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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신은…… 로잔틴을 버리는 것인가.”

국왕이 침통한 혼잣말을 했다.

“그건 꿈이었어요.”

“이 왕국은 대대로 신녀들의 꿈이 중대사를 정했다!”

“아뇨.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오필리아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분위기를 봐서는 앞으로도 여기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초반 설정을 잘해 둬야 한다.

“마치 악몽처럼, 멸망이 사라졌어요.”

“뭐라?”

“어……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리면서! 어른이 된 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하얀빛이 비치면서 제게 말해 줬어요.”

에라, 모르겠다.

“나는 여왕이다…라고.”

“허어.”

국왕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건 너무 나갔나? 하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멸망을 막을…… 구국의 예언이로구나. 과연, 신녀의 핏줄이다.”

과거 로잔틴은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위기를 피했다. 모든 기록은 봉인된 채 대대로 국왕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전설이 아니었다. 왕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즉, 미래를 바꾸어야 왕국이 멸망을 피한다…… 그런 것인가?”

여기서 덧붙이면 너무 사기꾼의 냄새가 날 것 같다. 오필리아는 일부러 망설이는 체 물끄러미 국왕을 봤다.

“아니, 너는 순수한 존재. 그저 신의 뜻을 전했을 뿐이지. 네가 아이라는 것을 잊었구나.”

역시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오길 잘했다. 잘 모른다는 핑계로 지를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오필리아는 혼자 심각한 얼굴을 한 국왕을 보며 고기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음! 맛있어. 어른이었으면 왕을 두고 혼자 밥을 먹진 못했을 것이다.

“짐의 치세에 신성한 예언이 있다는 것은 운명이겠지.”

혹은 나의 사기 행각이거나.

“오필리아. 짐에게 가까이 오거라.”

한창 잘 먹고 있는데. 오필리아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고 국왕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넌 신께서 로잔틴에 보내 주신 선물인 것 같구나.”

아뇨, 사기꾼인데요. 그러나 알려 주진 않을 거다. 국왕은 그럴 자격이 없는 아버지였다.

“이제 전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국왕이 퍽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의 이용 가치가 더 높아졌다는 뜻이겠지. 오필리아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이 몸은 열한 살이지만 원래 성인이었던 오필리아는 그리 순진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말이다.

“아바마마라고 부르거라.”

“그치만…….”

숨겨 둔 정부의 자식 취급이나 했으면서. 진짜 딸도 아닌 자신한테 알랑거리는 것이 우스웠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피식 실소가 나올 뻔했다.

“너는 신성한 예언을 전달하는 신의 아이다. 또한, 짐의 자식이지.”

아하, 쓸모가 생기니 바로 자기 자식이 된다. 이거 참 편리하다. 원작의 오필리아가 이 광경을 봤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평생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봐 주지 않던 아버지의 손바닥 뒤집는 듯한 태세 전환을.

“어디, 불러 보거라.”

도저히 싫다고는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오필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뭐, 상대가 나를 이용한다면 자신 역시 상대를 이용하면 된다. 자신은 실제로 열한 살 꼬마가 아니니까.

“네…… 아바마마.”

생긋, 미소를 짓자 오필리아의 아름다움이 햇살처럼 번졌다. 국왕은 새삼 자신의 핏줄이 대견하다는 것을 느꼈다. 뻔뻔한 그의 성정다운 생각이다.

“그래, 오필리아, 내 딸아.”

“네, 아바…마마.”

이 부정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자신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할 때까지겠지. 오필리아는 국왕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어쨌든 신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는 국왕의 존재는 자신이 살아가는 데 유용할 것이다. 피차, 이용하는 거다.

“신의 인도가 무엇인지 앞으로 짐과 함께 생각하자꾸나.”

정말 이런 식이라면 여왕이 되는 건 아주 단순하지 않을까. 김이 빠질 정도의 전개에 안심하려는 찰나, 오필리아는 다시 한번 국왕의 호박색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외로웠겠지.”

그 말은 자신이 아닌 진짜 오필리아가 들었어야 좋았을 텐데.

“더는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쳇, 시시한 가족 놀음 따위 모른다.

“네.”

부모의 사랑 같은 것도 모른다.

“아바마마.”

오필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국왕의 눈동자는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의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바라던 부모는 아니다.

그래도 좋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왕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쩌면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면에선 편하다.

누구든 이용하면 된다.

그들이 오필리아를 이용했던 것처럼.



* * *



국왕은 그 후로 신궁에 자주 들렀다. 종종 갈라테아와 오필리아가 함께하는 작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우스운 꼴이다. 이제 와서 잊었던 정부와 그 자식을 챙기는 꼴도, 어떻게든 신탁의 방향을 찾으려 애를 태우는 것도.

“으…… 레몬 셔벗은 시어서 싫어요!”

답답한 식탁의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는 앳되었다. 처음엔 닭살이 돋았지만, 하다 보니 열한 살의 말투도 제법 할 만해졌다. 그 덕분에 편식에 대해 혼이 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은가.

“오필리아?”

어머니의 부름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열한 살의 특권이다.

“아, 나 별 보러 갈래요…….”

국왕은 관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러자 담당 시녀가 오필리아의 손을 잡고 난간으로 안내한다. 공주의 삶이란 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지. 본래의 오필리아는 이렇게 써먹지 못했으니 어릴 때부터 죄 하얗기만 한 신궁에서 엎드려 기도만 드리며 살았겠지만.

