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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5화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 (2)





레오의 말대로 가볍게 틀어 올린 머리를 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에스테일의 지나치게 길고 풍성한 머리채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틀어 올리려 하니 아무리 보아도 ‘짊어진 머리카락이 무겁겠다’ 싶어 보이는 머리 모양밖에 나오질 않았다. 결국 적당히 타협하고 에스테일은 머리를 반듯하게 묶고는 짙푸른 리본을 달아 장식했다.

레오까지 격식에 맞는 깨끗한 옷을 입게 하고서, 에스테일이 레오를 이끌고 향한 곳은 대도시 중심부의 어느 저택이었다. 이래 봬도 주거지가 아니라 상업 시설이라고 에스테일은 귀띔해 주었다. 입구에서 경비병이 몸수색을 했다. 마법사인 에스테일은 경비병에게 지팡이를 맡기고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집사인지 접수원인지 모를, 외알 안경을 낀 사람이 둘을 맞이했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의뢰입니다.”

“주인 어른께서는 금일 중은 손님맞이가 어려우십니다.”

“재미있을 만한 일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외알 안경을 낀 직원이 까만 가죽 표지로 장정된 노트를 잠시 뒤적였다. 집주인의 일정을 다시 검토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픔을 먹는 자, 대마법사 유리스티스.”

“…….”

직원이 피곤한 눈으로 에스테일을 빤히 보았다. ‘손님, 실례지만 바빠 죽겠는데 같잖은 농담은 삼가 주십시오’라고 소리 없이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에스테일이라는 무소속 마법사입니다.”

“예,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2층으로 올라갔던 직원이 금세 다시 내려와 에스테일과 레오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도금된 계단 난간이 타오르는 램프 조명 아래에서 번쩍거렸다. 손을 댔다간 금가루가 벗겨질 것만 같아 레오는 난간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직원이 거대한 접견실의 문을 우아하게 소리 없이 열었다. 문 테두리에 둘러진 에메랄드 장식이 한순간 사르륵, 다양한 각도로 빛을 반사하며 아름답게 반짝였다.

“졸텍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스테일이 접견실로 들어가며 인사했다. 호화찬란한 대저택의 주인이라 막연히 술살이 찐 탐욕스러운 인상의 중년이려니 했는데, 막상 보니 집주인은 온화한 기품이 서린 노신사였다. 마르고 작은 체구는 허약하지만 균형 잡혀 보였고, 잘 빗어 정리한 은발도 단정했다. 학자 특유의 분위기가 졸텍이라는 노신사의 회색 눈동자에 감돌았다.

“어서 오게나, 아이아드. 근 20년 만이지 않나.”

“20년이나 되었습니까? 지금은 에스테일입니다.”

“어련하겠나. 직성 풀리는 대로 사셔야지, 아이아드.”

“에스테일입니다. 바쁘실 텐데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불쑥 찾아온 건 상관없네만 재미없는 일거리를 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노신사는 껄껄 웃었다. 에스테일은 미소 지었다.

“따라온 청년은 제자인가?”

“짐꾼입니다. 얼마 전에 고용했습니다.”

“흠, 그래, 짐꾼도 들어와 편히 앉으라고 하게.”

넓은 마호가니 책상을 사이에 두고 에스테일은 노신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오는 조심스레 에스테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차를 내어 주며 노신사가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재미있는 소릴 하는 건 변하질 않는구만. 접수원더러 ‘대마법사 유리스티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지.”

“하하.”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자네는 그런 농담을 했었지. 그게 벌써 40년 전이던가. 그때만 해도 나는 자네가 마법사인 줄도 모르고, 그저 떠돌이 마도구 상인인 줄만 알았지 뭔가.”

“그때는 참 신세를 졌었지요. 연줄도 없는 저와 거래를 터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전도유망한 젊은이다 싶어 도왔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마법사라곤 해도 이렇게까지 아직도 젊을 때 모습 그대로인 걸 보면, 이 친구가 외양만 청년이지 실상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드는구만. 허허허.”

“하하하.”

