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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마음뿐 아니라 손목 또한 서럽도록 아팠다. 살아 있기에 느껴지는 고통이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사실 손목을 그어야겠다 생각했던 건 한순간이고, 그 한순간에 날 막을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그 행동에 후회라곤 한 점 들지 않았다. 후회가 남아 있다면 그대로 죽지 못하고 생을 연명해 버린 내 한심함 때문이다.

패닉에 빠진 나는 격렬했고 극단적이었으며 나약했다. 지금 역시 어느 것 하나 견뎌 낼 힘이 없었다.

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토해 내듯이 울었지만 가슴에 담긴 먹먹함은 전혀 시원해지질 않았다.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꽉 채워 숨이 막히게 했다.

좀 더 숨을 쉬고 싶은데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번번이 막혔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왔다. 여기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죽을 것 같자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한심한 내가 우습고도 슬펐다.

부축하려는 고용인들을 힘없는 손길로 내치곤 스스로 방을 나섰다. 눈앞이 흔들려 다리가 자꾸 풀렸지만 난간을 붙잡고 꿋꿋이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서 서성이고 있던 부모님이 날 발견하고 놀라 다가왔다.

“데본…….”

“놔!”

두 분의 손길마저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지르며 뿌리쳤다.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 내 모습은 처음일 부모님은 그저 안절부절못했다. 안타까이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을 피하며 현관문을 열고 정원 마당으로 나갔다.

닫혀 있는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는 날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아아!”

아무래도 나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대문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부모님의 경악성과 잡으라는 외침이 들렸다.

대문의 창살을 잡고 흔들자 고용인들이 내 팔과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온 힘을 다해 창살을 잡고 버티며 소리를 질렀다.

“놔! 놔아!”

아가씨. 아가씨. 그들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들리지 않는 척 도리질을 치며 비명만 내질렀다. 문밖에 있던 마부가 질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마치 저 집이 지옥에서 펄펄 끓는 냄비가 되어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보였다. 정말 끔찍했다.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응…….”

그날 이후로 방을 나갈 수 없었다. 기분이 좀 가라앉자 사고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차라리 의지를 놓아 버렸다. 고용인들이 입혀 주고 꾸며 주는 대로 가만히 백치처럼 지냈다.

고용인이 평소에 내가 눈길도 주지 않던 하얀 레이스 머리 끈을 들이대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 예쁘게 됐어요.”

고용인들은 나를 세 살배기 어린애 다루듯 했다.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따랐다. 사실 그건 어느 쪽이든 못할 짓이었지만 나도 그들도 금방 그럭저럭 적응해 유치한 소꿉놀이 같은 일상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그런 멍청한 나날을 용케 참아 낼 수 있었던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와 그 사람만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참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가지 않아 끝났다.

어느 날 생각 없이 창밖을 봤다가 그 사람이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걸 발견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2층에서 떨어져 혼미한 시야로 그 사람이 날 향해 뛰어오는 것을 바라보다 정신을 잃었다. 그 결과 가벼운 뇌진탕에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부모님이 고한 파혼의 절차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자 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이 집에 발을 들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내 꼴을 본 아버지는 그 사람을 대문 안으로 들였던 걸 후회했다. 어차피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그가 와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 만했다. 평소엔 커튼을 치고 지내다 그날따라 변덕으로 커튼을 열어 두었던 것뿐이다. 우습게도.

얼마 안 가 언니는 자길 쫓아다니는 남자 중 하나를 골라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집을 나가게 되었다. 언니의 결혼식 날까지도 몸이 낫질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였다 해도 참석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언니와는 자살 기도 직후에 방에서 잠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집에서 언니가 사라지고 나서야 조금씩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어디를 가든 고용인들을 대동해야 했지만 집 안 분위기는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가누게 되었을 때는 마당에도 나갈 수 있었다. 분수에서 잠깐씩 물장난을 할 뿐 지난날처럼 대문을 향해 도망치듯 달려가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런 극단적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던 것 같다. 그냥 기운이 없고 멍했다.

시간이 더 지나자 부모님이 외출을 허락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래도 뒤에 딸려 오는 고용인들을 떼어 낼 순 없었다.

시장에 나가 물건들을 구경하다 장신구가 늘어진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중에 머리 장식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좌판 주인으로 보이는 노랑머리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그거 예쁘죠?”

장신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네. 예쁘네요.”

“그죠? 그거 사 가요.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요.”

“얼만데요.”

우울한 내 목소리에도 남자는 아랑곳없이 시원스레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0실버.”

“수공품인데 왜 그렇게 싸요.”

그는 내 물음에 기운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답했다.

“간판이 없어서 그래요. 아가씨 같은 귀족은 당연하다는 듯 간판 있는 가게로만 가니까요.”

“그렇군요.”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않았다. 남자는 두 손에 턱을 괴며 다시 싱긋 웃었다.

“하지만 시장표도 제법 괜찮죠? 싸구려라고 그냥 가지 말고 하나 사 가 보세요. 아가씨 친구들한테도 추천해 주면 더 좋고요.”

