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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제1장 신왕 주유검(3)



어느 누구도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에는 부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들이 죽어 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요녕(遼寧) 지역에 부임할 바에는 차라리 퇴직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게 낫다.

그런 말이 장수들 사이에서 흔하게 나돌 정도였다.

근자에 여진족과의 싸움이 부쩍 격해졌다.

요동을 다스리던 총독(總督)이 전사했고, 요서를 관장하던 도지휘사(都指揮使)까지도 잇달아 전사했다. 명나라 북방을 담당하던 인물들이 모두 누르하치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여진족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더러 요서로 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신하들의 간곡한 요청에 복왕(福王) 주상순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주상순은 황제의 셋째 아들이다.

또한 한(漢)의 수도였던 낙양과 섬서성 일대를 봉읍(封邑)으로 다스리고 있는 제후였다.

그런 주상순에게 낙양이 아닌 요서로 부임지를 옮기라는 말은 곧 자신을 멀리 귀양 보내겠다는 말과 같았다.

“당장 부황에게 고하여 네놈들을 모두 죽이라고 할 것이다! 가, 감히… 나에게 감히!”

“하오나 전하! 국경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직계 황족들께서 이를 담당해 왔습니다. 그게 바로 대명의 오랜 전통입니다. 어찌 거부하려 하십니까?”

“네놈 같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로 당당하게 걸어가겠느냐! 장수도 병사들도 죄다 죽어 나가는 곳이거늘, 감히 나더러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더냐! 네놈들이 필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분명하렷다!”

병부(兵部) 관료들의 부탁을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주상순은 퇴폐한 황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무려 몸이 40관(150㎏)에 달하는 거구였고, 매관매직과 수탈을 일삼았기에 낙양성의 국고에는 항상 곡식과 셀 수도 없이 많은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게다가 서른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없었다.

부유한 낙양을 두고 언제 여진족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요녕 지역으로 가달라는 요청은 주상순에게 있어 말 그대로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 * *



이미 육부의 재상들은 직계 황족을 요녕 지역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결국 책임지고 그 일을 맡아 한 곳은 병부였다.

오랑캐와의 전쟁에는 책임을 지지 않더라도, 상서령이 꺼낸 제안인 황족 파견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황족 중에서도 황제의 직손들이다.

무슨 짐승 잡듯이 밧줄에 묶어서 강제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고 상냥하게 부탁한다고 해서 황족들이 들어줄 턱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지 모르겠소. 의논한 건 육부의 재상님들인데, 왜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요? 이럴 거면 재상님들이 직접 황족 분들께 아뢸 일이지, 왜 깜냥도 안 되는 우릴 시키느냔 말이오.”

“쉿! 그러다 누가 듣겠소!”

“아니, 말하라고 뚫려 있는 게 사람 입인데 뭐가 두렵단 말이오! 황족들 중에 어느 누가 요녕으로 덥석 가주겠소! 생각 좀 해보쇼. 총독과 도지휘사가 모두 여진족의 손에 죽었는데, 다음 차례가 될지도 모르는 자리에 태평스레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느냔 말이오!”

병부의 관리 중에서도 병부시랑(兵部侍郎) 광시정은 가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의 모습에 다른 관리들은 언젠가 터질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모든 황족들이 제안을 거절했다.

복왕 주상순을 비롯해 계왕(桂王) 주상영과 모든 황자(皇子)들은 물론, 황태자 주상락의 아들인 황손 주유교까지도 거부했다. 이제는 더 이상 부탁할 곳도 없어졌다.

“이제 그만 포기합시다. 솔직히 말해서 죽을 게 뻔한 자리에 누가 자처해서 가주겠소? 그냥 우리들이 조정에 사직서를 냅시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내 한소리 좀 해야겠소!”

“그럽시다. 솔직히 녹봉도 받을 만큼 받았고, 낙향해서 사람답게 살 정도로 재산도 모아놨습니다.”

“에잉, 부인한테 뜯길 일만 남았군. 어렵게 관직에 올랐는데 하루아침에 백수가 돼서 집에 돌아가면 뭐라 말해야 할지…….”

병부의 관료들은 모두 동림당(東林黨) 출신이었다.

서로 같은 동문에, 같은 서원을 다닌 선후배 사이였다.

정계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당파로는 동림서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비싼 학비를 내고 서원에 들어갔고, 과거시험을 어렵사리 통과한 끝에 비로소 병부의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사직서를 낼 일만 남겨두고 있었다.

물론 작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황족과 육부 재상들의 사이에 끼어서 얻어터질 바에야 시원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이로웠다. 하지만…….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집안 재산 다 털어서 학비를 대주셨는데.’

‘부인한테 맞아죽겠구나. 외가 재산까지 써서 서원에 들어갔다고.’

시원스레 사직하자고는 말했지만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어간 조정인데 사직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병부의 관리들은 아직 젊은 축에 속했다. 늙어죽을 때까지 관직에 머무르겠노라 다짐을 했건만, 궁궐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신왕 전하께서 섬서성에서 대승을 거두시고 돌아오시고 계신답니다!”

촉새 같은 입을 가진 궁녀가 드넓은 대궐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어딜 가건 마당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자금성은 매우 넓은 규모를 자랑했지만,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어느 곳보다도 빨랐다.