에스테일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레오는 이 두 사람의 농담이 얼마큼의 진심을 담고 있는지 가늠해 보려 애쓰다가, 이윽고 가늠하기를 포기했다.

“재밌는 의뢰는 뭔가.”

“예전에도 한번 보여 드렸던 그 핏자국 침낭입니다.”

“오오, 그래, 드디어 팔 마음이 든 건가.”

“팔진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깃든 결계를 해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스테일의 말에 노신사 졸텍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눈이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 친구야, 아니, 그걸 그래, 그걸 해제하겠다고, 원, 자넨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릴 잘도 하는구먼, 허허허….”

에스테일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어넘기려는 듯 노신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에스테일은 미소만 지으며 차분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농담으로 퉁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노신사가 이윽고 표정을 바로 하고는 에스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소릴 하는진 아는 건가? 아니 글쎄, 그걸 해제하면 어떡하나. 그게 왜 귀한 물건인지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결계가 수백 년간 붙어 있으니 희귀한 수집품인 게 아닌가. 결계를 풀면야 흔해 빠진 침낭이잖나.”

“해제하는 일은 어려우시겠습니까?”

“어렵다는 게 아니고. 나야 마음먹으면 해내고말고. 다만, 뭐냐, 신중히 생각하길 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허허, 이것 참….”

“아까우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에스테일이 빙그레 웃었다. 노신사는 얼굴로는 미소 지으면서도 손톱으로 손끝의 거스러미를 꼬물꼬물 쥐어뜯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레오는 두 사람의 기색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짐작했다. 아마도 결계가 걸린 침낭은 원래 노신사가 탐냈던 희귀한 수집품인 모양이었다. 에스테일이 끝끝내 그 물건을 팔지 않으려 했던 데다 이제는 아예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없애겠다고 하고 있으니 노신사로서는 초조할 법도 했다.

“저야 물건을 잘 아시는 어르신께서 해 주신다면 믿고 맡기기 좋습니다만, 정 어려우시다면 다른 곳에 부탁할밖에요.”

에스테일이 상냥하게 말했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거든?’이라는 압박이 은근히 실려 있었다.

“끄응, 그렇지, 이만한 물건을 아무한테나 맡기기보단 검증된 사람이 맡는 게 좋지. 그래. 이 물건을 나한테 안 맡기면 누구한테 맡기겠나. 끄응. 그건 그런데….”

한참을 갈등하던 노신사가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물건 주인이 그리 처분한다는데 어쩌겠나. 일단 물건부터 보여 줘 보시게.”

레오는 저택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리 맡아 들고 있었던 침낭을 노신사에게 건넸다. 마력 차단용 천으로 몇 겹을 둘둘 감은지라 손으로 건네도 저리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 왜 그 자리에서 허공에서 바로 꺼내지 않고 미리 꺼내 둬서 따로 맡기는 거냐고 에스테일에게 물으니, ‘공간을 여는 마법은 지팡이도 없이 휙휙 쓸 수 있는 게 아냐’라고 에스테일은 말했었다. ‘물론 보통은 그렇다는 거고, 나는 보통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지팡이 없이 그런 마법을 마음대로 쓰면 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들키잖아’라고도 덧붙였었다.

“의뢰비는 대금화 세 닢은 줘야겠네.”

“화폐 개혁 전의 옛 금화 한 닢은 어떠십니까.”

“그렇다면야 금상첨화고.”

노신사는 선선히 응낙했다. 에스테일이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다니는 옛 금화는 지금으로선 통용되지는 않는 물건이었다. 쓰려 한다면 출처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이 따라붙을 테고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에스테일이 그런 상황을 반길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 노신사와 같은 수집가에게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출처를 묻지 않고 선뜻 받아들일 만큼.

“어떠십니까.”

“자네가 아는 대로지. 테스 알 마법의 여파가 강하고, 역속성이라 까다로워. 연대 추정은 지금으로선 이 이상 자세히 하긴 어렵지만 어째서 몇백 년이나 결계가 유지되었나 하면 그건 원 주인의 원한이 깊어서라고 할 수밖에.”