“난 친구가 없어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말해 주곤 고용인에게서 지갑을 받아 1골드짜리 지폐를 꺼냈다. 그것을 건네자 남자는 거슬러 주려는 듯 주머니를 뒤적였다. 거스름돈은 됐다 말하며 다리를 세웠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올려보았다.

“어?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술 한 잔 더 사 마시도록 해요.”

“어…… 고마워요.”

고용인에게 지갑을 건네며 방금 산 장신구를 머리에 달아 달라고 했다. 고용인은 반 묶어 둥글게 틀어 올린 내 머리에 장신구를 꽂아 주었다. 손으로 장신구를 더듬더듬 만지며 남자에게 물었다.

“어울리나요?”

“정말 잘 어울려요.”

남자가 웃으며 답했다. 입에 발린 말이란 걸 알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아 약간 웃었다. 많이 팔라는 덕담을 하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 남자가 외쳤다.

“다음에 또 오세요!”

집에 돌아가니 내 앞으로 온 서신이 있었다. 파티 초대장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자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안 가도 돼.”

어머니를 슬쩍 보았다가 좀 더 생각해 보겠다 대답하곤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초대장을 살펴보았다. 귀족들의 파티 따위야 시도 때도 없이 열렸지만 언니 없이 초대받아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대한 사람의 이름은 카멜 드 로라 엘리사.

몇 번 들은 것도 같은데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고 파티는 당장 내일 저녁이었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거예요, 가기 싫다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다음 날 또 그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아 장신구들을 구경했다. 좌판 주인이자 세공사인 노랑머리 남자는 파티에 가긴 가야 할 것 같은데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내 말에 상당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공사는 문득 좌판 위에서 연두색 보석이 박힌 귀걸이 한 쌍을 집어 내밀었다.

“……?”

“이게 페리도트라는 거예요. 온갖 근심 걱정은 물론이고 다가오는 나쁜 미래들도 모두 물리쳐 준다는 액막이 보석이죠. 어때요?”

“이걸 하고 가라고요?”

“네.”

그가 천생 장사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설핏 웃음이 났다. 가격을 묻자 세공사는 고개를 젓더니 전날 주지 못한 거스름돈으로 판 셈 친다며 흔쾌히 그것을 건넸다. 두 손으로 귀걸이를 받으며 약간 웃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세공사는 성격 좋은 얼굴로 싱그럽게 웃었다.



집에 돌아간 뒤에도 계속 갈팡질팡하다 저녁이 되어서야 파티에 가기로 결심했다. 세공사가 준 페리도트 귀걸이를 하고 아는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튀진 않지만 유행엔 뒤처지지 않을 무난한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파티장에서 몇몇 손님들이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했으나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 미소 지으며 눈인사를 건네 왔다. 나 역시 눈짓으로만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긴장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귀걸이로 손이 갔다.

저들이 나를 보고 뒤에서 뭐라 수군거릴지 무섭고 불편했다. 티 나지 않도록 작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뗐지만 이내 발을 멈췄다.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목뒤가 뻐근해지며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제자리에 서서 잠시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카멜 저택을 빠져나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스트레스에 어지럼증마저 느끼며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냥 돌아가자. 역시 파티는 싫어. 오는 게 아니었어.

후회를 하며 다급히 발걸음을 뗐다. 금세 대문을 벗어나 타고 온 마차를 찾으려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다른 마차 한 대가 달려와 멈춰 섰다. 놀라 바로 뒷걸음질 쳤다. 잠시 가슴을 짚고 심호흡을 하다가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에 꽂아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마차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 지나치려 했지만 얼굴을 보고 말았다. 상대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었다. 금세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고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나를 향해 그가 뭐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리곤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다. 뒤에서 내 이름을 외쳐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양손으로 귀를 막고 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데본! 데본! 잠깐! 잠깐만!”

그가 내 뒤를 쫓아 달려왔다. 그럴수록 치밀어 오르는 이 미칠 것 같은 새까만 감정에 내몰려 달리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끔찍해. 끔찍해!

마차가 다니는 넓은 길을 가로질러 건너다 카멜가의 파티장으로 가는 듯한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걸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멈출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절로 발이 멈췄다. 그 사람이 달려오며 뭐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길 한복판에 서서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어이쿠.”

그때 누군가 내 팔을 붙잡더니 세게 끌어당겨 완전히 길을 건너게 했다. 쫓아오던 그 사람과는 뒤늦게 억지로 멈춰 서는 마차를 사이에 두고 갈라졌다. 나는 순식간에 건너편의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가씨. 괜찮아요?”

어스름한 불빛에 비친 노랑머리는 본래보다 어두운 색으로 보였다. 인상 역시 음영 때문에 낮과 달라 보여 한순간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방 기억해 냈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가. 한동안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남자는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손바닥을 펼쳐 내 눈앞에 몇 번 흔들었다.

“아가씨. 나 누군지 알겠어요?”

남자는 시장에서 장신구를 팔던 세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