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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하지만, 저는 걱정이어요.”
오필리아는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자신은 열한 살이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렁그렁 이는 눈동자로, 부왕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공주라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아무도 왕국을 지켜 주지 못하면 어떡해요.”
“오필리아, 본래 달은 차고 기우는 법이야.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다 지나갈 거야.”
갈라테아가 왜 초를 치는지 모르겠다. 이쪽 어머니가 너무 선량한 것도 문제가 되려나.
“하지만 별님이 이번 보름달은 엄청, 엄청나게 밝다고 한걸요. 그래서 오필리아는…….”
에라 모르겠다.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기 시전! 현실이었다면 도저히 낯뜨거워서 못 할 짓이다. 사실 진짜 열한 살 때도 이런 말투는 쓰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해 본 적 없을 국왕이 뭘 알까 싶었다.
“별님이 아바마마를 지켜 주지 못할까 봐 너무 걱정돼요.”
마지막 필살기로 반짝반짝 눈동자 어택을 하고 턴을 마친다. 제발, 낚여라.
“허허, 그런 말을 듣고도 모른 체할 수는 없지.”
징조가 좋았다. 아름다운 딸, 그것도 신의 아이로 선택된 아이가 자신을 저리 바라보는 건 누구라도 기분이 좋은 일이다.
이대로 왕이 낚이기만 한다면, 초장부터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아무리 국왕이 신탁을 믿어 봐야 죽으면 끝이다. 친정의 기세를 등에 업은 왕비는 띨띨한 왕자를 후계자로 앉힐 것이고 그러면 오필리아의 팔자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찌하면 안심이 되겠느냐.”
“전하, 너무 어리광을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아, 진짜. 이 엄마 착해도 너무 착하잖아. 그러니 당하고만 살았지.
“그치만…….”
“봐라, 아이가 불안해하는데! 게다가 로잔틴의 신녀 아니냐. 한낱 어리광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게야.”
갈라테아 역시 신녀이지만 국왕은 이미 오필리아의 말에 홀린 뒤였다. 본인이 뭐라고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듯한 왕을 보며 오필리아는 샐쭉 웃었다.
보름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로잔틴에선 보름이면 국왕과 왕비가 반드시 한 처소에서 머문다. 달리 해석하면 보름에 국왕과 한 처소에 있는 사람이 왕비라는 뜻도 된다.
즉, 이미 오늘 일로 열받았을 왕비에 대한 도전장을 먼저 내서 선수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한다. 왕비 쪽이 본처임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애초에 원작에서 왕비는 악의 축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악녀였다. 이 소설이 막장인 걸 어떡해.
“이번 보름은 신궁에 와서 마음을 정결히 하는 의식에 참여할 것이다.”
“전하! 왕궁의 법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법도보다 신의 뜻이 먼저인 것은 지당한 것, 왕비도 이해할 것이다.”
됐다. 오필리아는 속으로만 퍽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히스테릭하고 제 아들만큼이나 멍청하다고 서술되었던 왕비라면 분명히 이 도발에 넘어올 것이다. 게다가 오필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적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해 볼 만한 게임 아닌가.
“자, 이제 안심이 되느냐.”
아직은 국왕의 저 관대한 표정이 어색하다.
“네, 무척 안심됩니다. ……아바마마.”
천진난만한 오필리아의 미소를 보며, 국왕은 퍽 너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순수한 눈동자 뒤에 숨겨진 속내는 전혀 모른 채로.
* * *
“오필리아, 이리 앉아 보렴.”
뜨끔,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대사다. 어머니가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부르기만 해도 뭔가 잘못한 느낌.
“요즘 네가 이상한 것 같아 걱정되는구나.”
어머니의 감이라는 건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게다가 상대도 신녀다.
“신탁은 그리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별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그것은 신력이 있는 우리 일족의 의무이기도 하단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더더욱 그 상대가 국왕이라면 우리의 의무와 본분에 어긋나는 거야. 그게 설령 너의 아버지라고 해도 말이다.”
갈라테아는 지금 오필리아의 작은 탈선을 그저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던 소녀의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다.
“그리고 그 멸망이라는 이야기도……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구나. 그런 말을 섣불리 입에 담아서는 안 돼. 우리는 로잔틴 왕가를 수호하는 일족이니 더욱 신중해야 한단다.”
