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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자요.”
세공사가 내미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컵 안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가 가득 차 김이 오르고 있었다. 세공사는 술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좀 괜찮아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왜인지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아 다시 다물었다. 그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세히 나를 살폈다.
“얼굴이 파랗네. 아까 보니 도망치는 것 같던데, 희롱이라도 당했던 거예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상당히 꼴사나울 것이 분명해 부끄러웠다. 물러난 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웃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고 더럽고 시끄러운 술집 안은 사람들이 많았다. 구석에서 도박 내기를 하는 남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외간 남자의 다리에 앉아 크게 웃는 여자,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여자들, 구역질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남자, 웃는 남자, 웃는 여자, 우는 남자, 우는 여자.
온갖 군상들이 이 좁은 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내 꼴 역시 이 군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스며든 것 같아 그제야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슬그머니 우유 컵을 들어 혀로 홀짝였다.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보네요.”
“네?”
고개를 들자 세공사는 싱긋 웃으며 자기 귀를 가리켰다.
“페리도트.”
“아…… 음…… 네.”
별로 도움 되지 않았어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탁자에 팔을 기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예요? 난 로드예요.”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그는 눈을 몇 번 끔벅거리다 난처하게 웃었다.
“얼마 전 시골에서 올라왔거든요. 살아오는 줄곧 귀족의 그림자도 못 본 촌스런 놈이라 잘 모르겠네요. 어느 쪽이 이름이에요?”
“제이…… 아니, 데본이라고 불러요.”
통상적인 이름을 알려 주려다가 생각을 바꿔 가까운 사이에만 부르는 이름을 알려 주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긴장 없는 술집의 분위기에 덩달아 맥이 풀린 탓이었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듯 중얼중얼 몇 번인가 반복해서 읊었다. 약간 내리깔린 로드의 눈이 어딘지 깊어 보였다.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로드는 금세 다시 웃음 지었다.
“네. 일 때문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에요. 조만간 다시 돌아가야죠.”
“어디 사는데요?”
“엄∼청 시골이요. 별로 재미없는 곳이에요. 말해도 모를걸요. 역시 수도가 좋죠.”
로드는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비우기 위해 잔을 들었다. 그가 술을 넘기며 고개를 젖히자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어중간한 노랑머리가 목 뒤로 쓸려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뺏겼다.
술잔을 잡은 커다란 손이며 넓은 어깨에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이미지는 날렵하다 생각했는데 잘 뜯어보니 의외로 막노동을 하는 사람처럼 근육질이었다. 희멀건한 귀족들과 달리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려 있는 로드의 피부는 단단해 보였다. 바로 저런 게 남자답다는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로드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왜요? 내가 멋있어요?”
장난스럽게 물은 그는 점원에게 술 한 잔을 더 부탁했다. 금방 술이 가득 찬 컵이 나오고 빈 컵은 치워졌다. 로드는 손에 턱을 괴고 다시 나와 마주 보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내가 쑥스럽잖아요.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여요.”
“그건 아니에요.”
“우와.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거 아녜요? 가슴에 스크래치가…….”
로드는 상처받았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가슴을 짚었다. 그제야 약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멋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매력적인 거 같아요.”
로드는 웃음기를 거두고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금세 찡그리듯 웃었다.
“아가씨. 설마 진심으로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맘이 없으면 유혹하지 말아요.”
“놀랍네요. 당신은 저를 상대로 그런 맘이 든다는 건가요?”
로드는 내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오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 무슨 자격지심 있어요? 아가씨는 객관적으로 봐도 이미 충분히 미인이고 매력적이에요. 물론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에 비해 키가 크고 골격이 좋아 보이긴 해요. 약간 튀어 보이긴 하지만 그건 아가씨 개성이잖아요. 뭐가 나빠요? 늘씬하니 비율 좋네요, 뭐. 그리고 사실 난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여자보단 당신같이 뼈대가 묵직한 여자가 힘 조절 하지 않아도 되니 만족스럽게 안는 맛이 있는 데다, 아가씨 같은 타입이 체력적으로도…….”
“아, 저기. 그만. ……그만해요.”
이 정도면 이미 희롱의 언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왜인지 로드에겐 불쾌감보단 단순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열정적인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다 못해 테이블을 완전히 건너올 것 같은 로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막았다. 로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먼저 시작할 땐 언제고 치사하게 내빼는 거예요? 우와. 아가씨 되게 못됐네.”
“큼…… 음. 미안해요.”
