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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6화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 (3)





***



팍,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졌다.

“대강 그런 사연이라는군요.”

에스테일이 미소 지었다. 공중에 떠올라 있던 피 묻은 침낭은 어느새 마호가니 책상에 털썩 놓여 있었다. 레오는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다 금세, 방금 전까지 자신이 어느 환상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죽 침낭에 얽힌 ‘사연’의 상영이 이제야 끝난 것이었다.

“어허, 어허, 이거 난데없이 좋은 구경을 했구먼….”

노신사가 찻잔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지 않은가. 심상찮은 물건인 줄은 알았네만 설마 이 결계를 남긴 자의 정체가 구 제국의 궁정 마법사 테스일 줄이야. 게다가, 응, 게다가, 자네들 모두 보았는가?”

노신사의 침착한 회색 눈동자가 어린아이 같은 흥분으로 번쩍였다.

“모두 보지 않았는가, 그 절벽 위의 형상.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로브! 적군의 경외와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사술이라고까지 불리던 그 마법!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도 틀림없어. 틀림없네. 궁정 마법사 테스가 마지막까지 증오하며 죽이려 했던 자는…!”

“아픔을 먹는 자, 대마법사 유리스티스로군요.”

에스테일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노신사의 말에 끼어들었다.

“아이아드, 아니 에스테일, 자네도 보았겠지? 젊은 짐꾼 청년, 자네도 똑똑히 보았는가? 우리는 바로 그 황궁 침공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거야. 응, 600년 전 부패한 구 제국의 몰락사에서 정점을 차지하는 황궁 침공전!”

노신사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한숨을 들이쉬었다. 반짝반짝 생기가 넘치는 그 얼굴은 단순히 만족스러운 것을 넘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장면을 다름 아닌 타락한 궁정 마법사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이런, 이런, 아이아드, 아니 에스테일, 자네가 보통 인물이 아닌 줄은 알았네만 이런 구경을 시켜 줄 줄이야.”

“저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 시대쯤의 물건이라 혹시나 싶기는 했었습니다만.”

“근 1년간 한 체험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네.”

“과찬이십니다.”

“기술적으로도 성과가 있었어. 마지막에 사용한 주문이 일반 ‘테스 알’이 아니라 ‘에칼 라에르드 테스 알’이라면 어째서 그 마법이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결계처럼 변한 형태로 이 물건에 얽혀 버렸는지 몇 가지 짐작 가는 데가 있네. 더욱이 영창이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신사가 노트를 펼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세 가지, 많아야 네 가지 방식만 시험해 보면 되겠군. 잘하면 결계 해제가 오늘 안에 끝날 수도 있겠어. 원래는 사나흘은 각오했네만…. 참, 깨끗이 해제하기 위하서는 다른 집에서 마도구를 하나 빌려 오는 게 좋겠는데, 흠흠, 그렇다면….”

해제하기를 망설였던 게 언제였냐는 듯 노신사는 흥이 나 보였다. 에스테일은 그런 노신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책상에 놓인 가죽제 야영용 침낭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소리 없이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에스테일이 싱긋 웃었다.

“이건 우선 정리해 집어넣겠습니다.”

그 담백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레오는 왜인지 불안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 순간 에스테일이 침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마법으로 공중에 띄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손의 살갗이 닿도록.

“에스테일 님…!”

레오가 외치는 것보다 에스테일의 손이 결계 어린 마도구에 닿는 것이 빨랐다.

다음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아아악!”

에스테일이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시퍼런 불꽃이 에스테일의 오른손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레오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에스테일은 이미 심각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어, 어르신, 물, 차가운 물을…!”

레오가 더듬거리며 노신사를 향해 외쳤다.

“아, 아니, 무, 물은 소용없을 걸세. 이, 이건 무, 물로 끌 수 있는 불꽃이 아니라…! 아이아드, 정신 차리게, 아이아드!”

노신사 역시 얼굴이 창백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오는 벌떡 일어서 등짐을 내던지고 저택의 계단을 뛰어 내려가 경비병에게 외쳤다.

“지팡이를 돌려주십시오.”

“예? 손님, 저택 내 개인 지팡이 소지는 금지….”

“주인 어르신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돌려주십시오!”

1층의 경비병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에스테일의 지팡이를 되찾아 꽉 쥐고 레오는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에스테일 님!”

불꽃은 꺼지지 않은 채 에스테일의 손목을 휩싸고 있었다. 후드득. 손가락이 있었을 곳에서 검은 재가 힘없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레오는 에스테일의 아직 멀쩡한 왼손에 지팡이를 꽉 쥐여 주었다.

“에스테일 님, 제 말 들리십니까? 지팡이, 지팡이를 되찾아 왔습니다.”