남의 집안을 수호하다가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 알아도 갈라테아는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아이를 가지고 나면 신력이 떨어진다는 설정이 맞나 보다.
“네, 어머니.”
이럴 땐 풀이 죽은 아이의 표정을 짓는 게 좋겠지.
“그보다, 지금 졸려요…… 이제 자도 될까요?”
갈라테아는 천천히 오필리아의 얼굴을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줄 테니 안심하렴.”
그렇게, 서서히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세계의 신이 오필리아의 편이라면, 보름을 기점으로 운명은 반드시 바뀐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보름이 왔다.
오필리아는 아침부터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다고는 하나, 이미 자신이 개입한 이상 스토리는 달라질 것이다. 국왕의 태도가 바뀐 것이 그 증거였다.
“사고를 쳐 줘야 하는데.”
의미심장한 독백은, 시녀들에 둘러싸여 거품 목욕을 당하는 와중이라 귀여운 악동의 재간으로 포장된다. 의외로 어린아이란 참 편리하단 말이지.
“실례합니다만, 왕비전에서 방금 시종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시녀 하나가 들어오며 한 말에 모두 사색이 되었다.
“오필리아 님을 모셔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올 게 왔군. 생각보다 입질이 빠른걸.
“어쩌죠? 갈라테아 님은 지금 기도 중이신데.”
“오필리아 님만 모셔 오라는 분부입니다.”
“그래도 갈라테아 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다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하긴, 모르면 바보겠지.
“괜찮아.”
오필리아는 거품을 걷어 내며 일어섰다. 어린아이다운 몸에 버거워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굽이치고 있었다.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그럼, 전에 입으셨던 드레스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냐, 그냥 평소처럼…… 신궁에서 입던 대로 해 줘.”
베스트는 이대로 아침 드라마의 못된 계모를 연출하는 것이다. 당하는 쪽이 소박하고 가련할수록 효과가 좋겠지. 이미 애와 어른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왕비는 졌다.
오필리아는 흔쾌히 왕비가 보낸 시종을 따라나섰다. 운명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걸림돌이 바로 왕비였다. 기억에 따르면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포르테 공국 출신이었는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외국인이니 좀 달라 보이려나?
“오필리아 님을 모셔 왔습니다.”
커다란 문에는 온갖 화려한 부조가 장식돼 있었다. 본 것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기다란 회랑 너머로 들어오라는 시종의 말이 들렸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향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 향이 왕비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어쩐지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놈의 막장 클리셰.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냉담한 목소리였다. 여러 개의 층계 위에 자리한 왕비의 의자는 왕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다만 화려함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으로 촌스러운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오. 필. 리. 아.”
스타카토로 끊어서 발음하는 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연출이었다. 오필리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왕비를 봤다. 흠, 미인이긴 한데 표독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과연, 나라에서 손 꼽히는 악녀인가. 웹소설이었으면 벌써 독자들이 우수수 하차 선언을 했을 거다.
“왕비님께 문안을 여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눈치껏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차렸다. 왕비는 그런 오필리아를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평안? 하, 그래…… 물어 주니 고맙구나. 안 그래도 내 먼저 말하고 싶었거든.”
왕비가 일어서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아주 발칙한 계집이 있어 내 최근 심기가 아주 불편하지 뭐니.”
물론 그건 저겠죠, 랄라.
“어차피 신궁에 처박혀 살 팔자라 전하의 등쌀에 공주라 인정은 해 줬다만, 그 은혜를 네가 잊은 것 같아서 말이다.”
상대도 돌려 말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순진무구한 눈빛은 참 쓸모가 많다. 이 경우엔 왕비의 분노를 자극할 것이다. 암, 나라도 열 받을걸.
“네까짓 게 정말 공주라도 된다고 생각했느냐? 전하께 아양을 부리면 정말 공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안 될 건 뭐가 있겠어요. 한 번 사는 인생, 베팅해서 안 되면 마는 거지.
“소녀는…….”
왕비는 이제 거의 오필리아의 코앞까지 왔다. 그리고 기다란 손톱으로 오필리아의 턱 끝을 들더니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막상 당하니, 이거 참 불쾌하다.
