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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사서 아르바이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폐관이 예정된 낡은 도서관에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덕분에 먼지 쌓인 책을 정리하는 게 일과다. 장점이라면 가끔 재미난 책을 발굴하는 정도랄까.
“어우, 먼지 봐.”
유독 먼지가 심한 책을 털어 내자, 눈앞이 확 자욱해졌다.
“무슨 책 표지가 벨벳이지? 어느 시대 책이야, 대체.”
그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붉은 벨벳 표지에 금박 문양이 새겨진, 제목조차 먼지에 가려져 있던…… 내 운명을 바꾼 바로 그 마법의 책.
“바코드도 없잖아?”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첫 장을 읽고 다음 장으로 넘겼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얼마를 읽었을까, 벌써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제 좀 재밌어지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책을 가방에 슥 넣어 버렸다. 어차피 바코드도 없으니 도서관 소장 도서가 아니라는 변명을 하면서.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태 어떤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런 몰입감은 없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읽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중세풍 막장이라는 건가.”
책이 제법 두꺼웠다. 이야기는 신성 라스티엘 제국을 배경으로, 왕국 로잔틴에서 시작된다. 왕국의 서녀로 태어난 오필리아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소설은 담담한 문체였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내용이 이미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백금발에 벽안을 가진 아름다운 공주 오필리아. 그러나 그 백금발은 불행의 시작과도 같았다. 제국에서 백금발을 가진 일족은 단 하나, 그들 중 일부는 예언의 힘을 타고난다. 그러나 그 후사가 많지 않았고, 비밀리에 로잔틴 왕국의 신궁에서 자신들의 신비한 명맥을 겨우 지키고 있었다.
“왕이 잘못했네.”
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신녀에게 반해서 왕비를 두고도 아이를 낳게 하더니, 그 신녀가 병으로 죽기 무섭게 신비로운 힘을 타고 난 자신의 딸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뻔뻔한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이복 오빠는 한층 무능하고 더 뻔뻔해서 고난을 안겨 준다.
“하지만 역시 막장이 재밌지.”
아침 드라마 마니아라 여기서 멈추지 못했다. 무능한 이복 오빠에 의해 점점 망해 가는 왕국, 재상의 횡령으로 피폐해지는 국가, 급기야 그것을 신녀의 탓으로 돌리며 주인공을 근처 공국에 정략결혼으로 팔아 치운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남편이 된 공작은 어떤 감정도 주지 않고, 투명 인간처럼 내버려 두다가 주인공을 제국의 황제에게 바쳐 버린다.
“이제 곧 사이다가 나올 때가 됐는데.”
황후 자리가 비어 있으니 아마 오필리아가 황후가 되는 거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는데.
“……뭐야, 이거.”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의 요소는 전부 갖췄는데, 반전이 나올 기미가 없다! 태후의 방해와 견제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황제의 첩으로 전락하는 오필리아. 명목상 공작 부인의 지위를 가지고서, 남자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만 당하는 아름다운 공주.
“설마…….”
세월은 흐르고 누구의 아이도 낳지 못한 그녀는 남자들에게서 잊힌다. 자주 병석에 눕는 그녀의 예지력은 점차 틀리기 시작했고, 더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모두에게 버려진 뒤에야 그녀의 마지막 남은 바람이 이뤄진다. 태어난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거 말로만 듣던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마였습니다, 뭐 그렇진 않겠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독자의 기대를 처절하게 배신하며, 결말에 오필리아는 신궁에 쓰러져서 쓸쓸히 죽어 간다. 무능한 이복 오빠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국왕은 더는 아픈 성녀 따위 재활용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 뭐야 이거…….”
게다가 그 부분에서 마지막 장이 뜯겨 나간 채다. 답답해서 책장을 확 덮어 버렸다. 채 못 털어 낸 먼지가 날리는 걸 보자 두 배로 인상이 써졌다.
“됐어, 어차피 끝까지 봐 봤자 똑같아.”
고구마는 고구마인 채겠지. 시간만 날렸다.
“아무튼 조선이나 로잔틴이나 그놈의 아들 타령이 문제야.”
오필리아는 아름다웠다. 또한, 적의 침입을 감지하던 어머니의 신력에 못 미칠지는 몰라도 충분히 상황을 인지하는 현명한 여성이었다. 적어도 그 모자란 이복 오빠보다는 나았을 거다.
“짜증 나, 괜히 나만 고구마 먹었잖아.”