“흐음…… 그게 바보 같다는 거야.”

“예, 공주님?”

“아니, 저 별이랑 저 별이 싸워서 멀어지는 게 바보 같다고!”

대충 둘러치면 아무도 자신이 어린애 안의 다른 누구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보다 이제 어쩐다. 띄울 수 있는 건 다 띄웠고, 남은 것은 국왕의 마음이었다. 그러면 갈라테아가 조력이 될 것이다. 오필리아가 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한 건 단지 별을 보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거다.



“전하.”

“왜 또 그런 표정을 짓는가. 세 식구가 모였는데, 더 기쁜 표정을 짓지 않고서.”

갈라테아는 현명했다.

“왕비님의 위신에 크게 금이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걸 왜 네가 걱정하느냐?”

국왕은 무정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유일한 왕위 계승자로 자란 탓인지 좀처럼 타인에게 정을 품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자신은 그런 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갈라테아를 찾았던 마음 또한 정을 느꼈다기보다는 궁을 떠나 쉼터를 찾은 것과 비슷했다.

“궁은…… 소문이 빠르지 않습니까. 아마 왕비전에도 이야기가 다 들어갔을 겁니다.”

“그래서?”

“전하…….”

“잘못된 것이 있느냐? 오필리아는 내 딸이야. 오히려 태어났을 때 왕비의 자식으로 입적시켜 공주로 만드는 데 찬성한 것도 왕비 자신이다.”

그것이 왕궁의 관례였다. 왕의 사생아들은 적당한 지위에 만족하고 왕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했다.

“갈라테아, 그대는 신의 말씀을 섬기는 자다. 그러니 진실만을 고하거라.”

“예.”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젊었던 국왕은 그녀를 취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때, 갈라테아는 처음부터 제 운명을 알았던 것처럼 아주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 태어난 딸이 오필리아였다.

“오필리아의 말은, 역시 신탁이라고 생각한다.”

“전하.”

“그대는 어린아이라고 걱정하지만, 역대 로잔틴 왕조에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갈라테아의 복잡한 시선이 발코니에서 놀고 있는 오필리아의 등을 향했다. 신녀로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저 작고 아름다운 아이에게, 무언가 신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갈라테아.”

국왕이 신중한 눈빛으로 갈라테아를 주시했다.

“전하.”

“내 아이…… 오필리아에게는 신력이 있는 것이지?”

어머니로서 아니라 말하고 싶었으나, 신은 갈라테아에게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네.”

로잔틴 왕국의 국운이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 건, 어린 신녀였다. 인제 와서는 명맥이 끊긴 줄 알았는데 역사를 증명하듯 오필리아의 존재가 드러났다.

“짐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또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갈라테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역시, 그대는 속일 수가 없군.”

“전하의 마음이 이미 굳어 버린 것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국왕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는 법을 모르는 남자가 이제 와 제 의견을 들어 줄 리 없다.

“갈라테아.”

“예.”

“짐은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신께서 하필 짐의 치세에 인도를 내려 주신 것까지도.”

왕은 착각에 빠지기 쉬운 자리다.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자가 없기에.

“그대가 큰 공을 세웠다. 짐의 핏줄을 이으며 신의 뜻을 전달하는 아이를 낳다니.”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한곳으로 흐른다. 오필리아의 가치. 그리고 쓸모다.

“전, 제게는…… 그저 저의 아이였습니다. 저의 아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무척이나 사랑하면서 길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의 인생은 좋았다고, 그렇게 믿습니다.”

갈라테아가 조금 서글픈 마음을 삼키며 애써 차분히 말했다.

“보통은 짐의 아이를 낳아서 기뻐하건만.”

“……전하께 송구스럽지만, 저에게는 저만이 기른 여식이 있어서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었답니다.”

어린 오필리아가 천진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갈라테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 뜻을 국왕은 평생이 가도 모를 것이다.

“상을 내리겠다.”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어느새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오필리아의 심경이 퍽 복잡했다. 국왕이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정을 키우거나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자식은 도구일 뿐인지.

“전하.”

일부러 방금 뛰어온 체 숨을 몰아쉬자 국왕이 돌아본다.

“아바마마라고 부르래도.”

“아바마마.”

“그래, 오필리아. 별을 보았느냐?”

“네, 아바마마.”

이대로 쭉 가족놀이를 계속할 수도 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온데, 별이 이상했어요…….”

“오필리아!”

갈라테아가 말렸지만 이미 국왕은 호기심을 보였다.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보아라.”

로잔틴의 신녀는 별과 함께했다. 국왕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오필리아도 잘 알았다. 그걸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왕국을 지켜 주는 착한 별님이 말해 줬는데.”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역시 어린아이의 화법은 쓸모가 많다.

“보름달이 뜨면 자기가 그 빛에 져 버려서 그게 무섭대요.”

보름이 며칠 남지 않았다. 게다가 보름달이 뜨면 그 빛에 작은 별들의 빛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과학 상식 아닌가.

“오오, 그런 일이. 허면, 어찌 그 별을 지킬 수 있겠느냐.”

이 시대엔 그런 개념이 없나 보다. 별은 어차피 저 멀리 우주에 있는 건데 지키긴 뭘 지켜.

“별님은 달이 지면 다시 반짝여 줄 거라고 약속했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과학이라고, 사이언스.

“오오, 다행이구나…….”

이쪽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학 수준이 낮아서 다행이다. 무슨 말을 해도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살아남기 위한 특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