“로잔틴의 신녀라는 게, 알고 보니 창녀나 다름없음을 내 미처 몰랐던 게 실수였어.”
그건 갈라테아를 말하는 것이다. 뭐, 왕비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해는 한다. 머리로는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미세하게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갈라테아는 그저 오필리아의 엄마일 뿐인데, 자신의 진짜 핏줄도 아닌데, 자신에겐 가족 따윈 처음부터 없어서 이제 와 필요도 없는데.
“신을 모신다는 계집이 몸을 그리 놀린다면, 짐승과 다를 게 뭔지.”
오필리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도발하러 온 것이지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된다. 하지만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 참을 수 없이 일렁거렸다.
갈라테아. 자애로운 목소리로 무릎을 내어 주던, 자장가를 불러 주고 애정을 담아서 눈동자에 담아 주었던 유일한…… 자신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어머니.
그녀는 결코 저런 뻔한 등장인물이 짐승이라 말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너같이 요사스러운 것을 낳았겠지?”
왕비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짐승이 요물을 낳았으니 잘했다고 해야 하는가?”
머리가 멍했다. 다만, 그 말은 분명히 가슴에 박혔다. 순간 이성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눈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왕비는 본능적으로 오필리아의 턱에서 손을 뗐다.
“어딘가 모자라신 왕자님을 낳으신 왕비님이라면 잘 아시겠지요.”
이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그리고 경멸의 눈빛.
“이 비천한 것이, 감히!”
찰싹, 마찰음과 동시에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오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뻔한 내용, 뻔한 행동, 전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본 일이다. 어떻게 될지 알고 뱉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애 뺨을 때려?
“저는 법적으로 왕비님의 소생인데, 허면 저를 소생으로 두신 왕비님도 비천하십니까.”
왕비 역시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작 열한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말로 자신을 능멸하다니.
“그렇다면 소녀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신궁의 갈라테아 신녀님은 그리 자애로우신데, 제가 왕비님의 비천한 소생이라 배운 점이 없어 요사스러우니까요.”
이때, 오필리아는 분명히 냉소를 지었다. 왕비는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하지만, 저는 걱정이어요.”
오필리아는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자신은 열한 살이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렁그렁 이는 눈동자로, 부왕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공주라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아무도 왕국을 지켜 주지 못하면 어떡해요.”
“오필리아, 본래 달은 차고 기우는 법이야.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다 지나갈 거야.”
갈라테아가 왜 초를 치는지 모르겠다. 이쪽 어머니가 너무 선량한 것도 문제가 되려나.
“하지만 별님이 이번 보름달은 엄청, 엄청나게 밝다고 한걸요. 그래서 오필리아는…….”
에라 모르겠다.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기 시전! 현실이었다면 도저히 낯뜨거워서 못 할 짓이다. 사실 진짜 열한 살 때도 이런 말투는 쓰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해 본 적 없을 국왕이 뭘 알까 싶었다.
“별님이 아바마마를 지켜 주지 못할까 봐 너무 걱정돼요.”
마지막 필살기로 반짝반짝 눈동자 어택을 하고 턴을 마친다. 제발, 낚여라.
“허허, 그런 말을 듣고도 모른 체할 수는 없지.”
징조가 좋았다. 아름다운 딸, 그것도 신의 아이로 선택된 아이가 자신을 저리 바라보는 건 누구라도 기분이 좋은 일이다.
이대로 왕이 낚이기만 한다면, 초장부터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아무리 국왕이 신탁을 믿어 봐야 죽으면 끝이다. 친정의 기세를 등에 업은 왕비는 띨띨한 왕자를 후계자로 앉힐 것이고 그러면 오필리아의 팔자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찌하면 안심이 되겠느냐.”
“전하, 너무 어리광을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아, 진짜. 이 엄마 착해도 너무 착하잖아. 그러니 당하고만 살았지.
“그치만…….”
“봐라, 아이가 불안해하는데! 게다가 로잔틴의 신녀 아니냐. 한낱 어리광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게야.”
갈라테아 역시 신녀이지만 국왕은 이미 오필리아의 말에 홀린 뒤였다. 본인이 뭐라고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듯한 왕을 보며 오필리아는 샐쭉 웃었다.
