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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 통할 줄 몰랐다. 책에 나온 갈라테아의 신력은 가끔 고장 나는 대적용 레이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조상대에서 엄청난 신력의 보유자들이 있었다니 그건 생각 못 했다.

“오필리아, 그 신탁이 사실이냐.”

국왕이 다급하게 달려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어린아이의 한마디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미래가 된다니. 이러니까 나라가 망하지!

“하지만, 전하. 오필리아는 아직 어린아이라서…….”

“갈라테아, 여태 우리 왕국의 흥망성쇠를 보고도 모르느냐? 초대 국왕께선 고작 열두 살의 신녀를 데리고 이 왕국을 세우셨고, 5대 국왕께선 제국으로부터 당당히 주권을 받아 내셨다, 당시 신녀는 겨우 열 살이었지.”

저 사람이 오필리아의 아버지인가. 뭐랄까, 책에서는 엄청나게 무능하고 한심한 사람 같았는데 직접 보니 왕족의 위엄이 있긴 했다. 그래 봤자 불륜남이지만.

“로잔틴의 왕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린 신녀를 통한 신탁은 왕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와우, 그런 건 몰랐는데.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왜 이걸 몰랐을까. 하긴, 보통의 열한 살이 생각해 낼 방법이 아니긴 했다.

“오필리아, 다시 말해 봐라. 네 꿈에서 보았다는 그 신탁 말이다.”

신탁은 아니고 그냥 내 희망 사항이지만, 뭐 상관없겠지.

“미래의 오필리아를 만났어요. 완전히 큰 언니가 된 것처럼 보였어요. 머리카락과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요. 그냥 제가 자라면 그렇게 변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뭐라고 말했지?”

심각해진 분위기 사이에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이 정도 긴장도 못 이겨 낸다면 어차피 여왕은 될 수 없다.

“나는 여왕이다.”

오필리아의 아직 앳된 목소리에도 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왕가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신탁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그건 자신이 지어낸 말이지만.

“네.”

오필리아에게 양심의 가책 따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의리도 없고, 국왕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까 더더욱.

“저, 저런…….”

충격인지 약간 현기증을 일으키는 국왕을 보고 갈라테아가 부축해서 앉혔다. 오크 나무로 지은 침대 기둥에 눕듯이 기댄 국왕은 병자처럼 지쳐 보였다.

“전하, 너무 놀라시면 안 돼요.”

오필리아가 국왕에게 다가가 섰다.

“요즘 두통이 심하시지요?”

놀라움에 국왕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손이나 발이 저리기도 하시는 등…… 괴로우실 텐데.”

“어떻게, 어의밖에 모르는 것을, 오필리아 네가…….”

간단하다. 소설 속 국왕이 사망한 건,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지고 얼마 후였기 때문이다. 대충 뇌출혈로 유추할 수 있을까 해서 던져 본 건데 적중했나 보다. 오필리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미래를 보고 왔어요.”

국왕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신뢰로 가득 찼다. 이 나라 건국부터 함께했던 신녀의 핏줄이 왕국을 어떻게 지켰는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왕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외에, 그 외에 하나라도 더 들은 것은 없느냐.”

이번에는 오필리아가 입을 다물어야 할 차례였다. 예상대로 국왕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린 오필리아를 들어다 제 옆에 친히 앉혔다.

생각보다 친절한데?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왕은 오필리아를 신전에 살게 했을 뿐, 해코지를 하거나 모욕을 주지는 않았다. 단지 일찍 죽어 더 무능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게 문제였지.

“무슨 말이어도 좋으니, 부왕인 나에게만이라도 말해 줄 수 없겠느냐?”

“왕국은…… 멸망합니다.”

국왕은 순간 섬광처럼 일어난 현기증에 앉은 채로 실신했다. 오필리아는 그런 부왕의 손등 위에 제 작은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깜짝 놀란 건 오필리아만이 아니었다. 너무 투명해서 빛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한 빛 덩어리가 은은하게 뿜어 나와 왕의 손등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만져 보지 않아도 그 빛은 분명 따뜻해 보였다.

“오필리아, 너 언제 저런 신력을…….”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오필리아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빛이 가진 따스함이 사람을 치유하는 건 확실했다.

갈라테아는 그동안 숨겨져 있던 딸의 재능에 속으로만 경악했다. 일족이 줄어들수록, 신력도 줄어 갔다. 갈라테아의 능력은 고작 나라에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지할 뿐, 그 외에는 그다지 쓸모없는 것들뿐이었다.

“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필리아의 손이 닿으니 고통이 물러가는 것 같구나.”

“당분간은 이 정도로 괜찮으실 거예요.”

열한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에 국왕은 그제야 오랫동안 관심조차 끄고 살던 어린 딸을 봤다.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한 피부에 백금발, 하얀 속눈썹 자락 아래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까지.

신궁의 규칙을 따라 무늬 없는 하얀 무명 드레스 하나를 걸쳤는데도 오히려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오필리아…….”

국왕이 오필리아를 새삼 경이로운 눈으로 봤다.

“내게 이렇게 아름다운 딸이 있단 걸 잊고 있었다니…… 어리석었다. 혈통이 전부가 아니거늘, 세상의 입방아가 무에 그리 두렵다고.”

부왕이라고 해도 진짜가 아닌 오필리아가 정을 느낄 리 없다. 진짜라 해도 받은 사랑이 없는데 이제 와 반갑진 않을 것이고. 시큰둥한 감정을 읽은 것인지, 국왕이 헛기침했다.