레오는 흘끔 에스테일을 보았다. 레오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걸 깨닫고 에스테일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한번 ‘아아…’ 소리를 냈다.

“당연한 거지만, 보통은 보호 마법 좀 걸려 있는 물건을 쓰다가 한을 품고 죽었다고 해서 물건에 결계 마법이 걸려 버리진 않아. 그랬다간 수많은 군수품들이 전부 원한덩어리로 변했겠지.”

“네.”

“다만 이 물건은 애초에 보호 마법을 걸었던 마법사 본인이 사용하다가 죽은 경우 같아. 죽기 직전에 물건에 걸려 있는 기존의 자기 마법을 다른 마법으로 변환해 버린 거지. 원래는 보호계 마법을 속성 전환해 공격 마법으로 바꾸려 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죽어 가면서도 이 침낭을 이용해서 적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언가 잘못돼서 강력한 결계의 마법이 돼서 아직도 이 침낭에 걸려 있는 거지.”

이렇게나 오랫동안 처음처럼 결계가 유지되는 건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하며 에스테일이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알 듯 말 듯 한 설명에 레오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얽힌 사연이 뭔지는 알고 있나?”

“아뇨. 일전에도 말했듯이, 옛 친구가 모은 수집품입니다. 친구가 제게 넘겨주어 가졌을 뿐이고요. 수백 년 된 군수품이란 것쯤은 짐작하지만, 그 이상은 모릅니다.”

“몰라도 할 수는 있네만 깨끗하게 작업하려면 뭐라도 단서가 있는 게 낫지. 알아낼 방법이 없겠나. 이 정도로 강한 원한이라면 기억의 파편이 얽혀 있을 법도 한데, 마법으로 독해해 낼 수 없겠나.”

“글쎄요.”

에스테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레오는, 에스테일이 이 물건에 얽힌 사연을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닌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 보지요. 지팡이 하나 빌리겠습니다.”

노신사의 수집품 지팡이 중 하나를 빌려 쥐고, 에스테일이 일어서서 양팔을 펼쳤다. 순간 핏자국 맺힌 가죽 침낭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새까맣게, 시야가 암전되었다.



***



-가라!

피맺힌 고함이 울려 퍼진다.

전장이다. 하늘이 새까맣다. 불길한 먹구름이 태양마저 삼키어 아침인지 저녁인지 시간의 감각마저 사라진 한때. 영원히 이어질 악몽의 순간이다. 종말은 이런 모습으로 오는가. 우리가 지키던 모든 것이 이렇게 도륙당하는가.

시커먼 개미 떼 같은 군사가 벌판을 메우며 덤벼든다. 말들이 날뛴다. 기병도 보병도 눈동자에 광기가 서려 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살육이다. 우리 쪽 전열은 무너진 지 오래다. 정신을 놓고 덤벼드는 광인 부대 앞에서 공포심과 이성을 미처 다 버리지 못한 우리의 군사는 불리하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다. 저들은 지금 인간이 아니다.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한다.

궁정 마법사로서 나는 마지막 긍지를 불태운다.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 한 놈이라도 더 황제 폐하의 거소로 덤벼들지 못하게 붙잡겠다. 궁정 마법사의 공포를 한 놈에게라도 더 새겨 주겠다.

-테스 알!

나는 고함친다. 내게 덤벼들던 병사 몇과 말 몇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스러진다. 마력은 고갈된 지 오래다. 테스 알이 이 정도 위력밖에 나오지 않다니. 그러나 긴 주문 하나를 영창할 시간은 벌었다.

-아히드 엔테르 라 카리아! 라 아르키아!

나는 울부짖는다. 이 마법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동료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궁정 마법사 중에는 아직 마력이 고갈되지 않은 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들이 강력한 주문을 영창할 몇 초를 이 보호의 마법으로 벌어 줄 수 있다면.

-라 아르키아 카리엔테 에칼 라히르!