보름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로잔틴에선 보름이면 국왕과 왕비가 반드시 한 처소에서 머문다. 달리 해석하면 보름에 국왕과 한 처소에 있는 사람이 왕비라는 뜻도 된다.
즉, 이미 오늘 일로 열받았을 왕비에 대한 도전장을 먼저 내서 선수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한다. 왕비 쪽이 본처임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애초에 원작에서 왕비는 악의 축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악녀였다. 이 소설이 막장인 걸 어떡해.
“이번 보름은 신궁에 와서 마음을 정결히 하는 의식에 참여할 것이다.”
“전하! 왕궁의 법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법도보다 신의 뜻이 먼저인 것은 지당한 것, 왕비도 이해할 것이다.”
됐다. 오필리아는 속으로만 퍽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히스테릭하고 제 아들만큼이나 멍청하다고 서술되었던 왕비라면 분명히 이 도발에 넘어올 것이다. 게다가 오필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적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해 볼 만한 게임 아닌가.
“자, 이제 안심이 되느냐.”
아직은 국왕의 저 관대한 표정이 어색하다.
“네, 무척 안심됩니다. ……아바마마.”
천진난만한 오필리아의 미소를 보며, 국왕은 퍽 너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순수한 눈동자 뒤에 숨겨진 속내는 전혀 모른 채로.
* * *
“오필리아, 이리 앉아 보렴.”
뜨끔,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대사다. 어머니가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부르기만 해도 뭔가 잘못한 느낌.
“요즘 네가 이상한 것 같아 걱정되는구나.”
어머니의 감이라는 건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게다가 상대도 신녀다.
“신탁은 그리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별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그것은 신력이 있는 우리 일족의 의무이기도 하단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더더욱 그 상대가 국왕이라면 우리의 의무와 본분에 어긋나는 거야. 그게 설령 너의 아버지라고 해도 말이다.”
갈라테아는 지금 오필리아의 작은 탈선을 그저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던 소녀의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다.
“그리고 그 멸망이라는 이야기도……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구나. 그런 말을 섣불리 입에 담아서는 안 돼. 우리는 로잔틴 왕가를 수호하는 일족이니 더욱 신중해야 한단다.”
남의 집안을 수호하다가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 알아도 갈라테아는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아이를 가지고 나면 신력이 떨어진다는 설정이 맞나 보다.
“네, 어머니.”
이럴 땐 풀이 죽은 아이의 표정을 짓는 게 좋겠지.
“그보다, 지금 졸려요…… 이제 자도 될까요?”
갈라테아는 천천히 오필리아의 얼굴을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줄 테니 안심하렴.”
그렇게, 서서히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세계의 신이 오필리아의 편이라면, 보름을 기점으로 운명은 반드시 바뀐다.
* * *
드디어 기다리던 보름이 왔다.
오필리아는 아침부터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다고는 하나, 이미 자신이 개입한 이상 스토리는 달라질 것이다. 국왕의 태도가 바뀐 것이 그 증거였다.
“사고를 쳐 줘야 하는데.”
의미심장한 독백은, 시녀들에 둘러싸여 거품 목욕을 당하는 와중이라 귀여운 악동의 재간으로 포장된다. 의외로 어린아이란 참 편리하단 말이지.
“실례합니다만, 왕비전에서 방금 시종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시녀 하나가 들어오며 한 말에 모두 사색이 되었다.
“오필리아 님을 모셔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올 게 왔군. 생각보다 입질이 빠른걸.
“어쩌죠? 갈라테아 님은 지금 기도 중이신데.”
“오필리아 님만 모셔 오라는 분부입니다.”
“그래도 갈라테아 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다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하긴, 모르면 바보겠지.
“괜찮아.”
오필리아는 거품을 걷어 내며 일어섰다. 어린아이다운 몸에 버거워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굽이치고 있었다.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그럼, 전에 입으셨던 드레스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냐, 그냥 평소처럼…… 신궁에서 입던 대로 해 줘.”
베스트는 이대로 아침 드라마의 못된 계모를 연출하는 것이다. 당하는 쪽이 소박하고 가련할수록 효과가 좋겠지. 이미 애와 어른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왕비는 졌다.
