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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본능적인 거부감과 분노에 왕비는 오필리아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찼다.
“으……!”
고작 열한 살의 어린 몸은 대리석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러고도 왕비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머리채를 잡고서 따귀 두어 대를 더 내리친 후에 오필리아를 걷어찼다.
“으윽…….”
고통은 금세 작은 몸을 지배했다. 따귀를 맞아 시야가 어지러웠고, 입 안이 엉망으로 터졌으며, 배를 걷어차인 고통에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런 것까지는 오필리아의 예상에 없었다. 고상한 척 따귀를 치거나 매질을 하는 악녀는 봤어도, 폭력을 직접 휘두르는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선 짐승을 가르치는 데는 매가 제격이란 말이 있단다. 그래, 지금 너처럼 땅을 기는 짐승 말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기로 자존심으로 누르려 했지만, 이런 일을 처음 당해서 멘탈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얼얼한 뺨에 손을 대자, 가느다랗게 왕비의 손톱 자국이 만져졌다.
“다음은 산 짐승조차 되지 못할 것이야.”
오필리아는 이런 경멸 속에 살았던가. 글자 밖에 있던 현실이 드디어 와닿았다.
“요사스러운 계집이니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그래, 이 굴욕은 뼈에 새겼다. 막연히 운명을 바꾸기 위해 왕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깊은 증오다.
“시종장.”
“예, 왕비님.”
“당장 내 면전에서 저 비천한 것을 끌어내라.”
“예,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말 그대로 오필리아를 질질 끌어냈다. 문자 그대로 짐승 취급을 하겠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어린 몸엔 가혹한 체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오필리아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상을 모셔라.”
바로, 복수의 열쇠였다.
* * *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갈라테아의 간호로 조금 나아졌지만, 얼굴의 손톱 자국과 부은 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국왕한테는 잘만 써지던 신력도 어째서인지 나오지 않았다. 갈라테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속삭이곤 오필리아의 곁을 지켰다.
“오필리아, 오늘은 침소에만 있거라.”
갈라테아는 이 모습을 왕에게 보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착하디착한 여자, 풍파를 만들지 않고 그저 자신이 참으면 된다는 마음 여린 여자. 하지만 그것이 결국 딸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전하께는 네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씀드리마.”
이러면 곤란한데. 오필리아는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아니, 아니야. 그러고 보니, 아까 왕비전에서 들은 중요한 말이 있지 않은가.
‘재상을 모셔라.’
천천히 생각해 보자. 재상, 그래 로잔틴엔 재상이 있었다. 덜떨어진 오스카가 왕이 되고 재상이 실질적인 통치를 하느라 나라가 광속으로 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왕의 사후엔 재상이 왕비의 정부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게 되었다. 즉…… 그 정부 관계란 어쩌면 지금도 같지 않을까.
“네, 그럴게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오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갈라테아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륜은 존재했다. 게다가 재상은 분명 왕비의 정부, 그러나 왕이 살아 있는 한 밀회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 신궁에서 머물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날이라면…… 사랑과 전쟁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대찬스가 아닌가.
“좋았어.”
오필리아는 뺨의 손톱 자국을 매만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빚은 그대로 갚아 주지.”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첫 번째 정적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이상한 방식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그렇게 침소에 누운 지 얼마가 지났을까. 보름달이 마력이라도 품은 듯이 빛나는 창밖을 보는 사이 밤이 한창 무르익었다.
“어디 한번 베팅을 해 볼까.”
일단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까 왕비를 만났던 상황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아, 그래. 열이 받기 시작한다. 엄청난 몰입력이다!
“꺄악!”
발성이 부족했나. 큼큼, 다시 한번.
“꺄아아악!”
그 기세를 몰아 크게 비명을 질렀다. 문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오필리아 님, 괜찮으세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손을 바들바들 떠는 오필리아를 보고 시녀가 경악했다. 이건 딱히 연기하려고 한 건 아니다. 아까의 상황을 되살리니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했다.
“당장 아바마마를 만나야 해!”
시녀가 말릴 새도 없이 잠옷 차림의 오필리아가 복도로 탈출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왕이 있는 곳을 알기는 쉬웠다. 문 앞에 보란 듯이 호위병이 여럿 서 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호위병이라도 잠옷 바람의 어린아이, 그것도 학대에 가까운 체벌의 흔적이 역력한 왕의 딸을 막아서진 못했다. 당황한 호위병이 대신 노크를 해 주는 것을 무시하고 문을 밀었다.
“아바마마!”