뭐, 배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가장 답답한 부분은 그 후 오필리아의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접근한 공작도, 무정했던 공작의 야심으로 인해 만나게 된 황제도, 마지막에 왕국을 집어삼킨 자도 그녀를 그저 물건으로 대할 뿐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몰랐다. 오필리아에게도 충분한 통찰력이 있었고, 그들의 속셈을 내다볼 수 있었음을. 뭐, 그것도 오필리아의 탓인 거다. 누가 그렇게 끝까지 입 다물고 당하고만 살라고 했나. 나까지 답답하게!
“있는 능력도 제대로 못 쓰면, 자기 탓이지.”
그러고 보니, 제목이 뭐였더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긴 뭐가 없어. 스펙만 놓고 봐도 처음부터 치트키 쓴 거 아냐? 일단 그 왕국에서 제일 뛰어난 스펙으로 태어나 놓고 어쩔 수 없다는 건 말이 자기 인생에 대한 방임이야.”
‘방임?’
“그래, 방임. 닥쳐오는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고, 바꾸려 들지 않았지.”
‘운명은 함부로 바꾸어선 안 되는 것이니까.’
“그 말을 한 것도 결국 무능한 남자들이었지. 그렇게 희생해 봤자 어차피 왕국은 망하고, 본인 인생도 끝장인데 말이야.”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게 아니야.’
“뭐, 다 포기하고 끌려다니는 것만 할까.”
제목이…… 아까 분명 닦아 내고 봤는데.
“나라면, 그렇게는 안 해.”
‘그래……?’
“적어도 저거보다는 낫겠다. 저게 뭐야, 평생 고구마만 먹다가 희생당하고, 나라도 망하고. 어차피 망할 나라 때문에 저렇게 산 걸 누가 기억이나 해 주나?”
잠깐,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그렇단 말이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밤하늘에 가득한 별만이 반짝인다. 난 분명 내 방에서 책을 덮었던 것 같은데.
“잠깐, 여기는 어디야. 난 분명히 내 방에서 책을…….”
아, 그 책 제목이 뭐였더라.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아마 이건 꿈이겠지? 얕은 잠이 들면 간혹 느끼는 가위눌림이라든가.
‘그럼, 네가 해 봐.’
신비한 목소리는 어딘지 슬프게 들렸다.
‘이제부턴 네가 오필리아야.’
그 목소리에 무슨 마법이 있었는지 거짓말처럼, 내 원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저런 막장 고구마 세상에 들어갈 생각 없거든?”
‘막장이라고 했지? 그건 마지막 장이란 뜻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내 이름 돌려주고 꿈이면 빨리 깨워 줘.”
‘그래.’
의외로 말이 통하는 건가.
‘네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면 그때 깨게 해 줄게.’
이게 진짜.
‘너라면 잘할 수 있다고 했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너…… 오필리아지?”
‘이젠 네가 오필리아야.’
왜 이렇게 슬프게 들렸던 건지도.
‘나보다 잘할 수 있기를 기대할게.’
도대체 저 아이의 마지막 장은 뭐였을까. 생각하는 사이, 어두웠던 사방이 차츰 하얀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지 정도는 고르게 해 줄게.’
어차피 거절은 거절당한 것 같다. 내가 오필리아여야만 한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 당장 진지하게 생각하기엔 무리인데.
‘시간이 없어. 이게 내가 가진 힘의 마지막이야.’
빠르게 줄거리를 돌이켜 봐도, 딱히 끌리는 시점이 없다. 모든 걸 고치려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이전이어야만 한다.
“부왕이 죽기 전, 아니 병을 알았을 때! 아, 아니야. 모친이 죽기 전으로!”
‘그래.’
빛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 잘 부탁해. 열한 살의 오필리아. 부디…… 나보다는 나은 마지막 장을 찾을 수 있기를.’
신비롭고 슬픈 목소리와의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주 오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 혹시 내 기침 소리에 깼니?”
하얀 베일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기분 좋은 봄 공기와, 그보다 더 따스한 여인의 목소리.
“왜, 그러니? 무슨 꿈이라도 꿨어?”
그 목소리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거다. 왜냐면 현실의 자신에겐 이렇게 사랑스럽게 나란히 누워서 잠들 엄마 같은 거, 없었으니까.
“오필리아?”
여인의 파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이 여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오필리아의 모친이었던, 로잔틴의 신녀 갈라테아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가엾은 여자.
“그냥, 조금 이상한 꿈을…….”
“넌 아무래도 날 많이 닮았구나. 나도 어릴 때부터 꿈을 많이 꿨었지.”
