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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1장 신왕 주유검(2)



요동(遼東)은 한족 왕조인 대명(大明)이 원(元)을 몰아내면서부터 차지하게 된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은 여진족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쥐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요동은 수많은 세력들이 난무하는 싸움터가 되어 있었다.

“쉬지 말고 달려라! 놈들을 모조리 주살해야 한다!”

용골대(잉굴다이)는 세차게 박차를 가하며 속도를 높였다.

수십 기의 기병대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팔기군(八旗軍) 소속의 그들은 요동 벌판을 누비면서 명나라 병사들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더 이상 명나라는 무섭지 않았다.

평화에 젖은 초식동물 따위에게 겁먹을 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명나라를 상대로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장군, 이대로는 심양(瀋陽)에 닿게 됩니다! 이만 물러나시지요!”

저돌적인 그의 행동이 우려스러웠는지 부하는 크게 경계했다.

그 말을 옳다고 여긴 걸까.

누르하치 휘하의 참장(參將) 용골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투르카, 네 말이 맞다. 아무래도 머리로 피가 쏠렸던 것 같구나.”

용골대는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장수였다.

그는 팔기군 중에서도 뛰어난 정예가 많은 정백기(正白旗) 출신이었다.

누르하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음은 물론, 수천 기에 달하는 기병대를 지휘할 정도로 지위가 높았다.

“저 멀리 만리장성이 있단 말이지……. 언젠가는 장성을 넘어 천하를 도모해보고 싶구나. 우리를 괄시한 한족 놈들에게 기필코 복수할 날이 오겠지.”

“명나라 놈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쁘고, 황제 놈은 수십 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다 합니다. 저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으니,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리 되어야지.”

여진족 장수들은 강한 확신에 차있었다.

초원의 부족들은 여러 번이나 중원을 장악해왔다.

선조인 금나라는 물론, 몽골족들도 중원 점령에 성공했다. 북방 민족들이 연이어 중원 정복에 성공할 때마다, 자신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조선(朝鮮)도, 대명도, 모두 우리들의 발아래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용골대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진은 천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늑대가 되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조선과 대명으로부터 오랑캐라 여겨지며 괄시를 당해오지 않았는가.

그들이 업신여긴 오랑캐가 사실은 사나운 늑대였음을 보여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돌아가자!”

“예!”

용골대의 명령에 기병대들은 말머리를 꺾으며 부족으로 귀환했다.



* * *



여진이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동을 향해 점점 영향력을 뻗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조선에게 여진 놈들을 치라고 명령합시다!”

“하지만 조선은 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소?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던데. 그런 조선에게 여진을 칠 여력이나 있을지…….”

“우리가 왜란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까. 조선이 아국의 은혜를 안다면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각오로라도 여진과 싸워야지요!”

여진족의 성장.

그리고 대명의 몰락.

조정대신들은 차마 입에 담진 않았지만, 언젠가 비천한 여진 놈들에게 천하를 빼앗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명은 그들을 무식한 오랑캐라며 매번 괄시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이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을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저들이 서로 힘을 합치고 한 세력으로 규합되면 얼마나 무서운 적이 되는지.

그동안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여러 번이나 겪었다.

“이제는 심양까지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부상서(吏部尚書) 조환이 강력하게 말했다.

적에게 요동을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 어떤 대책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조정대신들의 우유부단함을 그는 크게 비난했다.

지금은 국경의 군대만을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요동의 많은 장수들이 누르하치에게 패전했고, 심지어 백성들까지도 모두 유린당했다. 여진족은 명나라의 지방관과 호족들까지도 살해하였으므로, 그 잔인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국법에 이르면, 본디 황족을 보내어 군대를 정비하게 하였사온데…….”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역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린 말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귀에 들어간 게 문제였다. 병부시랑의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국경의 부대들을 위무하기 위해서라도 황족을 보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오. 영락제(永樂帝)께서도 그리하셨고, 선덕제(宣德帝) 폐하와 융경제(隆慶帝) 폐하께서도 그리하셨소!”