왜 내가 사과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좀 진정시키고 싶었다. 어느새 화끈거려 오는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로드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가 아가씨네 집이에요? 엄청 크네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로드는 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생각보다 술집에서 집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마차로 다니던 길을 걸어와서인지 조금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오는 내내 로드가 이런저런 대화거리로 지루하지 않게 해 줘서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용인이 열어 주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다 로드를 돌아보았다.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로드는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고는 돌아섰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달려왔다. 빈 마차로 돌아온 마부에게서 어디까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걱정을 많이 한 듯했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느냐고 물으며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먹였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 마주쳤던 사실에 대해 지금은 그리 큰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엔 미칠 것 같았지만 로드 덕분에 거의 다 잊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신기했고 로드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외출이 잦아졌다. 귀족들의 사교 파티가 아닌 시장 골목에 있는 로드의 좌판으로 매일같이 향했다. 하는 것도 없이 옆에 무료하게 앉아 있을 뿐인 내가 부담스러울 법한데도 로드는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게 다였다.
오늘도 양산을 쓰고 나타난 나를 보고 로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리본 풀렸어요.”
“네?”
로드가 제 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바로 목 부근을 더듬자 블라우스 칼라 위로 묶었던 리본이 풀려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양산을 어깨에 걸쳐 고개로 받치고 남청색의 가는 리본을 고쳐 맸다. 로드는 그런 날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매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어쩌고 혼자예요?”
“저쪽에요.”
골목 끝자락을 가리켰다. 고용인들은 그곳에서 나와 로드를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의 장사가 방해될까 봐 거기 있으라고 했다. 로드는 잠시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 내게 눈을 돌렸다.
“부모님이 뭐라 안 해요?”
“왜요?”
“귀한 아가씨가 이런 데 자꾸 오고 그러면 부모님이 싫어할 것 같은데.”
“싫어하지 않아요.”
로드가 내어주는 작은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오늘도 손님이 없을 때는 틈틈이 장신구를 만드는 그를 곁에서 구경했다.
“시골엔 언제 내려가요?”
“음∼ 글쎄요? 같이 왔던 친구들이 돌아와야 갈 텐데 좀처럼 연락이 없네요. 왜요?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
“네.”
장신구를 깎으며 심드렁하게 말 상대를 해 주던 로드가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냐고 묻자 로드는 눈가를 약간 찡그렸다 펴며 물었다.
“아가씨. 나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아요.”
“아니, 나 좋아하냐고요.”
“싫어하진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로드가 생각에 빠지듯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그는 무릎에 팔을 걸치더니 아직 만들다 만 장신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다시 그의 눈길이 날 향했다.
“아가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네.”
“여기는 왜 자꾸 오는 거예요?”
“만나고 싶어서요.”
“나를요?”
“네.”
“왜요?”
“편해서요.”
“집은 불편해요?”
“네.”
“친구는요?”
“없어요.”
로드는 손톱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나도 솔직하게 말할까요?”
“원한다면 그러도록 해요.”
“나는 아가씨가 편하지 않아요.”
그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얼굴이 너무나 화끈거려 와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로드가 내 손목을 잡아 다시 끌어 앉혔다.
“끝까지 들어요.”
“…….”
“난 젊은 남자고 아가씨는 젊은 여자예요. 신분이나 삶의 방식을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원래 불편해야 하는 거예요. 알아듣겠어요?”
“……조금요.”
“조금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아줘요. 그냥 노골적으로 말할게요. 난 수컷이고 당신은 암컷이라는 사실이 문제란 거예요. 아가씨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나타나 이렇게 주변에 얼쩡거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이라도 해 봤어요?”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로드는 고용인들을 세워 둔 골목 끝을 흘긋 보더니 갑자기 양산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놀라서 몸을 뒤로 빼려 하자 그는 재빨리 내 손목을 잡아채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들고 있던 장신구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가씨는 지금 날 꼬시고 있는 거라고요.”
로드와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긴장과 당황스러움으로 손에서 땀이 났고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바보처럼 굳어 있었다.
“아가씨.”
로드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여 물었다.
“이래도 내가 편해요?”
그의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들러붙듯 닿았다. 똑바로 마주친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막, 편하지 않아졌어요.”
더듬더듬 나오는 내 대답에 로드는 눈웃음을 쳤다. 곧 로드의 입술이 내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놀라 헛숨을 삼키며 그를 뿌리쳤다. 로드는 순순히 놓아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할 말을 잃고 손으로 입가를 덮은 채 로드를 멍하게 쳐다봤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입이 뭐라 떨어지질 않았다. 그냥 그가 너무 멋있게 보일 뿐이라 당황스러웠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괴로움에 우울해야 맞았다. 벌써 그 사람을 잊고 다른 이에게 설레는 건 정숙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부정을 저지른 것과는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아무리 나를 자책해도 똑바로 다잡을 수가 없었다. 다잡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다.
혹시 나는 내 아픔을 잊으려고 일부러 로드에게 반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신빙성이 있는 것도 같다. 나도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로드에게 너무 쉽게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요.”
