더 크게 알려지겠구나.]

숭정제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주유검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기대가 어긋난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자신의 육체를 조종하고 있는 주유검의 존재를 그는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겨울에 고립된 몽골족들을 해치웠을 뿐인데요 뭐.’

[오랑캐를 물리치고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네가 구출한 태원군 백성들은 너를 하늘처럼 섬길 것이고, 구원으로 여기겠지. 앞으로도 더욱 더 너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을 만들어내라. 너에게 충성하는 장수와 병사들을 육성해라. 그게 네가 걸어야 할 황제의 길이다.]

싸움에 참전했던 장수들은 주유검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보정총병 왕선. 개원총병 마림. 두 총병들을 비롯해, 주유검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한 장수들이 적지 않았다.

단순히 전공을 쌓기 위해 전투에 참전한 것이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감명을 깊게 받은 인물들은 신왕의 존재를 가슴깊이 새겼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최대한 천하에 명성을 쌓고, 그 명성으로 사람을 얻으라는 말씀이시죠?’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구나. 접신(接神)된 게 너라서 다행이다.]

‘접신이라뇨. 누굴 무당 취급하는 겁니까?’

[시끄럽다. 지금 너는 내 몸을 빌려 쓰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에 대한 경외를 가지도록 해라. 넌 황제의 옥체를 사용하는 무한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누가 빌려 쓰고 싶어서 빌려 썼나. 오히려 저도 피해자거든요. 4백 년 전의 시대에 와서 전쟁이나 치르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물론 주유검도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에 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그동안 자신의 처지에 체념하게 되었고,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명나라 황실을 구원하려 애썼다.

게다가 태원군의 몽골족까지 물리쳤다. 이를 통해 생존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생존에서 한 걸음 더 멀어졌거나.

“저오파(儲澳巴) 부족입니다. 분명 상당히 높은 신분일 겁니다.”

부장 역할을 하던 쉬르파가 사로잡혔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최대한 저항했지만 결국 포로가 되고 말았다. 꼴사납게 살아남을 바에는 차라리 자진하려고도 했지만, 입에 재갈이 물리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어찌할까요? 저오파 부족이라면 분명 북원에서 높은 몸값을 제시할 거라 생각됩니다만……. 그 목을 잘라 조정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놈이 그렇게나 값비싼 몸인가?”

“저오파는 링단 칸(林丹 汗)을 따르는 부족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누르하치의 아들 저영을 물리쳤을 정도로 부족원들이 모두 용맹하기로 유명합니다.”

홍승주가 쉬르파의 머리채를 잡으며 말했다.

놈은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한 오랑캐였다. 결코 그 사정을 봐줘야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신분이 높고 낮고를 떠나 한족 장수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한낱 오랑캐에 지나지 않았다.

“전하, 여기에 차하르(察哈爾)까지 있습니다!”

병사들이 카사르를 돼지마냥 질질 끌어내며 말했다.

차하르는 북원의 왕실 가문이었다. 다시 말해 카사르는 왕족 신분이며, 1천의 병사들을 모두 지휘하는 대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카사르는 얼굴에 많은 흉터와 함께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매단 모습이었다.

“이마에 칼자국이 네 개라……. 네가 무슨 여염집 처녀도 아니고. 게다가 귀걸이에 코걸이까지. 어디 운남성으로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계집애 같은 꼴을 하고 있구나.”

주유검의 비아냥거림에 카사르는 소리를 쳤다.

“닥쳐라, 이 벌레 같은 한족 놈들아! 네놈들을 모조리 씹어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명나라 장수들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저 시끄러운 입을 닥치게 만들어줘야 할 듯했다. 당장이라도 주유검에게 달려들 것 같은 요란스런 행동에 장수들의 표정은 떨떠름하게 굳어갔다.

“이 새끼가, 어딜 감히 신왕 전하께…….”

두꺼운 팔 근육을 자랑하는 조문조가 주먹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르면 몽골족 왕자의 얼굴이 단숨에 함몰될 것 같았다.

하지만 주유검은 손을 들어 장수들을 제지했다.

포로로 잡힌 몽골족이 떠드는 것에 발끈할 필요는 없다. 싸움에서 패배한 개가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크게 짖는 것에 불과할 뿐.

“몸값을 매겨서 몽골 조정과 교섭을 하겠다. 먹을 수 있는 식량이라면 좋겠지. 몽골 놈들에게도 식량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게 해줘야 하니까.”

포로를 이용하면 두둑하게 몸값을 받아낼 수도 있다.