갈라테아의 목소리 끝에 기침이 묻어난다. 저 병마가 곧 목숨마저 가져갈 것이다.
“저기…….”
막상 뭐라 호칭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갈라테아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둘만 있을 때는 엄마라고 불러도 된단다.”
대외적으로 오필리아는 왕비의 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왕궁 내에서 신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백금발과 벽안은 제국 내에서도 신녀의 일족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니까. 그 때문에 오필리아는 남의 눈을 피해 신궁에서 유폐되다시피 자라야 했다.
“콜록……!”
갈라테아가 괴로운 듯이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했다. 손수건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났다. 신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괜찮으니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어머니란 존재는 이런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오필리아가 걱정하지 않아도, 곧 나을 거란다.”
“거짓말.”
앳된 목소리에 갈라테아도 놀라고 오필리아도 놀랐다.
“지금 뭐라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시간도 없는데 시도라도 해 볼까. 가만히 있다가는 원작의 오필리아와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없을 테니까.
“미래를 봤어요.”
갈라테아는 분명 신력이 있었다. 아주 강하진 않았지만, 외적의 침입이나 큰 우환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통할 수도 있다.
“네겐 아직 그 정도의 신력이 없을 텐데. 게다가 신력이 개화하는 건 적어도 열넷은 되어야…….”
“꿈에서, 그러니까…….”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그래요, 미래의 내가 알려 줬어요. 꿈을 통해서.”
갈라테아가 물끄러미 어린 딸을 봤다. 역시, 이런 헛소리는 안 통하는 건가.
“분명…… 우리 조상님들 대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어라, 이거 잘하면 될 것 같은데.
“곧, 왕국에 재앙이 닥칠 거예요.”
곧이라는 건 거짓말이지만, 오필리아의 팔자가 그대로라면 이 왕국도 뻔하다.
“더 자세히 들려주겠니?”
“그러니까, 꿈에서 미래의 오필리아가 말했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이려나.
“미래의 네가? 뭐라고 했는데?”
“음…… 그게…….”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보렴.”
이제부터 원래의 오필리아는 사라진다. 이 막장 고구마 세계에서 사이다를 마실 수 있는 건 오로지 지금부터의 제 역량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래, 어차피 원작보다 최악일 수는 없다. 그러니 크게 던져 보기로 했다.
“나는, 여왕이다.”
사서 아르바이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폐관이 예정된 낡은 도서관에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덕분에 먼지 쌓인 책을 정리하는 게 일과다. 장점이라면 가끔 재미난 책을 발굴하는 정도랄까.
“어우, 먼지 봐.”
유독 먼지가 심한 책을 털어 내자, 눈앞이 확 자욱해졌다.
“무슨 책 표지가 벨벳이지? 어느 시대 책이야, 대체.”
그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붉은 벨벳 표지에 금박 문양이 새겨진, 제목조차 먼지에 가려져 있던…… 내 운명을 바꾼 바로 그 마법의 책.
“바코드도 없잖아?”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첫 장을 읽고 다음 장으로 넘겼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얼마를 읽었을까, 벌써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제 좀 재밌어지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책을 가방에 슥 넣어 버렸다. 어차피 바코드도 없으니 도서관 소장 도서가 아니라는 변명을 하면서.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태 어떤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런 몰입감은 없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읽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중세풍 막장이라는 건가.”
책이 제법 두꺼웠다. 이야기는 신성 라스티엘 제국을 배경으로, 왕국 로잔틴에서 시작된다. 왕국의 서녀로 태어난 오필리아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소설은 담담한 문체였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내용이 이미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백금발에 벽안을 가진 아름다운 공주 오필리아. 그러나 그 백금발은 불행의 시작과도 같았다. 제국에서 백금발을 가진 일족은 단 하나, 그들 중 일부는 예언의 힘을 타고난다. 그러나 그 후사가 많지 않았고, 비밀리에 로잔틴 왕국의 신궁에서 자신들의 신비한 명맥을 겨우 지키고 있었다.
“왕이 잘못했네.”
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신녀에게 반해서 왕비를 두고도 아이를 낳게 하더니, 그 신녀가 병으로 죽기 무섭게 신비로운 힘을 타고 난 자신의 딸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뻔뻔한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이복 오빠는 한층 무능하고 더 뻔뻔해서 고난을 안겨 준다.
“하지만 역시 막장이 재밌지.”