오필리아를 돌아보는 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밤중의 소란에 짜증이 난 듯 찌푸려져 있던 눈이 크게 뜨였다.
“오필리아! 무슨 일이냐! 어쩌다 이런 꼴이!”
왜일까. 걱정에 가득 찬 그 눈동자를 보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자동으로 나왔다. 머리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얼마나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인지 알고 있었는데.
그사이 달려온 갈라테아가 오필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갈라테아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딸이 아픈 와중에 침실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하는지. 흐윽, 오필리아가 일부러 더 크게 우는 소리를 내자 국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그리 우는 것이냐, 대체 누가 널 이렇게 한 것이야! 갈라테아, 분명 오필리아는 감기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전하, 그것이…….”
“오필리아, 세상에. 감히 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단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왕은 짚이는 바를 떠올렸다. 바로 왕비의 그 기다란 손톱 말이다. 궁내에서 그런 손톱을 가진 자는 왕비뿐이었다.
“왕비가 널 핍박한 것이냐?”
“흑, 아바마마…흐윽. 소, 소녀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왕비라 하여도 어찌 공주를 멋대로 이리 체벌한단 말이야!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에요, 아바마마. 소녀가 아직, 흑. 예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서 소녀가 잘못했으니까, 그랬으니까 가르침을 주신 것일 거여요. 소녀가…소녀가 잘못했으니까, 흐윽, 부디 노하지 마셔요.”
이건 정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맞다.
“아니, 신탁의 아이를…… 어찌 감히 손을 대!”
왕이 몸소 무릎을 굽혀 오필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붉게 부은 상처와 터진 입술, 그 위로 흐르는 눈물 자국이 무심한 국왕에게도 효과가 있나 보다.
“그보다 아바마마, 한시가 급하여요.”
“왜 그러는 것이냐.”
“방금 소녀가 꿈을 꾸었는데…… 왕비전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요. 오늘은 별님이 약한 날이라…… 왕비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로잔틴의 큰 슬픔이잖아요. 그 꿈이 너무 무서워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도 왕비를 걱정하다니, 도대체 이 작은 아이의 어디에 이런 도량과 자애가 있단 말인가. 국왕은 크게 탄식하며 오필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왕비님께서 안전한지 살펴 주시어요! 부디…부디 무사하실 수 있도록 아바마마가 지켜 주세요!”
파란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끝없이 방울져 맺혔다. 괘씸한 왕비가 어찌 되든 오늘만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국왕으로서 신탁의 아이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로잔틴 국왕으로서의 서약에 어긋난다.
“그래, 왕비전이 무사한 것을 보면 다시 잠들 수 있겠느냐.”
“네. 지금은 너무 걱정되어서…….”
“그럼 같이 가 보자꾸나. 짐도 확인하고 싶구나.”
이건 국왕에게 있어서도 시험의 기회였다. 오필리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오필리아를 안아 올린 국왕이 호위병에게 눈짓했다. 왕비전으로 간다는 신호였다. 국왕의 목을 끌어안은 오필리아는 그 파란 눈동자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동안 갈라테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신궁에 남은 갈라테아를 뒤로하고, 오필리아는 왕의 품에 안긴 채 밖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왕비전의 문 앞에 섰다. 오필리아의 가슴이 기대로 두근두근 뛰었다. 국왕은 이조차 겁에 질린 것으로 오해하며 더욱더 분노에 불을 지폈다.
“왕비님.”
방문을 알리는 시종장은 어딘가 안색이 파리했다. 그 손이 덜덜 떨리는 것도 오필리아는 분명 보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저…… 왕비님께서는 지금 깊이 잠이 드신 것 같사옵니다만.”
“비켜라. 호위병, 문을 열어라. 왕비가 안전한지 봐야겠다!”
벌컥, 시종장이 말릴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아주 대단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국왕의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전하.”
두 잔의 와인, 왕비의 흐트러진 드레스는 가슴골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결정적으로 재상의 손이 그곳에 있었다. 왕비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 옥좌엔 재상이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에 올라앉아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왕비는 동공이 반쯤 풀린 채였다. 바닥에 벗겨진 페티코트가 뒹구는 건, 확인 사살과도 같았다.
“오, 오해입니다.”
술기운에 젖은 왕비의 말이 똑똑지 않게 들렸다. 상기된 뺨도 반나체의 재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전하! 전, 하…… 그러니까 이것은…….”
스륵, 오필리아는 왕의 품에서 내려와 곁에 섰다. 모두가 경악스러운 장면에 시선이 쏠려 있을 때, 오필리아는 왕비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
“모, 모든 것은 다 저 요물이 꾸민 짓입니다! 저년이, 저년이 저를 모함하려고! 저년은 신녀가 아니라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오늘만 해도 제게…….”