오필리아는 흔쾌히 왕비가 보낸 시종을 따라나섰다. 운명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걸림돌이 바로 왕비였다. 기억에 따르면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포르테 공국 출신이었는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외국인이니 좀 달라 보이려나?
“오필리아 님을 모셔 왔습니다.”
커다란 문에는 온갖 화려한 부조가 장식돼 있었다. 본 것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기다란 회랑 너머로 들어오라는 시종의 말이 들렸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향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 향이 왕비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어쩐지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놈의 막장 클리셰.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냉담한 목소리였다. 여러 개의 층계 위에 자리한 왕비의 의자는 왕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다만 화려함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으로 촌스러운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오. 필. 리. 아.”
스타카토로 끊어서 발음하는 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연출이었다. 오필리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왕비를 봤다. 흠, 미인이긴 한데 표독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과연, 나라에서 손 꼽히는 악녀인가. 웹소설이었으면 벌써 독자들이 우수수 하차 선언을 했을 거다.
“왕비님께 문안을 여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눈치껏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차렸다. 왕비는 그런 오필리아를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평안? 하, 그래…… 물어 주니 고맙구나. 안 그래도 내 먼저 말하고 싶었거든.”
왕비가 일어서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아주 발칙한 계집이 있어 내 최근 심기가 아주 불편하지 뭐니.”
물론 그건 저겠죠, 랄라.
“어차피 신궁에 처박혀 살 팔자라 전하의 등쌀에 공주라 인정은 해 줬다만, 그 은혜를 네가 잊은 것 같아서 말이다.”
상대도 돌려 말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순진무구한 눈빛은 참 쓸모가 많다. 이 경우엔 왕비의 분노를 자극할 것이다. 암, 나라도 열 받을걸.
“네까짓 게 정말 공주라도 된다고 생각했느냐? 전하께 아양을 부리면 정말 공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안 될 건 뭐가 있겠어요. 한 번 사는 인생, 베팅해서 안 되면 마는 거지.
“소녀는…….”
왕비는 이제 거의 오필리아의 코앞까지 왔다. 그리고 기다란 손톱으로 오필리아의 턱 끝을 들더니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막상 당하니, 이거 참 불쾌하다.
“로잔틴의 신녀라는 게, 알고 보니 창녀나 다름없음을 내 미처 몰랐던 게 실수였어.”
그건 갈라테아를 말하는 것이다. 뭐, 왕비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해는 한다. 머리로는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미세하게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갈라테아는 그저 오필리아의 엄마일 뿐인데, 자신의 진짜 핏줄도 아닌데, 자신에겐 가족 따윈 처음부터 없어서 이제 와 필요도 없는데.
“신을 모신다는 계집이 몸을 그리 놀린다면, 짐승과 다를 게 뭔지.”
오필리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도발하러 온 것이지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된다. 하지만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 참을 수 없이 일렁거렸다.
갈라테아. 자애로운 목소리로 무릎을 내어 주던, 자장가를 불러 주고 애정을 담아서 눈동자에 담아 주었던 유일한…… 자신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어머니.
그녀는 결코 저런 뻔한 등장인물이 짐승이라 말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너같이 요사스러운 것을 낳았겠지?”
왕비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짐승이 요물을 낳았으니 잘했다고 해야 하는가?”
머리가 멍했다. 다만, 그 말은 분명히 가슴에 박혔다. 순간 이성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눈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왕비는 본능적으로 오필리아의 턱에서 손을 뗐다.
“어딘가 모자라신 왕자님을 낳으신 왕비님이라면 잘 아시겠지요.”
이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그리고 경멸의 눈빛.
“이 비천한 것이, 감히!”
찰싹, 마찰음과 동시에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오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뻔한 내용, 뻔한 행동, 전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본 일이다. 어떻게 될지 알고 뱉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애 뺨을 때려?
“저는 법적으로 왕비님의 소생인데, 허면 저를 소생으로 두신 왕비님도 비천하십니까.”
왕비 역시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작 열한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말로 자신을 능멸하다니.
“그렇다면 소녀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신궁의 갈라테아 신녀님은 그리 자애로우신데, 제가 왕비님의 비천한 소생이라 배운 점이 없어 요사스러우니까요.”
이때, 오필리아는 분명히 냉소를 지었다. 왕비는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