아침 드라마 마니아라 여기서 멈추지 못했다. 무능한 이복 오빠에 의해 점점 망해 가는 왕국, 재상의 횡령으로 피폐해지는 국가, 급기야 그것을 신녀의 탓으로 돌리며 주인공을 근처 공국에 정략결혼으로 팔아 치운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남편이 된 공작은 어떤 감정도 주지 않고, 투명 인간처럼 내버려 두다가 주인공을 제국의 황제에게 바쳐 버린다.
“이제 곧 사이다가 나올 때가 됐는데.”
황후 자리가 비어 있으니 아마 오필리아가 황후가 되는 거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는데.
“……뭐야, 이거.”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의 요소는 전부 갖췄는데, 반전이 나올 기미가 없다! 태후의 방해와 견제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황제의 첩으로 전락하는 오필리아. 명목상 공작 부인의 지위를 가지고서, 남자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만 당하는 아름다운 공주.
“설마…….”
세월은 흐르고 누구의 아이도 낳지 못한 그녀는 남자들에게서 잊힌다. 자주 병석에 눕는 그녀의 예지력은 점차 틀리기 시작했고, 더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모두에게 버려진 뒤에야 그녀의 마지막 남은 바람이 이뤄진다. 태어난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거 말로만 듣던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마였습니다, 뭐 그렇진 않겠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독자의 기대를 처절하게 배신하며, 결말에 오필리아는 신궁에 쓰러져서 쓸쓸히 죽어 간다. 무능한 이복 오빠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국왕은 더는 아픈 성녀 따위 재활용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 뭐야 이거…….”
게다가 그 부분에서 마지막 장이 뜯겨 나간 채다. 답답해서 책장을 확 덮어 버렸다. 채 못 털어 낸 먼지가 날리는 걸 보자 두 배로 인상이 써졌다.
“됐어, 어차피 끝까지 봐 봤자 똑같아.”
고구마는 고구마인 채겠지. 시간만 날렸다.
“아무튼 조선이나 로잔틴이나 그놈의 아들 타령이 문제야.”
오필리아는 아름다웠다. 또한, 적의 침입을 감지하던 어머니의 신력에 못 미칠지는 몰라도 충분히 상황을 인지하는 현명한 여성이었다. 적어도 그 모자란 이복 오빠보다는 나았을 거다.
“짜증 나, 괜히 나만 고구마 먹었잖아.”
뭐, 배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가장 답답한 부분은 그 후 오필리아의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접근한 공작도, 무정했던 공작의 야심으로 인해 만나게 된 황제도, 마지막에 왕국을 집어삼킨 자도 그녀를 그저 물건으로 대할 뿐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몰랐다. 오필리아에게도 충분한 통찰력이 있었고, 그들의 속셈을 내다볼 수 있었음을. 뭐, 그것도 오필리아의 탓인 거다. 누가 그렇게 끝까지 입 다물고 당하고만 살라고 했나. 나까지 답답하게!
“있는 능력도 제대로 못 쓰면, 자기 탓이지.”
그러고 보니, 제목이 뭐였더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긴 뭐가 없어. 스펙만 놓고 봐도 처음부터 치트키 쓴 거 아냐? 일단 그 왕국에서 제일 뛰어난 스펙으로 태어나 놓고 어쩔 수 없다는 건 말이 자기 인생에 대한 방임이야.”
‘방임?’
“그래, 방임. 닥쳐오는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고, 바꾸려 들지 않았지.”
‘운명은 함부로 바꾸어선 안 되는 것이니까.’
“그 말을 한 것도 결국 무능한 남자들이었지. 그렇게 희생해 봤자 어차피 왕국은 망하고, 본인 인생도 끝장인데 말이야.”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게 아니야.’
“뭐, 다 포기하고 끌려다니는 것만 할까.”
제목이…… 아까 분명 닦아 내고 봤는데.
“나라면, 그렇게는 안 해.”
‘그래……?’
“적어도 저거보다는 낫겠다. 저게 뭐야, 평생 고구마만 먹다가 희생당하고, 나라도 망하고. 어차피 망할 나라 때문에 저렇게 산 걸 누가 기억이나 해 주나?”
잠깐,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그렇단 말이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밤하늘에 가득한 별만이 반짝인다. 난 분명 내 방에서 책을 덮었던 것 같은데.
“잠깐, 여기는 어디야. 난 분명히 내 방에서 책을…….”
아, 그 책 제목이 뭐였더라.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아마 이건 꿈이겠지? 얕은 잠이 들면 간혹 느끼는 가위눌림이라든가.
‘그럼, 네가 해 봐.’
신비한 목소리는 어딘지 슬프게 들렸다.
‘이제부턴 네가 오필리아야.’