그리고 나는 숨을 들이쉰다. 관통당한 지 오래인 복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당한 곳이 허파가 아니라 위장이라 다행이다. 주먹 두세 개만 한 구멍이 몸통을 꿰뚫고 있지만 다행히 아직 숨은 쉴 수 있으며 목소리도 낼 수 있다. 주문을 영창할 수 있다면 마법사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너희를 도륙해 주마. 내가 못하더라도 내 동료들이 할 것이다.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나는 외친다.

-카이 라 에스키르타키아! 카이 라 카리아! 카이 라 아르키아!

무릎이 땅으로 툭, 떨어진다. 피를 너무 많이 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부를 관통한 구멍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솟아 나오고 있다. 애써 틀어막아 두었지만 애초부터 한계는 뚜렷했다. 나는 몇 초 후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창을 완성하고 스러질 것이다. 보호의 마법이 내 동료들을 지킬 수 있도록. 내 자랑스러운 동료 궁정 마법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살아남아 저들의 살점을 하나라도 더 도려낼 수 있도록.

-이 타키르 카리아…!

한마디만 더 외치면 된다.

-…이드 아르키아!

목소리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나는 풀썩 온몸의 힘을 놓치고 땅으로 엎어진다. 내 생명은 여기서 다한다. 그러나 영창은 완성했다.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가 곧 발동되어 이 주변을 덮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아군 마법사는 모두 보호의 손길에 감싸일 것이다. 그러면 됐다. 이것으로 나는 부족하고 무능하고 수치스럽게나마, 끝까지 궁정 마법사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은 채로, 이곳에서 당당하게 죽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가 발동되지 않는다. 발동에 필요한 몇 초는 이미 지났는데. 내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걸까? 내 마력이 전부 쥐어짜도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를 발동하지도 못할 만큼 떨어진 걸까? 내 영창이 잘못된 걸까? 아니, 그랬을 리는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다.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아군 마법사를 보호하는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 이것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뜻은.

서늘한 감각이 등을 훑어 내린다.

전멸이다.

이미, 아군 마법사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울컥울컥 핏덩어리가 토해져 나온다. 생명력이 꺼져 간다. 황궁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황제 폐하는 누가 모셨는가. 폐하를 모시고 누군가가 안전히 도망쳤는가. 제발 누군가가 어디에라도 살아 있기를. 전멸이라니. 그럴 리 없다. 그래.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의 범위 밖에 모두가 살아 있을 것이다. 모두 몸을 피해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느라 범위에 잡히지 않았을 뿐이다. 전멸했을 리 없다.

찬란한 제국의 역사. 찬란한 궁정 마법사의 역사. 누구보다도 파괴적이고 압도적인, 긍지 높은 황궁의 마법사들. 전멸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작 이런 미쳐 돌아가는 역적 떼에게. 소름 끼치는 사술로 고통마저 마취시키고 목숨을 내버리며 달려드는 오합지졸에게.

-가라! 자랑스러운 새 시대의 전사들아!

누군가의 고함이 전장을 뒤흔든다. 한 사람의 목소리일 뿐인데 우레와 같이 울린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여기에 있다! 신께서 너희를 지켜보신다! 신을 대신하여 내가 여기에 있다! 가라! 가라! 가라!

까드득, 어금니가 부러진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경련하는 몸. 꺼져 가는 생명력. 주체할 수 없이 턱뼈에 힘이 들어가며 이미 부러진 어금니를 으스러뜨린다. 나는 흙먼지 이는 땅바닥에서 겨우겨우 고개를 굴려 고함을 치는 자를 올려다본다. 저기에 그가 있다. 전장을 굽어보는 바위 절벽 위. 마치 쏟아져 나오는 반란군의 원천지처럼 보이는 저 까마득한 저곳에, 그가 있다.

-네가 죽으면 네 동료가 산다! 네가 죽으면 고향의 가족이 산다!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져도 멈추지 마라! 가라! 가라! 가라!