에스테일이 지팡이를 꽉 쥐었다. 에스테일의 지팡이 끝이 허공에 알 수 없는 도형을 그렸다. 우습게도 그 순간 레오는 안도했다. 에스테일 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 에스테일 님일 것이다. 에스테일 님의 손에 에스테일 님의 지팡이가 있으니 이제 괜찮을 것이다. 근거도 없이 그런 안도감이 솟았다.

에스테일이 주문도 없이 마법을 발동했다. 그가 발동한 마법은 레오도 잘 아는 것이었다. ‘공간을 여는 마법’이자 ‘물품 보관 마법’, 에스테일이 온갖 잡동사니를 보관할 때 항상 쓰는 그것. 에스테일이 이 순간 꺼내려는 물건이 무엇일지 레오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에스테일이 꺼낸 것은 짙은 푸른색의 약병이었다. 한 손으로 마개를 뽑아 집어 던지고 에스테일이 물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남은 절반쯤의 물약을 불붙어 타오르는 오른손에 뿌렸다.

“…아….”

에스테일이 묘한 신음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놓칠 것처럼 보이더니, 이윽고 에스테일은 창백해진 이마에 주렁주렁 맺힌 식은땀을 훑어 내며 상쾌하게 웃었다.

“…죽는 줄 알았네.”

그러고서 에스테일은 미소 지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어르신. 이제 괜찮습니다.”

“…예?”

레오는 엉겁결에 불쑥 되물었다. 에스테일이 레오를 빤히 보았다. 레오는 자기도 모르게 노신사를 쳐다보았다. 노신사 역시 레오 못지않게 경악한 시선으로 에스테일을 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에스테일의 오른손 손목에서는 여전히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파스스, 재가 된 손가락과 손등의 뼈가 부스러져 떨어졌다. 타오르는 자신의 오른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에스테일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아아, 뭐, 음…. 불은 아직 안 꺼졌지만…. 꺼질 테고…. 섣불리 해제하려다 역효과가 나면 골치 아프니…. 뭐, 곧 꺼지지 않겠습니까?”

에스테일은 애매하게 중얼거리다 말고 노신사와 레오의 눈치를 살피더니 또 멋쩍은 듯 웃었다.

“이제 아프지는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



불은 에스테일의 새 의상과 함께 육체를 오른손 팔꿈치까지 태우고서야 멈췄다. 화장터에서나 보았던 타오른 뼛조각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광경에 레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아, 미안, 아무래도 충격을 줬겠구나. 미안.”

에스테일이 왼손으로 가볍게 레오의 등을 두드렸다. 레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 자네, 그 손….”

노신사는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괘, 괜찮은 겐가? 마법사는 어찌어찌하면 육신이 재생된다고는 들었네만, 내 그런 쪽으로는 미처 식견을 갖추지 못하여…. 그, 그러니까, 정말 괜찮은 겐가?”

“예에, 괜찮습니다. 재생까지는 절차가 복잡하기는 합니다만, 문제없습니다.”

“허, 허어,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니…. 마법사들이 보통 사람하곤 다르단 걸 알면서도 경박하게 동요를 보이게 되는구만.”

“아닙니다, 놀라시는 게 당연한걸요. 저택 내에서 난데없는 사태를 벌여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 죄송이고 뭐고….”

에스테일을 빤히 바라보다 노신사는 어처구니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쯤 되면 누구나 이런 일엔 익숙해지는 겐가? 젊었을 땐 마법사가 되지 못한 게 한이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자면 못 된 게 다행이다 싶어.”

“하하.”

에스테일이 맥없이 웃었다. 노신사는 종을 울려 하녀를 부르고는 어질러진 방 안을 정리하라 일렀다. 충직한 하녀는 바닥에 사람 뼈가 굴러다니는 광경과 팔꿈치 아래가 사라진 에스테일의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동요를 티 내지 않았다. 노신사와 에스테일은 다시 마호가니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에스테일이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왼손으로 찻잔을 드는 손짓이 서툴러 보였다.

“그건 그렇고 큰일이 나는 줄 알았네. 아니, 큰일이 난 건지….”

노신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뭡니까.”

에스테일이 태연히 대꾸했다.

“‘에칼 라에르드 테스 알’이 발동된 거로군, 60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허허어, 어째서 이런 일이…. 그간은 다른 사람이 손을 대도 가벼운 통증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나. 그래서 별다를 것 없는 결계라고만 생각했는데…. 설마 공격 마법의 기능이 살아 있었을 줄은….”