궁녀를 시작으로 내관과 무관들까지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고, 심지어 황족들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던 병부 관리들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신왕 전하라 하시면…….”

“황태자 전하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내가 왜 신왕 전하를 까먹고 있었지?”

황태자 주상락은 총 일곱 명의 아들들을 보았다.

하지만 황자들 중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살아남은 황자라고는 주유교와 주유검이 전부였는데, 주유교에게 거절당한 병부의 관리들로서는 주유검이 바로 마지막 희망이었다.

관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결의에 찬 모습까지 보였다.

“신왕 전하까지 거절하시면… 더 이상 부탁할 황족 분이 안 계시오.”

“모 아니면 도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사직서를 낼 거, 조금 과감하게 가야하지 않겠소?”

“섬서성에서 승전을 거두셨으니 사기충천하실 터. 지금의 기회를 노려 상주해야 하오.”

병부의 관리들은 쪼르르 병아리처럼 달려 나갔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서 신왕 주유검에게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마침 주유검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자금성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덕분에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성문으로 들어온 주유검을 만날 수 있었다.

“신왕 전하, 승전을 감축 드리옵니다.”

“감축 드리옵나이다.”

관리들의 축하에 주유검은 말에서 내렸다.

말에 오른 상태에서 대화를 나눠도 예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주유검은 구태여 말에서 내려와 관리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겸손함을 보였다.

그 모습에 관리들은 깊은 감사를 느꼈다.

“헌데 병부의 관리들이 어쩐 일이신가?”

주유검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관리들은 아무도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관복을 입었기에 신분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육부 중에서도 병부에 소속된 관리라는 것은 알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주유검은 그들이 병부의 관리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숭정제가 병부시랑 광시정을 보고는 곧바로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병부시랑 광시정은 훗날 육부를 관장하는 재상으로까지 출세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숭정제를 괴롭히는 잔소리꾼이자, 주로 내정에서 활약하는 명재상 역할을 맡았다.

물론 지금은 병부상서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관리들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광시정이 동문들을 대신해 스스로 앞에 나섰다.

“신왕 전하께 간곡한 부탁이 있어, 육부를 대표하여 저희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육부에서 나를 직접?”

“예, 전하.”

곧바로 광시정은 설명을 시작했다.

요녕 지역을 맡기 위한 직계황족이 필요하다.

여진족의 발호로 국경이 흔들리고 민심이 크게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명나라 황실의 오랜 관습에 따라 우수한 황족을 내려 보내어 그를 감독케 하고자 한다.

“다른 황족 분들은?”

“모,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사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나라가 북쪽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데 황족씩이나 되시는 분들이 모두 거절했다라.”

주유검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입가를 가리고는 혼잣말을 여러 번이고 중얼거렸다.

관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혼잣말을 이어 나가는 주유검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를 보고 ‘저게 새롭게 나온 신종 거절법인가.’라며 중얼거리는 관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크흠,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심사숙고해봤자 좋은 결정이 날 것 같지도 않으니, 날을 잡아서 다시 오는 게 어떻겠는가.”

주유검은 공손한 어조로 관리들을 돌려보냈다.

거절의 뜻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협력하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신왕 주유검의 밀고 당기는 듯한 반응에 병부의 관리들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괜한 고집을 부려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명을 받잡겠습니다.”

광시정은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다른 관리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예를 다하며 물러났다.



“돌아버리겠네. 나더러 인간이 가축보다도 더 많이 죽어나가는 곳에 가라고? 아예 두 눈을 가리고 도축장으로 보내시지!”

주유검은 혀를 내두르며 뒷머리를 긁었다.

매번 난관들이 겹치고 또 겹치고 있었다.

시대가 난세라서 그런 걸까? 명말청초의 시대라서 그런지 격동기가 따로 없었다.

[정식으로 군대를 거느리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인재를 영입하기에 더욱 유리해지지 않겠느냐. 설마 이런 기회가 저절로 굴러 떨어질 줄이야. 과연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듯하구나.]

허공에 존재하는 잡귀가 속삭였다.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성격인지, 아니면 위기를 즐기는 다분히 변태적인 성격인지는 몰라도, 그는 계속해서 육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홍승주가 다가와 물었다.

그에 주유검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요서로 부임한다면 따르겠는가.”

“신왕 전하를 따르는 일이온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떤 위험이 닥친다 하더라도 소신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홍승주는 강한 어조로 답했다.

그는 은혜를 무겁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섬서성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반란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중, 조정에서 파견된 신왕 주유검의 도움으로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였기에 그는 주유검을 은인으로 여겼다.

또한 이미 주유검을 주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홍승주는 젊은 나이부터 뛰어난 군략을 보인 주유검을 크게 존경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의 모든 미래를 걸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건데요?’

[홍승주는 향시에 합격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인물이다. 악착스러운 성격에 포기라는 걸 모르지. 인의(仁義)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이기도 하니, 은혜를 많이 베풀어두면 곱절이 넘는 충성을 보여줄 게다. 홍승주는 쓸 만한 패다.]

‘황실의 이름을 대면서 인재들을 모아야겠군요.’

[우리가 가진 황손(皇孫)이란 혈통과 신분이야말로 가장 큰 무기다. 그 무기를 최대한 잘 다뤄야 한다.]

무리한 선택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잠시간의 투덕거림이 벌어졌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당장에 결정해야 되는 사안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