저자는 광인이다. 그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바람이 휘몰아친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로브가 금세라도 찢겨 나갈듯이 펄럭펄럭펄럭 요동치고 있다. 강렬한 마력 폭풍이 회오리바람으로 화해 그를 휩싸고 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마법진에서 손을 떼고 마법의 발동을 중지하고도 남을 만한 거센 마력 폭풍 속에서도 그는 한순간도 발동을 멈추지 않는다. 광기 어린 눈이 전장을 향한다.

-부패한 황제를 척살하고 새로운 왕의 시대를 열어라! 영광이 너희를 기다린다! 내가 너희를 수호한다! 죽여라! 파괴해라! 한순간도 멈추지 마라! 진정한 국왕 전하를 위하여!

희번득한 안광이 인다. 그의 얼굴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소름 끼치는 안광만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커먼 안개가 전장을 뒤덮고 있다. 아니, 단순히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장을 뒤덮은 개미 떼 같은 장수와 병사들에게서 붉은 기 도는 검고 끈적한 안개가 흘러나와 벼랑 위의 마법사에게 빨려 들어간다.

저것이 바로 그 사술. 저자야말로 그 사술의 중심. 인간을 괴물로 화하게 하는 사술. 병사들로 하여금 팔이 잘려 나가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적의 머리를 따게 만드는 사술. 인간이 응당 느껴야 마땅한 공포와 주저함마저도 마비시켜 평범한 인간을 도륙자로 변하게 하는 사술. 정신과 육체의 모든 고통을 혼자서 대신 집어삼켜 군대로 하여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사술.

-가라!

사술을 부리는 마법사의 핏기 어린 고함이 전장을 뒤흔든다.

내게 하루가 주어진다면, 저자의 목을 딸 것이다.

내게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자의 목을 딸 것이다.

내게 단 하나의 공격 마법을 영창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자의 목을 딸 것이다.

내게 주어진 수명은 이미 다했다. 마력은 쇠했으며 시간은 끝났다. 그렇지만 단 한 번, 단 한 번,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테스…!

목에서 바람이 빠진다. 테스 알마저도 제대로 영창할 수가 없다. 영창한다 해도 이미 내게 남은 마력은 없다. 테스 알마저도 제대로 발동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마력을 끌어내 쓸 수는 없다. 다른 어딘가에 축적된 마력을 테스 알로 전환해 발사할 수 있으면. 마력석. 활성화된 마법 문양. 하다못해 하급 마도구. 뭐라도, 뭐라도 쓸 수만 있으면….

소지품을 뒤질 기력마저도 없다. 땅에 쓰러져 시체처럼 뒹구는 나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 이것도 마도구라면 마도구다. 이런 하찮은 것도 마도구라면 마도구다.

여기에는 분명 내 마법이 깃들어 있다. 일전에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 물건에 몇 가지 보호의 마법을 걸었었다. 일괄 제작된 검과 방패와 투구와 함께, 이 물건도 폐하의 하사품으로서 몇몇 장수들에게 내려졌었다. 그래 봐야 어려운 마법을 쓴 것도 아니건만 ‘폐하의 명을 받아 궁정 마법사가 직접 축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하사품을 받은 장수들은 공명심을 채우며 만족했었다.

나는 금사 자수가 들어간 야영용 침낭에 손을 뻗는다. 이 하사품을 받은 장수가 어쩌다 죽었고 어쩌다 이것이 여기에 굴러다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 내 손이 닿자 내가 건 보호의 마법이 내게 감응하며 순수한 마력의 형태로 녹아내린다. 이것을 변환하기만 하면.

-테스…!

나는 의식을 가다듬고 외친다.

-에칼…! 라에…르드…!

저자를 죽이지 못해도 좋다. 저자를 둘러싼 방어의 마법에 부딪쳐 소멸한대도 좋다. 그러나 저자를 향해 테스 알을 발사할 것이다. 살의를, 적의를, 마법사로서의 긍지와 깊은 증오심을 이 최후의 마법에 담을 것이다.

-에칼…! 라에르드…! 테스…!

숨이 가빠진다. 나는 마지막 호흡을 끌어모은다.

-에칼 라에르드 테스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