“결계 마법이 아니라 조건부 공격 마법이었던 거겠지요. 단순히 어쩌다 결계가 걸려 버린 게 아니라 명확한 설계를 갖춘 마법에 의한 현상이었다면 600년간 유지되었다는 사실도 이해가 갑니다. 게다가 마법을 건 사람이 다름 아닌 그 궁정 마법사 테스라면야.”

“테스에 대해 잘 아나?”

“잘은 모릅니다만, ‘테스 알’을 발명하고 자기 이름을 붙인 장본인 아닙니까. 테스 알에 한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겠지요.”

그러고서 에스테일이 코웃음 쳤다.

“뭐, 그래 봤자 최후의 마법 하나 뜻대로 발동시키지 못하고 조건부 공격으로서 침낭에나 들러붙게 만든 걸 보면, 알 만합니다만.”

레오는 멍하니 에스테일을 보았다. 에스테일은 홀짝, 식은 차를 우아하게 마시고는 왼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 오른손이 날아갔는데도 에스테일은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레오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에스테일이 침낭을 맨손으로 만진 것은 정말로 단순한 실수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건드린 걸까? 공격받기 위해서? 대체 왜?

“그런데 희한하구먼.”

노신사가 차분히 말했다. 에스테일을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600년간 잠들었던 공격 마법이 어째서 자네를 향했는지 말일세.”

“마법사라서겠지요.”

에스테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테스가 원래 공격하려 했던 대상과 비슷한 존재가 접촉하니 반응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마법사가 접촉한 적은 없었나 봅니다.”

“과연 그것뿐이라 생각하나?”

노신사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회색 눈이 에스테일을 응시했다. 에스테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노신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말일세, 이따금 자네가 무언가를 숨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네.”

“숨긴 적은 없습니다만.”

에스테일이 웃었다.

“자네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고향과 가족에 대해선 말을 아끼곤 했지. 떠돌이 무소속이면서도 마력이 강하고, 이상하게도 대마법사 유리스티스에 대해선 늘 흥미를 보이곤 했어. 게다가 이렇게, 유리스티스에 대한 원한으로 만들어진 공격 마법이 자네를 해치지 않았나.”

“그렇군요.”

“이 모든 사실이 단 하나의 전제를 가리킨다고 생각지 않나, 아이아드.”

“…….”

“아이아드. 아니, 에스테일.”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노신사가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비밀을 속삭이듯 소리 죽여 입을 열었다. 좌중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분위기였다. 노신사가 말했다.

“자네, 사실은, 출생이 불분명한 게 아닌가?”

“…….”

“오해 말게. 자네의 핏줄을 모독하려는 게 아니니. 오히려 반대라네. 아이아드, 나는…. 자네가 유리스티스의 숨겨진 직계가 아닐까, 때로 그런 예감을 받곤 한다네.”

에스테일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우스개가 아닐세. 이 나이를 먹고 보면 핏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싫어도 깨닫게 된다네. 고리타분한 소리 같아도 사실이야. 아이아드, 만약 자네의 강한 마력과 탐구심, 유리스티스를 향한 이유 모를 집념까지도 전부 유리스티스에게서 물려받은 피 때문이라고 한다면….”

“…….”

“자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인물일세. 결코 떠돌이로 살다 끝날 사람이 아니야.”

에스테일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젊으니 모르겠지. 유리스티스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도, 한 사람의 삶이 핏줄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도…. 그래도 새겨듣게. 나이 든 사람 충고에 귀 기울여서 손해 보는 일은 없는 법이라네. 스스로 돌이켜 보면 알지 않겠는가. 자네가 얼마나 유리스티스에게 이끌려 왔는지. 그게 바로 핏줄에 끌린다는 게야. 자네는 심지어 실없는 농담을 할 때도 유리스티스의 이름을 언급하곤 하지 않았나….”

레오는 필사적으로 고향집을 생각했다. 레미가 벌레에 발바닥을 물려서 가렵다고 떼를 썼던 일과 마이가 레미 때문에 덩달아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달래 주느라고 레오가 한참 동안 마이를 업어 주며 동네를 돌아야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 딴생각이라도 애써 하며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심각한 분위기에서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에스테일은 동요도 없이 미소 지으며 자못 진지한 척 노신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러울 수 있는지 레오로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아드, 아니 에스테일, 마법사는 육체를 재생하려면 마력의 핵에 접촉해야 한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재생을 위해 그 핵에 접촉하게 되면 잘 들여다보게나. 한번 유심히 살펴보게.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누가 알겠는가, 각성이 자네를 기다릴지. 자네는 평범한 떠돌이 마법사가 아닐지도 몰라. 위대한 대마법사 유리스티스의 피가, 다름 아닌 자네에게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네….”