상서령 금서안이 대신들을 좌우로 훑으며 말했다.

명나라는 항상 북방을 경계하기 위해 직계황족을 뽑아 국경의 민심을 수습해 왔다.

사태가 매우 긴급하고 사안이 중대하니, 뛰어난 명군들의 치적을 본받아 이를 실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육부의 대신들은 오랑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이를 막고는 싶었지만, 스스로 나설 만한 용기 역시 없었다.

‘여진족과 싸우라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지.’

‘황족을 보내야 해. 지금껏 황제가 사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응당 황족이 책임을 져야할 사안이고.’

조정신료들은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지금껏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병사를 이끌어야 할 병부까지도 서로 눈길을 피하며 나서길 기피했다.

그들은 상서령 금서안의 말을 핑계 삼아 황족에게 책임을 돌리려 할 뿐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누굴 보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끼리 감히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황족들 중 군략에 능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황태자는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병석에 눕기 일쑤였고, 다른 형제들 역시 용병술에는 재능이 없었다. 단순히 국경의 병사들을 위무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과연 황족들 중에 선뜻 나서겠다고 하는 인물이 있을지가 의문인 상황이었다.

“폐하께 주청을 드려야 하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저희들을 만나주려 하시지를 않으니, 이를 어떻게 주청 드리고 윤허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육부의 재상들께서 재가를 내리셔야지요. 언제나 그리 해오지 않았는지요.”

황제는 30년 동안 국정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육부(六部)의 재상들이 항상 국정을 대리해왔다.

그렇기에 이번 일 역시 황제를 대신하여 재상들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에게 의논하지 않고 신하들끼리 결정을 내린다는 것.

이것은 명백히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이 반역을 30년 동안이나 저질러왔다.

황제가 일을 안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조정에 남겨진 신하들끼리라도 국정을 수행할 수밖에.

‘누군가가 대신해주겠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설마 오랑캐들이 장성을 넘어 중원까지 침략할까.’

그들은 오랑캐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북경까지는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무사안일주의에 입각한 우유부단함. 그게 바로 명나라를 병들게 만든 원흉 중 하나였다.



* * *



섬서성(陝西省) 지역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잦은 흉작과 재해로 민심이 크게 사나워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복왕(福王) 주상순이 무겁게 세금을 거두고 빈번하게 노역을 징발하면서 민심이 폭발하는 기폭제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은 이미 섬서성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나의 민란을 진압하면 다른 곳에서 또다시 민란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했기에 완전히 뿌리 뽑을 방법은 없었다.

[어유, 갑옷 입은 모습 좀 보게!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숭정제는 주유검의 주변을 돌며 알랑방귀를 끼기에 바빴다.

근엄하던 얼굴은 마치 푼수처럼 변한 상태였다.

주유검이 당장에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이 양반아,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냐고! 영감님하고 나하고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생각해서 움직여줬더니…….’

주유검의 주장은 매우 정당했다.



조정군을 지휘하여 봉기를 일으킨 반란군을 토벌한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백성들이 안타깝다고는 하나, 조정으로서는 반역행위를 용서할 수가 없었기에 봉기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반란진압을 수행하는 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숭정제의 반강제적인 제안으로 반란군 토벌에까지 휘말리게 된 것인데, 덕분에 주유검은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들을 겪어야만 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나라는 안팎으로 곪아가고 있는데, 이를 조기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뿐이니. 너에겐 참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살았던 시대는 전쟁이 없었다면서?]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군대를 지휘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예상 못했죠. 육군병장이 대체 얼마나 출세한 거야? 병력규모로 따지면 사단장 급이네.’

황제의 손자이자, 황태자의 아들.

신왕(信王) 주유검은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섬서성의 민란을 진압했다.