“그만.”
왕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어찌…… 어찌 한 나라의 왕비라는 자가 이다지도 경박한 짓을 할 수가 있는가.”
철컥, 왕의 손짓에 호위병이 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데려온 국왕이, 불륜 현장을 들킨 왕비를 나무라다니. 오필리아는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숨기느라 애써야 했다. 그 모습이 또 두려워 떠는 것으로 비친 모양이다.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정말 저 마녀가!”
“그 더러운 입 닥쳐라! 이 어린아이는 저를 매질한 것도 어미라고 안위를 걱정하며 울며 내게 왕비를 지켜 달라 했다. 어찌 이 아이의 발끝만도 못한 심성으로 국모를 자청하는가!”
“현혹당하시는 겁니다! 모두 저것이 꾸민…… 아니, 함정입니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아? 게다가 재상을 부른 건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 걸리지나 말든가. 이용하라고 알려 준 거 아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주 실성한 모양이구나.”
우습지만 좋은 전개다.
“호위병은 당장 재상을 감옥에 가둬라.”
“예!”
“또한, 왕비는 이 방에 유폐한다. 내 명이 있을 때까진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처분은 좀 아쉬운데,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나. 뭐, 죽일 듯이 노려보는 왕비의 시선을 즐기는 거로 아쉬움을 채워야겠다.
“전하! 저 아이는 분명 요사스러운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보세요 지금도!”
“이 아이의 도량에 비하면 그대야말로 마녀다. 끝까지 추악하구나.”
흐느끼는 왕비를 두고 쾅! 호위병에 의해 문이 닫혔다. 첫 번째 정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빚은 꼭 갚아 줘야지. 애써 때려 준 덕분에 더욱 극적인 연출을 하게 돼서 고마울 정도다.
“오필리아, 너는 정말…….”
봐, 이렇게. 오필리아는 얼굴을 숨기며 국왕에게 폭 안겼다. 정의를 실현한 양 무게를 잡으며 왕이 말했다.
“방금 본 것은 잊거라. 앞으로는 짐이 널 지켜 줄 것이다.”
이 세계로 온 후, 첫 번째 미션은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퍼펙트한 대성공이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분노에 왕비는 오필리아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찼다.
“으……!”
고작 열한 살의 어린 몸은 대리석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러고도 왕비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머리채를 잡고서 따귀 두어 대를 더 내리친 후에 오필리아를 걷어찼다.
“으윽…….”
고통은 금세 작은 몸을 지배했다. 따귀를 맞아 시야가 어지러웠고, 입 안이 엉망으로 터졌으며, 배를 걷어차인 고통에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런 것까지는 오필리아의 예상에 없었다. 고상한 척 따귀를 치거나 매질을 하는 악녀는 봤어도, 폭력을 직접 휘두르는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선 짐승을 가르치는 데는 매가 제격이란 말이 있단다. 그래, 지금 너처럼 땅을 기는 짐승 말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기로 자존심으로 누르려 했지만, 이런 일을 처음 당해서 멘탈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얼얼한 뺨에 손을 대자, 가느다랗게 왕비의 손톱 자국이 만져졌다.
“다음은 산 짐승조차 되지 못할 것이야.”
오필리아는 이런 경멸 속에 살았던가. 글자 밖에 있던 현실이 드디어 와닿았다.
“요사스러운 계집이니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그래, 이 굴욕은 뼈에 새겼다. 막연히 운명을 바꾸기 위해 왕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깊은 증오다.
“시종장.”
“예, 왕비님.”
“당장 내 면전에서 저 비천한 것을 끌어내라.”
“예,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말 그대로 오필리아를 질질 끌어냈다. 문자 그대로 짐승 취급을 하겠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어린 몸엔 가혹한 체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오필리아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상을 모셔라.”
바로, 복수의 열쇠였다.
* * *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갈라테아의 간호로 조금 나아졌지만, 얼굴의 손톱 자국과 부은 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국왕한테는 잘만 써지던 신력도 어째서인지 나오지 않았다. 갈라테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속삭이곤 오필리아의 곁을 지켰다.
“오필리아, 오늘은 침소에만 있거라.”
갈라테아는 이 모습을 왕에게 보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착하디착한 여자, 풍파를 만들지 않고 그저 자신이 참으면 된다는 마음 여린 여자. 하지만 그것이 결국 딸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전하께는 네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씀드리마.”
