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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제2장 화포와 십자가(3)



1618년 12월(만력 46년, 광해 10년).

조선(朝鮮) 한성부(漢城府).

창덕궁(昌德宮).



조선군왕 이혼은 왜란에서 승리한 군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왕이 남긴 정적들로부터 항상 정치적 위협을 받고 있었음에도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光海君)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조선팔도를 돌며 의병을 지원하고 항전을 이어왔기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또 다시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하였는가!”

“그렇사옵니다. 여진족이 통합된 이래로, 저들의 힘이 너무도 강성해졌습니다. 혹여 저들이 말머리를 조선으로 향하지 않을까, 소신은 그것이 우려스럽사옵니다.”

부제조(副提調) 강홍립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국경의 만호(萬戶)들은 잇달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보고했고, 심지어 여진족들이 두만강을 건너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고도 했다.

후금은 포화상태를 겪고 있었다.

그 힘이 과하게 넘치니, 군사를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모두 통일한 이후 자신들의 영토를 만주(滿洲)라고 자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발호하는 여진을 막을 대책이 있다고 하던가?”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습니다.”

“요동까지 두 눈 뜨고 빼앗겼으니 당연히 아무 것도 못하겠지. 하지만 천하를 여진족에게 빼앗기게 생겼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대처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저들 스스로가 멸망의 기로를 걷고 있구나.”

이혼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었다.

북쪽의 여진족들이 준동한 이래, 조선은 다시 한 번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왜란을 극복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위험이 엄습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의 조선은 나약했다.

시대의 격변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왜란의 여파가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건만, 가혹하게도 하늘은 조선에게 위기를 던져주기에 바빴다.

“수도의 도감군을 압록강과 두만강에 배치하도록 하라. 언제라도 여진족의 남하를 막을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전하! 더 이상의 병력을 차출하면 수도의 방비가 흔들리게 됩니다.”

강홍립은 이혼의 명령에 반대했다.

이미 수많은 신하들도 반대한 문제였다.

수도가 위태롭다.

방위군을 국경으로 보냈다가는 불손한 무리가 거병을 할지도 모른다.

폐모살제(廢母殺弟).

광해군은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를 폐하였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데 직접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없었지만, 광해군을 반대하는 서인과 남인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명이 쇠퇴하고 여진이 성장하고 있다. 과거 금나라가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하였던 것처럼, 여진족은 천하를 도모하려 할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또 다시 오랑캐들의 시대가 오려는 것인가.”

“무식한 여진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저들은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부터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부족생활을 하던 미개인들입니다. 벌판을 떠돌아다니는 놈들일 뿐이니, 주상께서는 부디 심려치 마소서.”

강홍립의 말에 이혼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러한 생각이 지금의 여진족을 강하게 만들었다.

한족들은 매번 여진을 무시해왔다. 오랑캐 여진이라고 괄시하며 업신여겼다.

결국, 한족의 오만함이 누르하치라는 인물을 태어나게 했다.

여러 번이고 용의 역린을 건드렸고, 범의 꼬리를 수차례 밟았다. 그 결과, 한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은 여진족들이 드디어 천하를 향해 두 팔을 뻗기 시작했다.

“지금은 명나라에 국운을 걸겠다……. 하지만 저들이 여진족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조선은 오랫동안 이어진 사대관계를 끊을 것이다. 지금의 조선은 나약하다. 존립을 위해서라도 보다 교활해지고 냉철해져야만 한다.”

서인과 남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나라에게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왜란에서 승리를 하는 데 명나라의 도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나라를 위해 국운을 걸 수는 없었다. 배은망덕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하기 위해서 만백성들을 모두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조선이 명나라를 따른 것은 그들이 천하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저들이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무너지는 순간, 우리에게는 저들을 따를 이유가 없다. 하등 도움도 안 되는 나라를 상국으로 모실 수는 없지.’

인의(仁義), 보은(報恩)?

웃기는 소리.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나라를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 은혜를 저버리겠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팔도를 다시 위험에 빠트릴 바에야, 평생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오명을 받으리라.

광해군, 이홍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감군의 상태는 어떤가?”

“조총으로 무장한 2천 명의 도감군이 대기 중입니다. 왜란을 겪으면서 훈련된 정예들이기에 믿으셔도 좋습니다.”

강홍립이 자신 있게 말했다.

훈련도감의 부제조였기에 직접 병사의 조련을 담당해왔고, 용맹스런 도감군은 강홍립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여진족들이 영토 확장을 위해 강을 넘어오는 순간, 그 즉시 교전이 가능했다.

이미 많은 부대들이 국경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에 배치되어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전하, 영의정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정인홍 대감이 말인가.”

정인홍은 대북파를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의병장 출신으로, 담대하고 강경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명신 유성룡을 탄핵시킨 인물로 악명이 높았지만, 이혼이 광해군이던 시절부터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한 바가 있었다.

“영의정을 들라하라.”

이혼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분명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애써 자신을 찾아온 거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영의정의 말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언인 것을.

탐욕스런 성격의 이이첨과는 달리 정인홍은 나라를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소신은 이만 나가보겠사옵니다.”