***



노신사 졸텍의 호화로운 저택을 나서서 에스테일은 심각한 얼굴로 앞장서 걸었다. 화가 난 건가 생각하면서 레오는 그의 뒤를 따랐다. 에스테일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걷더니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에 접어들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으윽, 흑….”

“에스테일 님, 괜찮으십니까?”

레오는 놀라서 에스테일의 어깨를 감쌌다. 에스테일이 어깨를 들썩이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윽, 흑, 흐윽, 큽, 으흐윽…!”

그러다 이윽고는 끝내 주저앉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흑, 으흐흑, 으흡, 크하하, 으하하하하…!”

급기야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할 지경이었다. 우는 게 아니었다는 점에서 레오는 일단 안심하며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에스테일이 바들바들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채로 레오의 팔목을 잡았다.

“레오, 으흡, 너, 크흑, 너 되게 웃음 잘 참더라.”

“아, 예, 저는, 음, 딴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크흡, 나는 소리 없이 마법 하나 켜서, 크흐흑, 종아리에 냉찜질하면서 피로도 풀 겸, 안 웃으려고, 으흐흑, 크흐흐흐흐…!”

결국 에스테일은 혼자 숨이 넘어가도록 웃다가 사레까지 들리는 바람에 레오가 주저앉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어야 했다. 한참을 큭큭대고서야 에스테일은 겨우겨우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진정되었다. 만면에 환히 웃음을 띠고 에스테일이 말했다.

“아, 대단했어. 정말 대단했지. 유익하고 알찬 시간이었어. 졸텍 어르신은 최고야. 항상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 주신다니까. 마력핵을 건드릴 때 크흑, 유리, 유리스티스의 후손인지 보라고, 크흐흐흡.”

“…에스테일 님이 이렇게까지 웃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직계후손설도 대단하지만 자기 마력핵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 일단 빈사 상태에 빠져야 마력핵이 드러나든 말든 하지. 그 상태에서 자기 핵을 어떻게 들여다보냐고. 그걸 가지고 누구 후손인지는 또 어떻게….”

“…자, 잠깐만요, 에스테일 님.”

레오의 머릿속에 빠르게 몇 가지 사실이 스치고 지나갔다. 에스테일 님은 지금 오른팔 일부가 손상된 상태다. 재생을 위해서는 마력의 핵에 접촉해야 한다고 했다. 마력의 핵이 드러나려면 일단 빈사 상태에 빠져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아, 으흠.”

레오가 난처한 부분을 고민하는 걸 눈치챈 듯 에스테일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었다.

“그건 그렇고 침낭은 쓸모없게 됐네. 설마하니 보호 마법의 기능이 완전히 죽고 그게 전부 공격 마법으로 전환된 상태였을 줄이야. 추위나 더위나 간단한 습격쯤은 막아 줄 보호 마법이 걸려 있을 줄로 기대했는데. 뭐, 까다로운 결계인 줄 알았던 게 이렇게 간단히 소멸해 버린 건 쉽게 해결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지금은 평범한 침낭인 겁니까?”

“그래, 600년 전 구 제국의 어느 장군이 황제에게 하사받은 야영용 침낭이라지. 그건 그 나름대로 근사하긴 하네. 이제 마법하곤 아무 상관도 없어.”

레오는 자기 손에 들린 핏자국 묻은 침낭을 내려다보았다. 무척 튼튼해 보이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이제는 손으로 만져도 쏘는 듯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오래 잠들어 있던 공격이 제 몫을 다하고는 이제는 소멸한 모양이었다.

“…….”

문득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레오는 홱 고개를 들어 에스테일을 쳐다보았다.

“에스테일 님.”

에스테일은 과자를 훔쳐 먹다 엄마에게 들킨 어린이처럼 주춤하며 괜히 배시시 웃었다.

“왜, 레오.”

얼버무리는 미소에 굴하지 않고 레오는 에스테일을 추궁했다.

“일부러 손대신 겁니까?”

“…….”

“그 원한이 깃든 물건, 일부러 손을 대신 겁니까?”

에스테일은 난처한 듯 웃으며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스테일의 대답은, 끄덕이는 동작이었다.

“왜, 어째서, 에스테일 님….”

막막해져서, 레오는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나를 해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한번 당해 주고 싶어지지 않아?”

에스테일은 멋쩍게 웃었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 생명이 위험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테스가 나를 죽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본인이 살아서 지팡이를 쥐고 내 앞에 서 있어도 테스는 나를 못 죽여. 마법을 건 사람이 테스인 걸 알았으니까 만진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레오는 허탈해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걱정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삼켰다. 주제넘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레오는 첫 짐꾼도 아닐뿐더러 그 어떤 특별한 존재도 아니라고 에스테일은 첫날부터 못 박아 말한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레오는 에스테일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별달리 간섭할 입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