이러면 곤란한데. 오필리아는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아니, 아니야. 그러고 보니, 아까 왕비전에서 들은 중요한 말이 있지 않은가.
‘재상을 모셔라.’
천천히 생각해 보자. 재상, 그래 로잔틴엔 재상이 있었다. 덜떨어진 오스카가 왕이 되고 재상이 실질적인 통치를 하느라 나라가 광속으로 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왕의 사후엔 재상이 왕비의 정부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게 되었다. 즉…… 그 정부 관계란 어쩌면 지금도 같지 않을까.
“네, 그럴게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오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갈라테아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륜은 존재했다. 게다가 재상은 분명 왕비의 정부, 그러나 왕이 살아 있는 한 밀회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 신궁에서 머물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날이라면…… 사랑과 전쟁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대찬스가 아닌가.
“좋았어.”
오필리아는 뺨의 손톱 자국을 매만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빚은 그대로 갚아 주지.”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첫 번째 정적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이상한 방식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그렇게 침소에 누운 지 얼마가 지났을까. 보름달이 마력이라도 품은 듯이 빛나는 창밖을 보는 사이 밤이 한창 무르익었다.
“어디 한번 베팅을 해 볼까.”
일단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까 왕비를 만났던 상황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아, 그래. 열이 받기 시작한다. 엄청난 몰입력이다!
“꺄악!”
발성이 부족했나. 큼큼, 다시 한번.
“꺄아아악!”
그 기세를 몰아 크게 비명을 질렀다. 문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오필리아 님, 괜찮으세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손을 바들바들 떠는 오필리아를 보고 시녀가 경악했다. 이건 딱히 연기하려고 한 건 아니다. 아까의 상황을 되살리니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했다.
“당장 아바마마를 만나야 해!”
시녀가 말릴 새도 없이 잠옷 차림의 오필리아가 복도로 탈출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왕이 있는 곳을 알기는 쉬웠다. 문 앞에 보란 듯이 호위병이 여럿 서 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호위병이라도 잠옷 바람의 어린아이, 그것도 학대에 가까운 체벌의 흔적이 역력한 왕의 딸을 막아서진 못했다. 당황한 호위병이 대신 노크를 해 주는 것을 무시하고 문을 밀었다.
“아바마마!”
오필리아를 돌아보는 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밤중의 소란에 짜증이 난 듯 찌푸려져 있던 눈이 크게 뜨였다.
“오필리아! 무슨 일이냐! 어쩌다 이런 꼴이!”
왜일까. 걱정에 가득 찬 그 눈동자를 보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자동으로 나왔다. 머리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얼마나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인지 알고 있었는데.
그사이 달려온 갈라테아가 오필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갈라테아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딸이 아픈 와중에 침실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하는지. 흐윽, 오필리아가 일부러 더 크게 우는 소리를 내자 국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그리 우는 것이냐, 대체 누가 널 이렇게 한 것이야! 갈라테아, 분명 오필리아는 감기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전하, 그것이…….”
“오필리아, 세상에. 감히 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단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왕은 짚이는 바를 떠올렸다. 바로 왕비의 그 기다란 손톱 말이다. 궁내에서 그런 손톱을 가진 자는 왕비뿐이었다.
“왕비가 널 핍박한 것이냐?”
“흑, 아바마마…흐윽. 소, 소녀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왕비라 하여도 어찌 공주를 멋대로 이리 체벌한단 말이야!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에요, 아바마마. 소녀가 아직, 흑. 예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래서 소녀가 잘못했으니까, 그랬으니까 가르침을 주신 것일 거여요. 소녀가…소녀가 잘못했으니까, 흐윽, 부디 노하지 마셔요.”
이건 정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맞다.
“아니, 신탁의 아이를…… 어찌 감히 손을 대!”
왕이 몸소 무릎을 굽혀 오필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붉게 부은 상처와 터진 입술, 그 위로 흐르는 눈물 자국이 무심한 국왕에게도 효과가 있나 보다.
“그보다 아바마마, 한시가 급하여요.”
“왜 그러는 것이냐.”
“방금 소녀가 꿈을 꾸었는데…… 왕비전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요. 오늘은 별님이 약한 날이라…… 왕비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로잔틴의 큰 슬픔이잖아요. 그 꿈이 너무 무서워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도 왕비를 걱정하다니, 도대체 이 작은 아이의 어디에 이런 도량과 자애가 있단 말인가. 국왕은 크게 탄식하며 오필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왕비님께서 안전한지 살펴 주시어요! 부디…부디 무사하실 수 있도록 아바마마가 지켜 주세요!”
