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제2장 화포와 십자가(4)



요동의 백성들은 대부분 조선 출신이었다.

왜란이 발발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명나라로 귀부했다.

요동에는 의주(義州),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지에서 피난을 온 백성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들은 여진족을 피해 한족들이 떠나간 도시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요동은 살기 힘든 곳이었다.

거친 산맥이 많아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고, 매번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왔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은 언제 또 왜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요동의 패권을 넘겨줘서는 안 됩니다. 요동을 빼앗기게 되는 순간, 조선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가 끊어지게 됩니다.”

홍승주가 말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요동에 연락을 보내고 있었다.

누르하치에게 만주를 빼앗겼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진족에게 저항하고 있는 군벌들이 존재했다. 이성량이 죽으면서 세력이 크게 꺾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누르하치의 발호를 지연시켜 볼 수는 있었다.

“요동을 지키는 장수들 중에 대부분이 조선인 출신이라고 들었다만.”

“그렇습니다. 요동에 조선인들이 모여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방비를 맡겨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르하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요동의 조선인 장수들은 자신을 받아준 명나라 황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아직도 요동을 점령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요동의 장수들은 모두 합심하여 저항을 펼쳐나갔고, 팔기군을 앞세운 후금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요동의 성벽에 가로막혀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요동에 그 어떤 지원도 보낼 수 없었다.

애초에 명나라 황실은 요동의 조선인 장수들을 도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요동이 아니라 태원군(太原郡)입니다. 몽골족들이 내려와 기승을 부리는 탓에,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놈들을 아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조문조가 강하게 반응했다.

몽골족은 북쪽으로 쫓겨난 비천한 족속들이었다.

그는 천하를 도둑질했던 오랑캐 따위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백성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다시 한 번 싹을 잘라내야 한다.

조문조를 비롯하여 모든 장수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눈발이 거세지고 있으니 몽골 놈들은 돌아갈 길이 끊어졌겠지?”

“예, 그렇습니다. 놈들은 노략질을 하여 재산을 모으면서 국경에 터전을 잡습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어 눈이 녹고 나서야 북쪽으로 돌아갑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약탈을 저질러 온 놈들입니다.”

“그럼 그 뒤를 잡는 것도 가능하겠군. 눈이 가득 쌓이면 저들의 장기인 기동력도 형편없이 떨어질 테니 말이야.”

주유검은 몽골족을 요격하고자 계획했다.

놈들을 이대로 순순히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대대적인 약탈에 성공하면 기고만장해서 또 다시 장성을 넘을 터.

장성 이남으로 온 몽골족을 뿌리 뽑아 절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요녕(遼寧)과 산서(山西)의 총병과 제독들에게 연통을 보내 군사를 소집해야 한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주유검에게는 이렇다 할 병력이 없었다.

요서군에 주둔은 하였으되, 가진 병력이라고는 고작해야 호위 병력이 전부.

몽골족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군현에서 군사를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태평스럽게 직접 군현을 돌면서 병사들을 징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각 절도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권한 바깥의 월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녕성 지방의 지휘사 계급들이 모두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수뇌부에 큰 구멍이 생겼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황손인 신왕 주유검에게 명령권이 있었다.

“중산국(中山國)을 통과해서 석읍(石邑)과 낙평(樂平) 방면으로 진격하면 몽골족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군현들에 미리 일러 주의를 기울이라고 전하겠습니다.”

덕분에 주유검 휘하의 장수들은 바빠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감히 명나라를 침범한 오랑캐들을 잡는 일이다.

이를 토벌하는 임무라면 설령 눈밭에서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기쁠 터였다.



* * *



주유검이 계획한 작전은 기상천외한 규모를 자랑했다.

요서군에서 시작하여 태원군으로 진격한다.

북쪽에서부터 대회전(大回轉)을 개시하여 몽골족이 도망칠 것으로 예상되는 퇴로를 막아버리는 것. 다시 말해 적을 완전히 전멸시키기 위해 계획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조정에는 허락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명나라 조정은 신왕 주유검이 장성 이남을 습격한 몽골족을 치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고,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에 황태자 주상락의 이름으로 이를 윤허했다.

“눈밭이 제법 깊다. 조심해서 건너라.”

“오로지 앞에 걷는 전우의 등만 바라봐라. 절대로 뒤쳐져서는 안 된다.”

요서군의 병력만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각 군현의 부대들이 속속 집결했다.

성(省)을 다스리는 군지휘사와 총병이 병력을 이끌고 합류한 것은 물론, 신왕 주유검의 눈에 들기 위해서 무턱대고 참전한 장수들도 있을 정도였다.

“개원총병 마림,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겠습니다.”

“보정총병 왕선 역시 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중앙군이 뼈대를 이루고 지방군이 합류하면서 살이 된다.

만약 합류한 지방군들이 죄다 얼치기에 불과했다면 추위 속에서 시간만 허비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우 다행스럽게도 합류한 지방군들은 명나라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예들이었다.

개원총병 마림. 보정총병 왕선.

그들은 북원과 몇 번이고 교전을 치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었다. 그 부하병력들 역시 전쟁에 경험이 있어 크게 믿어볼 만했다.

“절대로 놈들이 눈치를 채서는 안 된다. 이번 작전은 최대한의 기동력을 필요로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주유검의 명령에 총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병들은 매우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전쟁경험이 없던 주유검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의 황손이라 얕보았던 장수들도 많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유검의 명령을 굳게 따르기 시작했다.