이는 다른 황족들이 모두 나서길 주저했던 탓이었다.

명나라의 직계 황족들은 모두 전쟁에 나서길 꺼려했다.

명나라의 국운은 무너졌고, 몽골족으로부터 중원을 되찾았던 포부와 담대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주유검으로서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그는 점차 명나라 내부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명성은 곧 힘이다. 지금은 미약할지라도… 언젠가는 너의 이름이 천하를 울리게 될 것이다.]

숭정제는 주유검에게 민란 토벌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전쟁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악귀나찰 같은 여진족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숭정제는 천하에 명성을 쌓게 될 주유검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어엿한 군주가 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신왕 전하, 위남(渭南)과 동천(铜川)의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섬서도독(陝西都督) 홍승주가 말을 몰면서 주유검에게 다가왔다.

반란군을 크게 격퇴한 것이 기뻤는지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섬서성에서 끈질기게 저항하던 반란군 세력을 뿌리 뽑으면서 오랫동안 위협받아온 장안성(長安城)의 사수에 성공했다.

이는 커다란 전과였다.

황태자의 다섯 번째 아들인 신왕이 참전하면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는 또한 길조(吉兆)와도 같았다.

“도독, 수고 많았다. 서둘러 조정에 승전보를 알리고 주변 관아에도 소식을 보내라.”

“예!”

주유검이 위엄 있는 어조로 말하자, 홍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멀어져가는 홍승주의 뒷모습을 보며 주유검이 숭정제에게 물었다.

‘일단 영감님이 휘하 장수로 뽑으라고 해서 두기는 했는데…….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에요? 홍승주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데.’

[지금의 홍승주는 섬서의 도독에 불과하나, 훗날 반란군 토벌군의 사령관이자, 대청(對靑) 전쟁에서도 사령관을 지내는 인물이다. 저 정도의 명장은 손에 꼽을 정도겠지. 가히 그 군략은 팽월과 곽거병에 이를 거라고 본다. 그런 걸출한 인물을 모르다니, 너희 후대 사람들은 역사 공부도 하지 않는 것이냐?]

‘난 조선 사람인데 중원사를 어떻게 빠삭하게 알아요?’

팽월과 곽거병은 명장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팽월은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항우를 괴롭힌 유격전의 명수였다.

또한 곽거병은 한무제를 따라 흉노를 토벌하며 초원지대를 평정했다.

숭정제는 칭찬에 매우 인색한 성격이었다.

그런 숭정제가 입이 닳도록 홍승주라는 인물을 칭찬할 정도라면 분명 걸출한 명장임은 분명했다.

‘일단 영감님 말대로 하긴 하겠는데……. 당장은 이자성을 죽이는 게 급선무지 않아요? 나중에 반란으로 지독하게 괴롭힐 텐데.’

이자성은 훗날 반란군의 수괴가 되는 인물이었다.

명나라의 멸망은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에 주력군을 주둔시킨 명나라 조정은 이자성의 난에 전력으로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명나라 왕조는 이자성에게 멸망했다.

이자성을 먼저 제거하자.

하지만 그 의견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섬서성에서 이자성을 어떻게 찾을 테냐? 이자성이 섬서성 출신이라는 것은 짐도 알고 있다만… 이자성이란 이름을 가진 농민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게다. 무엇보다 각 군현마다 호적관리도 엉망이라 누가 누군지도 분간하기 어렵겠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일 것이다.]

홍승주는 군적(軍籍)에 기록된 인물이기에 찾기가 쉬웠다.

하지만 이자성은 다르다. 시골의 필부에 불과한 남성을 찾기란 가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일단은 인재들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거군요. 홍승주를 찾아내 중용한 것처럼요.’

[그렇지. 넌 역시 이해력이 빨라서 좋다.]

‘좋긴 개뿔. 언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주유검은 툴툴거리면서 숭정제의 말에 토를 달았다.

하지만 그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숭정제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