파란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끝없이 방울져 맺혔다. 괘씸한 왕비가 어찌 되든 오늘만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국왕으로서 신탁의 아이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로잔틴 국왕으로서의 서약에 어긋난다.
“그래, 왕비전이 무사한 것을 보면 다시 잠들 수 있겠느냐.”
“네. 지금은 너무 걱정되어서…….”
“그럼 같이 가 보자꾸나. 짐도 확인하고 싶구나.”
이건 국왕에게 있어서도 시험의 기회였다. 오필리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오필리아를 안아 올린 국왕이 호위병에게 눈짓했다. 왕비전으로 간다는 신호였다. 국왕의 목을 끌어안은 오필리아는 그 파란 눈동자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동안 갈라테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신궁에 남은 갈라테아를 뒤로하고, 오필리아는 왕의 품에 안긴 채 밖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왕비전의 문 앞에 섰다. 오필리아의 가슴이 기대로 두근두근 뛰었다. 국왕은 이조차 겁에 질린 것으로 오해하며 더욱더 분노에 불을 지폈다.
“왕비님.”
방문을 알리는 시종장은 어딘가 안색이 파리했다. 그 손이 덜덜 떨리는 것도 오필리아는 분명 보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저…… 왕비님께서는 지금 깊이 잠이 드신 것 같사옵니다만.”
“비켜라. 호위병, 문을 열어라. 왕비가 안전한지 봐야겠다!”
벌컥, 시종장이 말릴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아주 대단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국왕의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전하.”
두 잔의 와인, 왕비의 흐트러진 드레스는 가슴골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결정적으로 재상의 손이 그곳에 있었다. 왕비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 옥좌엔 재상이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에 올라앉아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왕비는 동공이 반쯤 풀린 채였다. 바닥에 벗겨진 페티코트가 뒹구는 건, 확인 사살과도 같았다.
“오, 오해입니다.”
술기운에 젖은 왕비의 말이 똑똑지 않게 들렸다. 상기된 뺨도 반나체의 재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전하! 전, 하…… 그러니까 이것은…….”
스륵, 오필리아는 왕의 품에서 내려와 곁에 섰다. 모두가 경악스러운 장면에 시선이 쏠려 있을 때, 오필리아는 왕비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
“모, 모든 것은 다 저 요물이 꾸민 짓입니다! 저년이, 저년이 저를 모함하려고! 저년은 신녀가 아니라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오늘만 해도 제게…….”
“그만.”
왕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어찌…… 어찌 한 나라의 왕비라는 자가 이다지도 경박한 짓을 할 수가 있는가.”
철컥, 왕의 손짓에 호위병이 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데려온 국왕이, 불륜 현장을 들킨 왕비를 나무라다니. 오필리아는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숨기느라 애써야 했다. 그 모습이 또 두려워 떠는 것으로 비친 모양이다.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정말 저 마녀가!”
“그 더러운 입 닥쳐라! 이 어린아이는 저를 매질한 것도 어미라고 안위를 걱정하며 울며 내게 왕비를 지켜 달라 했다. 어찌 이 아이의 발끝만도 못한 심성으로 국모를 자청하는가!”
“현혹당하시는 겁니다! 모두 저것이 꾸민…… 아니, 함정입니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아? 게다가 재상을 부른 건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 걸리지나 말든가. 이용하라고 알려 준 거 아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주 실성한 모양이구나.”
우습지만 좋은 전개다.
“호위병은 당장 재상을 감옥에 가둬라.”
“예!”
“또한, 왕비는 이 방에 유폐한다. 내 명이 있을 때까진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처분은 좀 아쉬운데,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나. 뭐, 죽일 듯이 노려보는 왕비의 시선을 즐기는 거로 아쉬움을 채워야겠다.
“전하! 저 아이는 분명 요사스러운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보세요 지금도!”
“이 아이의 도량에 비하면 그대야말로 마녀다. 끝까지 추악하구나.”
흐느끼는 왕비를 두고 쾅! 호위병에 의해 문이 닫혔다. 첫 번째 정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빚은 꼭 갚아 줘야지. 애써 때려 준 덕분에 더욱 극적인 연출을 하게 돼서 고마울 정도다.
“오필리아, 너는 정말…….”
봐, 이렇게. 오필리아는 얼굴을 숨기며 국왕에게 폭 안겼다. 정의를 실현한 양 무게를 잡으며 왕이 말했다.
“방금 본 것은 잊거라. 앞으로는 짐이 널 지켜 줄 것이다.”
이 세계로 온 후, 첫 번째 미션은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퍼펙트한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