“널 거의 이곳에서 기르다 보니 마주한 적도 별로 없었지. 짐이 무심했구나.”

무심은 무슨……. 저 좋자고 신녀를 건드려 놓고서 자기 여자도, 딸도 모두 신궁에 처박아 둔 사람이 뉘우치는 척하기는. 오필리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원작에서 오필리아를 신녀로 이용했듯이, 지금도 이용 가치가 있어 보이니까 저러는 게 분명했다.

“거기, 공주의 채비를 도와라.”

“전하. 설마 오필리아를 데리고 나가실 겁니까?”

“내 딸과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게 불법은 아니지 않나.”

뭐야, 저 막무가내는. 오필리아는 황당한 표정을 지우려 애썼다. 이럴 땐 아직 열한 살이라는 신체적 제약이 좀 답답하다. 어린아이라면 순순히 국왕의 명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씻으라고?”

작은 대리석 욕조엔 금색으로 물든 고양이 발이 달려 있었다. 저렇게 작은데 자신이 들어간다니……. 아 참. 나 열한 살이었지.

국왕의 변덕으로 갑작스러운 명령이 떨어진 직후,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분에 오필리아는 따뜻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거품 속에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두 손을 모으면 폭신해 보이도록 쌓였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거품들이 본래 오필리아의 삶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얗고 향기롭고, 그러나 덧없이 흩어져 버리는 서글픈 인생.

“난 절대 그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 한 말이야 누구나 책을 읽고 그 정도 불평은 할 수 있는 거잖아. 진지하게 본인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지만.”

오필리아는 제 팔을 들어 올려, 빤히 응시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하고 하얀 피부, 가녀린 어린아이의 살갗, 욕조의 수면에 간혹 비치는 푸른 눈동자, 무엇보다도 부드럽게 물결치는 은색에 가까운 백금발은 오필리아가 아름다운 여자로 자란다는 확증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못 할 것도 없지.”

이렇게 예쁘게 살아 보고 싶었다는 본심은 창피하니까 묻어 둔다.

“그보다 정말 내게 신력이 있긴 한 건가.”

분명, 빛이 나왔고 그것을 국왕에게 전달하자 이동하는 온기가 느껴졌다. 치유를 위한 마법이었을 거다. 즉, 책 속의 오필리아는 정말로 신력이 있었던 셈이고. 그러니 더더욱 그녀의 인생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해 보지, 뭐.”

향긋한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른하고도 기분 좋은 향이 오필리아를 감쌌다.

“그래! 까짓 여왕, 내가 하면 되잖아.”

실제로 그 말을 꺼낸 것도 자신이었으니, 못 할 것도 없다. 이토록 신력에 대한 믿음이 깊은 왕국이라면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전개가 가능할 수도.

솔직히 뭐가 되든 말든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본래 원작에서는 곧 갈라테아가 병으로 죽고 나면 이어 황제도 병을 알게 되고, 무능한 이복 오라비 오스카에게 왕위가 넘어간다. 그때의 오필리아는 아무도 없는 백색의 신궁에 갇혀 도구로 살다가, 끌려 나가서는 공작과 황제 사이에서 또 고생만 했다. 죽어 가는 날까지 쓸쓸하게, 남자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수탈당한 끝에서야 다시 혼자가 되어 이곳에 돌아온다.

“무슨 엔딩을 쳐도 원작보다 나아.”

목욕을 마치고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붉은 드레스를 입은 오필리아는 한층 더 아름다웠다. 어린 나이임에도 사랑스럽다는 단어보다 아름답다거나 신비하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영묘한 분위기였다. 붉은 실크 드레스는 마치 장미처럼 작은 오필리아를 감쌌고, 새하얀 피부와 굽이치는 긴 백금발, 보석과도 같은 벽안은 보는 사람마다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이 날개라더니. 역시 아이템이 좋아야 해.”

다만, 시녀들만은 신력이 개화하기 시작한 공주의 말을 흘려듣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한 말투로 들어 보지도 못한 단어를 중얼대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알아서는 안 되는 영역에 있는 내용임이 분명했다.

“고마워.”

그러나 이 작은 공주님이 새초롬하게 말하는 순간에는 모두 마음이 녹아내려 그런 건 모두 잊고 말았다.



* * *



기다란 테이블 위에 산해진미가 놓였다. 오필리아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연회장이었다. 국왕은 익숙한 듯이 송아지 고기를 썰다, 제 어린 딸에게 눈길을 줬다.

부유한 남성들은 암암리에 애인을 뒀지만, 기본적으로 로잔틴은 일부일처였다. 게다가 기세가 등등한 왕비가 있었으니 오필리아의 존재는 국왕에게 있어 스스로 만든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저 낯설었을 뿐이다. 오필리아는 고개를 젓고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세상에, 맛있어. 이것만으로도 여기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뻔했다. 저렇게 부담스러운 눈으로 보는 국왕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 아까 예언에 대해서 말인데…… 정말 왕국이 멸망하는 꿈을 꾸었느냐?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냥…… 꿈이라서…….”

입을 오물거리며 적당히 대답하자 국왕은 속이 타는지 냉수를 들이켠다.

“세상이 흔들리고 왕국이 무너진다고 했어요.”

“누가?”

누구긴, 누구야. 나지.

“신비로운…… 목소리가.”

그렇다고 해 두자.

“과연, 왕국에 내려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그냥 던져 본 건데, 의외로 잘 먹힌다. 오필리아는 용케도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는구나 싶었지만, 로잔틴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는 대대로 전해 오는 비밀 기록이 있었다. 즉, 국왕에겐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