“병사들을 믿고 맡기겠네, 부제조. 언젠가 경의 역할이 중대할 때가 올 테니.”

강홍립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가 나서기 무섭게, 흰머리가 성성한 늙은 신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12월이 되면서 더욱 추운 한기가 북쪽에서 몰려왔다.

본격적으로 한파가 시작된 것이었다.

만리장성 너머로 들어온 추위에 요서군은 서리로 뒤덮였다.

항상 기아와 빈곤으로 시달리는 변경이었지만, 올해만큼은 아슬아슬한 수준으로나마 식량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그나마 견뎌낼 수가 있었다.

“전하, 조금만 더 가면 장성에 도착할 것이옵니다.”

“제발 그러길 바라겠네.”

손전정의 보고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유검은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장성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세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주유검은 장성을 점검하기 위해서 군마를 재촉했다.

“본격적으로 한파가 들이치기 전에 몽골족이 기승을 부린다고 들었다.”

그 말에 손전정이 답했다.

“병주(并州)의 태원군(太原郡)이 주로 노려지고 있습니다. 몽골인들이 겨울나기를 하기 위해 물자들을 약탈하는 것입니다.”

갑옷 위에 털가죽을 입은 손전정은 잔뜩 서리가 낀 모습이었다.

물론 주유검과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와 어깨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얼굴 역시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입을 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지독한 추위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눈보라까지도 거세지고 있었다.

만약 서양에서 온 나침반이 아니었다면 눈보라 속에서 조난을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태원군이라면 장성 안쪽인데, 북원이 거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단 말인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몽골이 기승을 부린 건 오래 전의 일입니다.”

명나라의 적은 여진족만이 아니었다.

남쪽에서 거병한 주명(朱明) 정권에 의해 중원을 잃고 쫓겨난 몽골족 역시 골칫거리였다.

다시 초원에 터전을 잡게 된 북원은 내부의 분란을 겪으며 크게 쇠퇴했다.

심지어 명나라의 원정까지 겹치면서 두 번 다시 회복하지 못할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몽골은 겨우겨우 초원에서 연명해나가며 명나라에 복수할 날만을 기다려왔다.

“북쪽 초원에 위치한 몽골족들은 항상 식량이 부족합니다. 이를 보충하고자 매번 아국의 변경을 위협해왔습니다.”

“굶주린 맹수가 사나운 법이지. 죽자고 달려들면 위험하겠군. 쇠락을 되풀이한 몽골족이라고는 해도, 천하를 제패하고 서양까지도 위협했던 놈들이니.”

위대한 역사를 장식한 원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초원의 지배자로서의 명성은 남아 있었다.

용맹스런 몽골 전사들은 여전히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초원으로 쫓아낸 명나라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과거의 영예를 되찾는 것과 명나라에 복수하는 것.

명나라가 점차 쇠퇴하면서 북방 초원의 몽골족들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침공을 해올 것이 분명했다.

“이만 돌아가지. 눈보라가 더 거세지기 시작했군.”

“선두에 서겠습니다.”

손전정이 말머리를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과연 충성스런 무장이 아닐 수 없었다.

주유검은 그를 부리기 위해 휘하로 삼았을 뿐이었지만, 손전정은 황손을 섬기게 된 근위무장이 된 것을 은혜라고 여기는 것인지 무상의 충성을 바쳤다.

“요서로 회군한다!”

“한 놈도 뒤처지지 마라! 낙오되는 놈은 버리고 떠날 줄 알아라!”

홍승주와 조문조가 병사들에게 소리를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요서군을 습격한 혹한의 눈보라는 죽음에 가까웠다.

이를 가벼이 여겼다가는 눈에 파묻혀서 동사하기 십상이었다.

추위에 얼어 죽는 백성들이 매번 속출하는 것은 물론, 동상으로 인해 손가락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왜 하필 이런 날씨에 산책이나 시킨 겁니까?’

말을 몰던 주유검이 옆에서 나란히 따라오던 숭정제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숭정제가 답했다.

[겨울이 오면 몽골족이 기승을 부린다. 분명 장성을 넘어 공세를 가해오겠지. 네가 장성을 순찰함으로써 장성에 주둔한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또 전쟁입니까? 반란군에 오랑캐들까지, 아주 끝이 없구만.’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비록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주유검에 빙의되었다고는 하나, 그 알맹이는 21세기의 대학생이었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그냥 아픈 것도 싫고, 지독하게 아픈 건 더 싫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전쟁은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행복한 결말이 되어야 할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적인 사욕이 있다면 천하절색의 미녀를 부인으로 두고 싶네요.’

[너는 명나라를 구할 몸이다. 짐은 이미 확신하고 있다. 나라를 구한 황제가 된다면 처첩이든 후궁이든, 몸이 버티는 동안 잔뜩 두면 되지 않겠느냐.]

숭정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자신의 마지막 염원을 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임을 그는 의심치 않고 있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청년.

지금 그는 겨우 걸음마를 막 시작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천하가 주목하는 인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