그 목소리에 무슨 마법이 있었는지 거짓말처럼, 내 원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저런 막장 고구마 세상에 들어갈 생각 없거든?”
‘막장이라고 했지? 그건 마지막 장이란 뜻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내 이름 돌려주고 꿈이면 빨리 깨워 줘.”
‘그래.’
의외로 말이 통하는 건가.
‘네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면 그때 깨게 해 줄게.’
이게 진짜.
‘너라면 잘할 수 있다고 했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너…… 오필리아지?”
‘이젠 네가 오필리아야.’
왜 이렇게 슬프게 들렸던 건지도.
‘나보다 잘할 수 있기를 기대할게.’
도대체 저 아이의 마지막 장은 뭐였을까. 생각하는 사이, 어두웠던 사방이 차츰 하얀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지 정도는 고르게 해 줄게.’
어차피 거절은 거절당한 것 같다. 내가 오필리아여야만 한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 당장 진지하게 생각하기엔 무리인데.
‘시간이 없어. 이게 내가 가진 힘의 마지막이야.’
빠르게 줄거리를 돌이켜 봐도, 딱히 끌리는 시점이 없다. 모든 걸 고치려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이전이어야만 한다.
“부왕이 죽기 전, 아니 병을 알았을 때! 아, 아니야. 모친이 죽기 전으로!”
‘그래.’
빛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 잘 부탁해. 열한 살의 오필리아. 부디…… 나보다는 나은 마지막 장을 찾을 수 있기를.’
신비롭고 슬픈 목소리와의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주 오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 혹시 내 기침 소리에 깼니?”
하얀 베일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기분 좋은 봄 공기와, 그보다 더 따스한 여인의 목소리.
“왜, 그러니? 무슨 꿈이라도 꿨어?”
그 목소리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거다. 왜냐면 현실의 자신에겐 이렇게 사랑스럽게 나란히 누워서 잠들 엄마 같은 거, 없었으니까.
“오필리아?”
여인의 파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이 여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오필리아의 모친이었던, 로잔틴의 신녀 갈라테아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가엾은 여자.
“그냥, 조금 이상한 꿈을…….”
“넌 아무래도 날 많이 닮았구나. 나도 어릴 때부터 꿈을 많이 꿨었지.”
갈라테아의 목소리 끝에 기침이 묻어난다. 저 병마가 곧 목숨마저 가져갈 것이다.
“저기…….”
막상 뭐라 호칭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갈라테아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둘만 있을 때는 엄마라고 불러도 된단다.”
대외적으로 오필리아는 왕비의 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왕궁 내에서 신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백금발과 벽안은 제국 내에서도 신녀의 일족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니까. 그 때문에 오필리아는 남의 눈을 피해 신궁에서 유폐되다시피 자라야 했다.
“콜록……!”
갈라테아가 괴로운 듯이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했다. 손수건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났다. 신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괜찮으니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어머니란 존재는 이런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오필리아가 걱정하지 않아도, 곧 나을 거란다.”
“거짓말.”
앳된 목소리에 갈라테아도 놀라고 오필리아도 놀랐다.
“지금 뭐라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시간도 없는데 시도라도 해 볼까. 가만히 있다가는 원작의 오필리아와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없을 테니까.
“미래를 봤어요.”
갈라테아는 분명 신력이 있었다. 아주 강하진 않았지만, 외적의 침입이나 큰 우환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통할 수도 있다.
“네겐 아직 그 정도의 신력이 없을 텐데. 게다가 신력이 개화하는 건 적어도 열넷은 되어야…….”
“꿈에서, 그러니까…….”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그래요, 미래의 내가 알려 줬어요. 꿈을 통해서.”
갈라테아가 물끄러미 어린 딸을 봤다. 역시, 이런 헛소리는 안 통하는 건가.
“분명…… 우리 조상님들 대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어라, 이거 잘하면 될 것 같은데.
“곧, 왕국에 재앙이 닥칠 거예요.”
곧이라는 건 거짓말이지만, 오필리아의 팔자가 그대로라면 이 왕국도 뻔하다.
“더 자세히 들려주겠니?”
“그러니까, 꿈에서 미래의 오필리아가 말했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이려나.
“미래의 네가? 뭐라고 했는데?”
“음…… 그게…….”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보렴.”
이제부터 원래의 오필리아는 사라진다. 이 막장 고구마 세계에서 사이다를 마실 수 있는 건 오로지 지금부터의 제 역량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래, 어차피 원작보다 최악일 수는 없다. 그러니 크게 던져 보기로 했다.
“나는, 여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