세공사가 내미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컵 안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가 가득 차 김이 오르고 있었다. 세공사는 술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좀 괜찮아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왜인지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아 다시 다물었다. 그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자세히 나를 살폈다.
“얼굴이 파랗네. 아까 보니 도망치는 것 같던데, 희롱이라도 당했던 거예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상당히 꼴사나울 것이 분명해 부끄러웠다. 물러난 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웃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고 더럽고 시끄러운 술집 안은 사람들이 많았다. 구석에서 도박 내기를 하는 남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외간 남자의 다리에 앉아 크게 웃는 여자,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여자들, 구역질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남자, 웃는 남자, 웃는 여자, 우는 남자, 우는 여자.
온갖 군상들이 이 좁은 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내 꼴 역시 이 군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스며든 것 같아 그제야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슬그머니 우유 컵을 들어 혀로 홀짝였다.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보네요.”
“네?”
고개를 들자 세공사는 싱긋 웃으며 자기 귀를 가리켰다.
“페리도트.”
“아…… 음…… 네.”
별로 도움 되지 않았어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탁자에 팔을 기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예요? 난 로드예요.”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그는 눈을 몇 번 끔벅거리다 난처하게 웃었다.
“얼마 전 시골에서 올라왔거든요. 살아오는 줄곧 귀족의 그림자도 못 본 촌스런 놈이라 잘 모르겠네요. 어느 쪽이 이름이에요?”
“제이…… 아니, 데본이라고 불러요.”
통상적인 이름을 알려 주려다가 생각을 바꿔 가까운 사이에만 부르는 이름을 알려 주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긴장 없는 술집의 분위기에 덩달아 맥이 풀린 탓이었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듯 중얼중얼 몇 번인가 반복해서 읊었다. 약간 내리깔린 로드의 눈이 어딘지 깊어 보였다.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로드는 금세 다시 웃음 지었다.
“네. 일 때문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에요. 조만간 다시 돌아가야죠.”
“어디 사는데요?”
“엄∼청 시골이요. 별로 재미없는 곳이에요. 말해도 모를걸요. 역시 수도가 좋죠.”
로드는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비우기 위해 잔을 들었다. 그가 술을 넘기며 고개를 젖히자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어중간한 노랑머리가 목 뒤로 쓸려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뺏겼다.
술잔을 잡은 커다란 손이며 넓은 어깨에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이미지는 날렵하다 생각했는데 잘 뜯어보니 의외로 막노동을 하는 사람처럼 근육질이었다. 희멀건한 귀족들과 달리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려 있는 로드의 피부는 단단해 보였다. 바로 저런 게 남자답다는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로드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왜요? 내가 멋있어요?”
장난스럽게 물은 그는 점원에게 술 한 잔을 더 부탁했다. 금방 술이 가득 찬 컵이 나오고 빈 컵은 치워졌다. 로드는 손에 턱을 괴고 다시 나와 마주 보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내가 쑥스럽잖아요.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여요.”
“그건 아니에요.”
“우와.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거 아녜요? 가슴에 스크래치가…….”
로드는 상처받았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가슴을 짚었다. 그제야 약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멋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매력적인 거 같아요.”
로드는 웃음기를 거두고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금세 찡그리듯 웃었다.
“아가씨. 설마 진심으로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맘이 없으면 유혹하지 말아요.”
“놀랍네요. 당신은 저를 상대로 그런 맘이 든다는 건가요?”
로드는 내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오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 무슨 자격지심 있어요? 아가씨는 객관적으로 봐도 이미 충분히 미인이고 매력적이에요. 물론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에 비해 키가 크고 골격이 좋아 보이긴 해요. 약간 튀어 보이긴 하지만 그건 아가씨 개성이잖아요. 뭐가 나빠요? 늘씬하니 비율 좋네요, 뭐. 그리고 사실 난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여자보단 당신같이 뼈대가 묵직한 여자가 힘 조절 하지 않아도 되니 만족스럽게 안는 맛이 있는 데다, 아가씨 같은 타입이 체력적으로도…….”
“아, 저기. 그만. ……그만해요.”
이 정도면 이미 희롱의 언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왜인지 로드에겐 불쾌감보단 단순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열정적인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다 못해 테이블을 완전히 건너올 것 같은 로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막았다. 로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먼저 시작할 땐 언제고 치사하게 내빼는 거예요? 우와. 아가씨 되게 못됐네.”
“큼…… 음. 미안해요.”
