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로드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바보 같은 날 일부러 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 매력적이었다.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기분이 싫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희대의 카사노바가 분명했다.

“왜 그리 놀라요? 이런 건 아가씨가 날 유혹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로드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입가를 손으로 덮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난 유혹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거 이상하네요. 아가씨가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온 거였다니. 그럼 난 아가씨를 희롱한 죽일 놈이 되는 건가요? 난 아가씨가 그런 마음인 줄 알고 나름 자신 있게 유혹해 보려고 한 거였는데. 오해해서 미안해요.”

로드는 양산 속에서 빠져나가 조금 전 바닥에 떨어뜨렸던 미완성의 장신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어느새 흥미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장신구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었다. 나는 입에서 손을 내리고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뇨. 아뇨. 내가 미안하죠. 멋대로.”

“로드 씨.”

로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세공 작업을 하려는 듯했다. 내가 팔을 붙잡자 로드는 다시 웃으며 날 바라봤다.

“아가씨. 이제 여기 오지 말아요. 난 돼먹지 못한 놈이라 나랑 계속 만나면 아가씨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거예요.”

“내가 싫은가요?”

“이런…… 아가씨. 난 당신과는 다르게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할 자신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싫다는 게 아니라 챙기겠다는 거죠.”

그와 이름을 주고받은 밤 이후 내가 이곳에 발걸음한 지는 약 한 달 정도 되었다. 그는 줄곧 나를 그런 식으로 봐 왔던 걸까. 나는 어느새 차분해진 기분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의 팔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로드 씨는 무책임하네요.”

로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의아한 눈빛을 했다. 동그랗게 뜬 눈 안으로 보석처럼 박힌 연한 파랑 눈동자가 어렸을 적에 보았던 바다 빛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귀족이에요. 당신의 신분이 문제라는 건 아녜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나도 굳이 그런 것에 얽매이진 않아요. 그저 난 보통보다 엄한 교육을 받았고 흥미 위주로 이성을 만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가벼운 것을 경멸해요. 내 행동이 정숙하지 못했다면 그건 내 잘못이겠지만 곧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당신은 대체 저에 대해 얼마만큼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유혹하려 했던 건가요?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저 술자리에서 자랑거리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요?”

의자에서 일어나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거뒀다. 양산을 고쳐 쓰며 내려다보니 로드는 왠지 힘 빠진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로드 씨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그게 친구로서인지 당신이라는 남자에게 흥미를 느껴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확실하지 못해 미안해요.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당신을 오해하게 했다면 더욱 미안해요.”

“…….”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돌아섰다. 내일이면 또 여기에 올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내일이 되어도 로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 실망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에게 잘난 척 설교하긴 했지만 나 역시 그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용인들 쪽으로 걸어가며 아까부터 열이 오른 볼을 손등으로 눌렀다. 이 열은 금방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시장에 나온 사람들 틈을 조심스레 헤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와 손이 부딪히며 붙잡혔다. 손안에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로드가 서 있었다.

“놔요…….”

바로 그의 눈을 피하며 잡힌 손을 흔들어 빼내려고 했다. 로드는 나를 가려던 곳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언제 좌판을 걷었는지 그의 다른 손에는 장신구와 세공 용품을 담는 나무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가방 손잡이엔 조금 전까지 내가 앉아 있었던 천 의자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그가 걷는 대로 흔들렸다.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양산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가 멈춰 주지 않아서 미처 줍지 못한 채 계속 끌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저편에서 고용인들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어디 가는 거예요. 놔요.”

나는 그의 손을 떼 내려고 노력하며 작게 화를 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걸으며 들고 있던 나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당신을 이렇게 보내면 난 남자도 아니에요.”

“당신의 자존심엔 흥미 없어요.”

“내 자존심 문제가 아니에요. 아가씨 자존심이 문제죠.”

“무슨 말이에요?”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어요.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당신은 길거리 여자가 아닌데 그런 취급을 했으니. 내가 죽일 놈이에요. 그래도 싫어하지 말아 줘요. 내가 아가씨 같은 타입은 처음이라 좀 급했나 봐요.”

“급해요?”

로드는 날 돌아보았다가 곧 내 뒤쪽을 넘겨다보더니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다 갈림길로 들어섰고 골목 한구석에 날 밀어 넣으며 감추듯이 섰다. 그는 얼마 후에야 바깥쪽을 흘긋 보며 떨어졌다. 고용인들을 완전히 따돌린 것 같았다. 로드는 잠시 끊겼던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 갔다.

“네, 급했어요.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간만 보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간?”

“한 달 동안 아무 짓도 않고 간만 봤잖아요? 난 내 인내심에 새삼 놀랐어요.”

“그게 놀랄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당신이 나는 더 놀랍다고 생각해요.”

“왜요?”

“내 전 약혼자가 들었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거예요. 그는 1년을 넘게 구애하며 내 마음을 열었거든요.”

그 순간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자신에게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로드는 눈썹을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약혼자? 아가씨. 혹시 일부러 점잔 빼며 날 가지고 놀았던 건가요? 결혼 전에 좀 놀아 보자는 생각? 이야. 이거 정말 몹쓸 아가씨네. 어째 방금까지 죄책감 들었던 게 싹 날아가네요?”

“괜한 트집 잡지 말아요. 전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파혼한 상태예요.”