특히 차하르와 저오파 부족이라면 더욱 두둑하게 받아낼 수도 있었다. 주유검은 포로로 잡은 몽골 병사들을 몸값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재산으로 생각해 죽이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놈들을 잘 감시하도록. 나중에 긴히 쓰일 테니.”

주유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몽골족과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1천의 병력을 격파했다고는 하나, 북쪽 초원에는 아직도 원나라의 부활을 꿈꾸는 몽골족들이 가득했다.



* * *



태원군을 습격한 1천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생존자는 고작해야 30여 명 안팎.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원(北元)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연례행사처럼 벌이던 늦가을의 약탈에서 대패를 경험하였으니,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더욱 크게 들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명나라는 쇠퇴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 원의 용맹스런 전사들이 죄다 패주했냐는 말이다!”

북원의 가한(可汗) 링단은 크게 노하여 부족장들을 소집했다.

부족장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급하게 소집된 다루가치들은 물론, 무관들 역시도 변변찮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분명 누르하치가 지난번의 전쟁으로 이를 갈고 있을 터인데……. 이런 시기에 명나라까지 일어나면 우리는 어찌 살아남아야 한단 말이냐.”

문제는 약탈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병주 태원군에서는 패전했지만, 다른 곳을 습격하면 된다.

그런데, 쇠퇴한 명나라가 다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호시탐탐 명나라가 스스로 무너져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링단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한족이 무너지면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가 대원(大元)의 기치를 세우려고 했는데, 다시 명나라가 부활해버리면 오히려 지금의 영토까지도 위험해질 것이다.

“이 겨울에 싸움을 치렀다는 것은 곧, 명나라가 눈밭을 뚫고 태원군을 습격했다는 말입니다. 분명 아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그것을 역이용한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 지금이 겨울이라는 건 동네 꼬맹이도 아는 것이다!”

어느 다루가치의 말에 링단은 크게 노여움을 토해냈다.

누르하치를 크게 꺾어서 좋아했더니, 명나라에도 만만찮은 난적이 있었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 여겼던 명나라에 뛰어난 장수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전투를 이끈 것은 신왕 주유검이라는 황족입니다. 명나라의 황태자 주상락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진의 홍타이지와 나이가 비슷할 것입니다.”

오르도스의 투멘인 보르고가 보고를 해왔다. 그 말에 링단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누르하치에게는 홍타이지가 있더니, 명나라 황제에게도 걸출한 젊은 놈이 있단 말이지. 마치 호랑이와 용에 필적할 기세로구나. 그런 놈들이 장차 보위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어찌 살아남아야 한단 말이냐.”

누르하치의 팔남(八男) 홍타이지.

수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뛰어난 재능을 자랑하면서, 군략과 무예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쟁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몽골에 크게 패퇴했는데, 홍타이지가 단기필마로 돌격을 감행하여 포로로 잡힐 뻔했던 자신의 형 저영을 구출한 바가 있었다.

싸움에서는 무패. 전쟁에서는 필승.

여진의 많은 부족장들은 홍타이지를 전쟁의 화신으로 여겼다. 아버지 누르하치가 여진족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활약들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포로로 잡힌 형제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명나라가 분명 과도한 몸값을 요구해오겠지만… 일단 카사르와 쉬르파만이라도 살려야하지 않겠습니까.”

투멘 보르고가 말했다.

명나라 군인은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다. 분명 어마어마한 몸값을 제시하면 곧바로 받아들일 터.

그 말을 옳다고 여겼는지, 링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전사들은 모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하르와 저오파의 젊은 전사들만큼은 살려야만 했다.

“어서 명나라 조정에 사자를 보내라. 몸값을 제시하면 따를 의사가 있다고.”

링단은 직접 가한의 이름으로 명에 사자를 보냈다.

북원이 과거의 위세를 잃었다고는 하나, 몽골의 저력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들을 타타르라 부르며 멸시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링단은 겁쟁이 명나라라면 분명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예상대로 명나라는 몽골 조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차하르와 저오파의 전사들은 물론, 다른 병사들 역시 거래 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거래 조건으로 내놓은 요구가 실로 가관이었다.

“우리에게 감히 식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단 말이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링단은 크게 격노했다.

설마 한족들이 식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줄이야. 링단은 금은보화를 요구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유검은 그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는 자신들을 비웃는 처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당장 전쟁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족 놈들의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여진 전선의 부족들을 회군시키겠습니다. 절대로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몽골의 다루가치들 역시 전쟁을 주장했다.

이것은 몽골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물론 명나라를 먼저 침공하여 약탈한 것은 몽골 측이었지만, 그들은 타국에 대한 약탈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는 민족이었다. 자신들이 먼저 잘못을 범하였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족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 이것은 모든 부족들이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