왜 내가 사과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좀 진정시키고 싶었다. 어느새 화끈거려 오는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로드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가 아가씨네 집이에요? 엄청 크네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로드는 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생각보다 술집에서 집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마차로 다니던 길을 걸어와서인지 조금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오는 내내 로드가 이런저런 대화거리로 지루하지 않게 해 줘서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용인이 열어 주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다 로드를 돌아보았다.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로드는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고는 돌아섰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달려왔다. 빈 마차로 돌아온 마부에게서 어디까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걱정을 많이 한 듯했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느냐고 물으며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먹였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 마주쳤던 사실에 대해 지금은 그리 큰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엔 미칠 것 같았지만 로드 덕분에 거의 다 잊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신기했고 로드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외출이 잦아졌다. 귀족들의 사교 파티가 아닌 시장 골목에 있는 로드의 좌판으로 매일같이 향했다. 하는 것도 없이 옆에 무료하게 앉아 있을 뿐인 내가 부담스러울 법한데도 로드는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게 다였다.
오늘도 양산을 쓰고 나타난 나를 보고 로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리본 풀렸어요.”
“네?”
로드가 제 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바로 목 부근을 더듬자 블라우스 칼라 위로 묶었던 리본이 풀려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양산을 어깨에 걸쳐 고개로 받치고 남청색의 가는 리본을 고쳐 맸다. 로드는 그런 날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매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어쩌고 혼자예요?”
“저쪽에요.”
골목 끝자락을 가리켰다. 고용인들은 그곳에서 나와 로드를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의 장사가 방해될까 봐 거기 있으라고 했다. 로드는 잠시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 내게 눈을 돌렸다.
“부모님이 뭐라 안 해요?”
“왜요?”
“귀한 아가씨가 이런 데 자꾸 오고 그러면 부모님이 싫어할 것 같은데.”
“싫어하지 않아요.”
로드가 내어주는 작은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오늘도 손님이 없을 때는 틈틈이 장신구를 만드는 그를 곁에서 구경했다.
“시골엔 언제 내려가요?”
“음∼ 글쎄요? 같이 왔던 친구들이 돌아와야 갈 텐데 좀처럼 연락이 없네요. 왜요?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
“네.”
장신구를 깎으며 심드렁하게 말 상대를 해 주던 로드가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냐고 묻자 로드는 눈가를 약간 찡그렸다 펴며 물었다.
“아가씨. 나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아요.”
“아니, 나 좋아하냐고요.”
“싫어하진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로드가 생각에 빠지듯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그는 무릎에 팔을 걸치더니 아직 만들다 만 장신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다시 그의 눈길이 날 향했다.
“아가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네.”
“여기는 왜 자꾸 오는 거예요?”
“만나고 싶어서요.”
“나를요?”
“네.”
“왜요?”
“편해서요.”
“집은 불편해요?”
“네.”
“친구는요?”
“없어요.”
로드는 손톱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나도 솔직하게 말할까요?”
“원한다면 그러도록 해요.”
“나는 아가씨가 편하지 않아요.”
그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얼굴이 너무나 화끈거려 와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로드가 내 손목을 잡아 다시 끌어 앉혔다.
“끝까지 들어요.”
“…….”
“난 젊은 남자고 아가씨는 젊은 여자예요. 신분이나 삶의 방식을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원래 불편해야 하는 거예요. 알아듣겠어요?”
“……조금요.”
“조금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아줘요. 그냥 노골적으로 말할게요. 난 수컷이고 당신은 암컷이라는 사실이 문제란 거예요. 아가씨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나타나 이렇게 주변에 얼쩡거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이라도 해 봤어요?”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로드는 고용인들을 세워 둔 골목 끝을 흘긋 보더니 갑자기 양산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놀라서 몸을 뒤로 빼려 하자 그는 재빨리 내 손목을 잡아채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들고 있던 장신구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가씨는 지금 날 꼬시고 있는 거라고요.”
로드와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긴장과 당황스러움으로 손에서 땀이 났고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바보처럼 굳어 있었다.
“아가씨.”
로드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여 물었다.
“이래도 내가 편해요?”
그의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들러붙듯 닿았다. 똑바로 마주친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막, 편하지 않아졌어요.”
더듬더듬 나오는 내 대답에 로드는 눈웃음을 쳤다. 곧 로드의 입술이 내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놀라 헛숨을 삼키며 그를 뿌리쳤다. 로드는 순순히 놓아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할 말을 잃고 손으로 입가를 덮은 채 로드를 멍하게 쳐다봤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입이 뭐라 떨어지질 않았다. 그냥 그가 너무 멋있게 보일 뿐이라 당황스러웠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괴로움에 우울해야 맞았다. 벌써 그 사람을 잊고 다른 이에게 설레는 건 정숙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부정을 저지른 것과는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아무리 나를 자책해도 똑바로 다잡을 수가 없었다. 다잡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다.
혹시 나는 내 아픔을 잊으려고 일부러 로드에게 반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신빙성이 있는 것도 같다. 나도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로드에게 너무 쉽게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