입가에서 손을 떼고 조금 불퉁하게 대꾸하자 로드가 빙긋 웃었다. 그제야 그가 날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였음을 깨닫고 조용히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감쌌다. 로드가 손가락을 뻗어 내 심장 부근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아가씨는 왠지 늘 힘이 없어 보여요. 혹시 그 전 약혼자 때문이라면 가슴에 담아 두지 말고 누구라도 이용해 치유해요. 속병은 약도 없다잖아요.”

로드는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 잡으라는 듯 내밀고는 새삼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약간 굽혔다.

“일단 당신의 취향을 따라 줄게요. 가벼운 게 싫다니 다짜고짜 내 집에 끌고 가서 넘어뜨릴 수도 없고. 사실 방금까진 그럴 셈이었지만 생각이 변했어요.”

“뭐라고요?”

“방금까지라고 했잖아요. 화내지 말아요. 일단 기분 좀 풀 겸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리고 낡고 시끄러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다 밤이 되면…….”

“되면?”

“그땐 아가씨의 선택에 맡길게요. 집에 간다 하면 데려다줄 것이고 나와 아침까지 있고 싶다 한다면 최선을 다해 봉사할게요. 아가씨가 말하는 책임에 대해선 여전히 뭐라 약속할 수 없지만요.”

“제멋대로네요.”

“네, 맞아요. 그래도 나는 꽤 매너가 좋은 편이라고요?”

“당장 집에 가고 싶어졌어요.”

“내 집에요?”

“내 집에요.”

그는 손을 내민 채로 소리 내 웃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나답지 않게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어 그 손을 잡았다. 그는 잡아 줘서 고맙다며 신사처럼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드는 겪을수록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약 두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하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대화를 이끄는 로드는 시골 출신 같지 않게 생각과 감성이 풍부해 나로 하여금 절로 귀를 기울이게 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예의 그 소란스럽고 낡은 술집에 들어갔고 로드는 이번엔 우유가 아닌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곤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조금 취해 어지러울 즈음이 되자 술집에선 문득 소란스러운 파티가 열렸다. 로드는 날 테이블 위에 끌어 올렸고 나는 그 품에 안겨 빙글빙글 춤을 추게 되었다.

산책 중엔 점잖은 신사처럼 나를 편안하게 했으면서 술집에서 춤을 출 때는 자유로운 거리의 남자처럼 나를 흥분시켜 들뜨게 했다. 단언하건대 근래 들어 가장 즐거운 하루였다.

“술 많이 안 마셨죠?”

“네.”

술집을 나선 건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양손을 뒤로 해 깍지를 꼈다. 그제야 뭔가 어색한 기분에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쩔래요?”

집에 가고 싶냐고 묻는 로드에게 솔직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고 싶지 않았다. 집은 답답했다. 언니의 빈방을 지나칠 때면 숨이 막혔고 안절부절못하며 감시하듯 과보호하는 부모님도 힘들었다.

잠잘 때조차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고용인에 살이 쳐진 감옥 같은 창문 역시. 혼자선 마음대로 정원 산책마저 할 수 없는 그곳은 나 자신이 만들어 끓이고 있는 지옥의 냄비였다.

“가고 싶지 않아요.”

로드는 가방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그는 잠시 날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은 점점 힘이 들어가 나는 곧 뒤꿈치를 들 정도로 끌어 올려졌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가 내 혀를 길게 쓸어내렸고 왠지 허리 아래가 묘하게 욱신대는 기분이 들었다. 이성이 흐려지면서 이대로 로드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얼마 후 그가 겨우 입술을 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외로워요. 아가씨.”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마주 보다 이마를 기대 오며 속삭여 물었다.

“나는, 많이 외로워요. 아가씨는 어때요?”

“……나도 외로워요.”



그의 집까지도 갈 수 없었다. 로드가 날 이끌고 간 곳은 도시의 한 여관이었다. 열쇠를 받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가방을 내팽개쳤다. 로드는 내게 입을 맞추며 벽으로 밀치듯 몰았다. 그의 손이 내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어깨 뒤로 벗겨 냈고 곧 그는 입술을 떼며 날 보고 웃음 지었다.

“철저하게 갖춰 입었네요.”

“…….”

“벗기다가 날 새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로드는 내 스커트 버클을 풀었다. 실크 재질의 긴 스커트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가 몇 겹이나 갖춰 입은 옷가지들을 거침없이 벗겨 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속옷 차림이 되어 있었다. 로드는 단번에 나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고 그대로 내 몸에 올라타서는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드는 맨몸이 되자 내 입술과 볼, 그리고 눈꺼풀에 연이어 키스했다. 그리고 턱을 타고 내려가 맥이 뛰는 목덜미를 길게 빨아 당겼다.

그는 부드럽게 내 양어깨를 어루만지다 브라 끈을 내렸고 이어 등 뒤의 고리를 풀었다. 완전히 벗겨 낸 브라가 침대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가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추며 가슴 근처를 손으로 더듬었다.

로드는 내 가슴골을 혀로 핥아 내려오며 두 손으로 각각 내 가슴을 감싸 쥐었다. 쓸고 내려가는 혀가 배꼽에 다다랐을 즈음 그의 손가락이 유두를 여러 번 비틀었다가 놓았다.

문득 그가 상체를 세우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내 다리를 들어 팬티를 벗겨 내더니 자기 몸을 사이에 두고 무릎을 벌리게 했다. 그의 손 하나가 다가와 비부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절로 숨이 차올라 괴로워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