‘역시 황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요.’

[언젠가는 네가 다스려야 할 장수들이다. 마림과 왕선은 잘만 다루면 귀중하게 쓰일 패들이니, 지금부터 안면을 익혀둬야 한다.]

숭정제는 매순간마다 주유검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어느 누가 쓸 만한 인재인지.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충성을 얻어낼 수 있는지.

특히 용인술(用人術)에 대한 말들을 많이 했다. 황제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 바로 용인술에 있음을 가르쳐주는 대목이었다.

[장수들 중에는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난 놈들이 많다. 저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필시 일을 그르치고 말게다.]

‘이럴 때는 으름장을 놔야죠.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 사리분별을 잘할 수 있게.’

주유검은 모든 장수들을 소집했다.

눈보라를 뚫으며 강행군을 하던 부대들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

주유검은 얼굴에 내려앉은 서리를 걷어냈다.

그는 최대한 굳은 표정을 보이면서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중년 장수들에게 경고했다.

“나는 조정의 중대한 명령을 받은 몸이다. 더욱이 병석에 누우신 황제 폐하를 대리하고 계신 황태자 전하의 명령을 직접 받고 있다.”

주유검이 내세운 것은 ‘황실의 권위’와 ‘조정의 이름’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장수들 중, 어느 누구도 주유검보다 정통성이 높은 자는 없었다.

그 말은 곧 주유검이 가장 높은 신분이라는 뜻이며, 당연히 모든 장수들은 주유검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숭정제는 혈통의 우위를 이용하라고 주유검에게 충고했다.

그저 신분만으로도 상대를 겁먹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대보다 한 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일이 될 터였다.

“비록 여러 지방에서 모여들었지만 그대들은 모두 명나라 조정의 명을 받드는 무관들이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내 명령을 받들어라. 단독행동을 하는 장수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목을 효수하겠다. 황실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주유검은 최대한 무게를 잡았다.

그로서도 이 일은 최대한의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전쟁에 노련한 장수들 앞에서 군명(軍命)을 언급해봤자 우습게 보이기만 하겠지. 고작해야 열일곱의 황손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 통수권은 이쪽에 있었다.

명나라 조정과 황태자의 명령을 받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주유검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잘했다. 장수들이 겁을 먹었다. 적어도 이번 작전에서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게다. 의외로 잘하고 있구나.]

‘센 척을 한 것에 불과한데요 뭐. 느껴지지 않으세요? 심장이 터질 거 같은데.’

[사내 녀석의 심장을 느껴봤자 어디에 쓰겠느냐.]

명나라 군관들은 죄다 사납게 생긴 인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수차례나 죽여 봤을 것 같은 깡패 같은 관상.

넓은 어깨에 칼자국이 가득한 사내와 전문으로 장기밀매를 할 것처럼 비열하게 생긴 놈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군인들이었다.

무예에 뛰어나고 지휘에 능숙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주유검보다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런 장수들의 머리 꼭대기에 위치한 사령관 자리에 주유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황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군략이 아니다. 무예는 더더욱 아니지. 네가 눈앞의 장수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지금부터 시작된 셈이지. 네가 과연 황제로서의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주유검은 숭정제에게 조소를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장수들을 쳐다봤다.

최대한 거만하고, 자신감이 넘쳐나는 모습을 보이며 장수들 앞에 섰다.

홍승주, 조문조, 손전정, 노상승.

숭정제의 추천으로 기용한 네 명의 장수들 역시 함께하고 있는 자리였다.

긴장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유검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들을 직시했다.

“몽골 놈이 자리를 잡은 곳은 태원군이다. 홍무제(洪武帝) 폐하에 의해 북쪽 초원으로 쫓겨난 오랑캐들이 지금 장성을 넘어 황실의 영토를 습격했다. 오만하게도 놈들은 대명(大明)의 재산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납치하면서 죽이기까지 했다. 응당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야 할 때다. 하늘을 대신하여 우리들이 놈들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

그 말에 장수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러운 타타르 놈들.

반드시 쫓아가 죽인다.

몽골족에게 강한 적의와 분노를 가지고 있는 만큼, 그들은 주유검의 말에 크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몽골 놈들은 모두 죽여라. 별도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한다. 포로 따위는 없다. 눈에 보이는 오랑캐들은 모두 죽이도록 하라.”

장수들의 복수심을 이용해라.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죽이겠다는 의지다.

인간은 결코 인자한 생물이 아니다.

광기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만 던져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인명을 살상하는 폭발들은 언제나 작은 불씨에서 비롯되었다.

[그래, 대중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너의 무기다.]

숭정제는 계속 속삭였다.

대중을 지배하고 마음을 장악해라.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만인을 다스리는 재주를 가져야 할 터.

우선 정통성이 되어줄 장정들의 마음을 얻는 것부터가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주유검은 용인술을 통해 전장에서 창검이 되어 싸워줄 장정들의 조력을 이끌어냈다.

“마 총병.”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선진을 맡기겠다. 우선 백양(伯陽)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의 퇴로를 막아라.”

“명 받들겠나이다.”

사냥에 있어서는 몰이꾼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며 사냥장소를 좁힌다.

그러다 보면 짐승들은 서서히 사냥꾼이 원하는 곳으로 밀려나면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그 순간을 노려 목덜미에 칼을 쑤셔 박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