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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4화

에스테일 (3)





“내가?”

“네.”

“뭐가?”

“…….”

레오는 에스테일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자고, 생각하고, 걷고, 먹고. 단순한 네 단어인데, 멋 부리지도 않았고 대단할 것도 없는 네 단어인데 레오는 에스테일의 그 말이 무척 좋았다. 눈앞에 있는 이 검은 머리의 마법사를 더 알고 싶었다. 에스테일에게서 에스테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섣불리 주제넘은 말을 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는데, 너, 나한테 반하지는 않도록 해라.”

“…예?”

“아니면 됐고. 그런데 이 나이 먹으면 이런 쪽으로는 쓸데없이 촉이 좋아져서 말이야.”

“…….”

“참고로 나는 나보다 약한 존재하고는 섹스 안 해.”

그렇게 말하고는 에스테일은 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레오는 에스테일의 가늘게 뜬 눈을,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 전혀 안 했습니다.”

레오가 항변했다.

“미안, 미안, 귀찮은 일은 사전에 방어하는 게 습관이라서. 농담인 셈 쳐 줘.”

에스테일은 한번 손을 내저었다.

“응, 농담인 셈 쳐 줘. 남자끼리인 사이가 좋은 게 그런 거 아니야?”

“어떤 것 말씀입니까.”

“적당히 뭐든 농담으로 칠 수 있는 것.”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살짝 혼란스러워진 채로 레오는 에스테일을 멍하니 보았다. 에스테일은 킬킬 웃고는 손을 들어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시는 속도가 느려.”

“…저도 느린 편은 아닙니다.”

“아아, 맞아, 내가 엄청나게 빠른 거였지.”

“…그러신 모양입니다.”

완두콩 볶음 한 접시를 여관 주인이 서비스라며 내왔다. 작은 나무 수저로 완두콩 볶음까지 깨끗이 먹어 치운 두 사람은 각자 잔을 비우고는 객실로 올라왔다.



***



수탉이 울지도 않았는데 레오는 새벽부터 눈을 떴다. 자기 집도 친척 집도 아닌 낯선 곳에서 잠든 것은 레오에게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에스테일은 아직 잠든 채였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레오는 자신이 왜 집을 떠나왔나를 생각했다. 분명한 것도 같으면서 흐릿한 것도 같았다. 다만 레오는 에스테일을 따라다니고 싶었다. 그게 목표도 없고 예정도 없는 길이더라도, 적어도 당분간은, 에스테일을 따라 길을 걷고 싶었다.

한 시간쯤을 레오는 조용히 혼자서 흘려보냈다. 창밖이 점점 밝아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에스테일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그물처럼 몸에 뒤엉킨 머리카락을 빗어 정리하느라 손이 분주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아, 응, 잘 잤니.”

엉킨 머리를 풀며 에스테일이 답했다. 에스테일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다시 찰랑이는 아름다운 흑발로 보이도록 머리카락을 풀어내어 놓은 그는 몇 번 더 머리카락을 매만져 정리했다.

“공을 많이 들이시는군요.”

“손으로 하는 게 익숙해서. 이런 데에 마법을 쓰는 건 영 익숙해지질 않더라.”

“오늘은 약품상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돈을 벌어야지. 일행이 생겼으니.”

에스테일이 웃었다.

“우선은 물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이야. 재미없는 과정이겠지만 봐 두어서 나쁠 건 없겠지. 한 시간쯤 걸릴 거다.”

“네.”

“다 만들고 나면 네가 짐꾼 노릇을 톡톡히 할 차례니까, 준비하도록 해.”

“네.”

얌전히 대답하는 레오를 향해 에스테일은 다시 웃었다.

씻고 아침을 먹은 후 객실로 돌아와서, 에스테일은 공중에 문을 열어 커다란 나무 상자를 하나 꺼냈다. 빈 유리병이 가득한 상자였다. 레오를 시켜 식수를 떠 오게 하고서는 에스테일은 병마다 맑은 물을 따라 부었다. 그러고는 반투명한 가루를 조금씩 각 병에 흘려 넣었다.

“간단한 촉매야.”

에스테일이 말했다. 그 이상 설명할 마음이 없어 보였기에 레오도 더 묻지 않았다. 바닥에 깨끗한 종이를 깔고서 에스테일은 바닥에 꿇어앉아 사람 머리통 크기쯤 되는 규모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는 선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에스테일의 펜 끝에서 쭉쭉 뻗어져 나갔다. 머리카락만 한 가는 선들이 어지럽게 그어지며 직선과 원과 곡선의 형태를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새 에스테일의 손을 따라 점차 정연하고 깨끗한 마법진을 이루어 갔다.

마법진을 완성한 에스테일은 병 하나를 그 중앙에 얹었다. 그리고 생경한 언어로 주문을 외우며 병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잠시 환하게 병 안의 액체가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빛은 서서히 가라앉고 액체는 다시 평범한 물처럼 투명한 액체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끝인지 에스테일은 그 병을 치우고는 새 병을 마법진 중앙에 얹어 똑같이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반복이었다. 레오는 에스테일 옆에 앉아 그가 시킨 대로 작업이 끝난 유리병에 마개를 막는 일을 했다.

“끝.”

그렇게 말하며 에스테일이 50병째의 물약을 마법진 위에서 치웠다. 그러고는 마법진을 그렸던 종이를 돌돌 말아 공중에서 소각했다.

“이걸 전부 약품상까지 실어 날라야 하니까 가볍지는 않을걸.”

“괜찮습니다. 짐꾼인걸요.”

“씩씩해서 좋네.”

에스테일이 손을 털었다.

“진통제 50병 정도면 칸텐만 한 규모의 약품상에선 매입하겠지. 더욱이 축제 기간이라 사람들 씀씀이도 커져 있을 테니. 이제 가져가서 흥정만 하면….”

말하다 말고 멈칫하더니 에스테일이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왜 그러십니까?”

“염색 깜박했다.”

“예?”

“뚜껑 전부 다시 열어 봐. 물 같아 보이면 안 팔린다고. 염색해야 하는 걸 깜박했어.”

얌전히 레오는 50병의 마개를 전부 열었다. 에스테일은 새 종이를 깔고는 염색을 위한 마법진을 다시 그려 내고 또다시 처음부터 한 병, 한 병 물약 위에 손을 얹으며 마법을 걸었다. 연한 하늘색으로 변한 물약을 레오는 옆에서 받아 착실히 다시 단단하게 마개로 봉했다.



***



약품상은 번화가에서 한 골목 안으로 들어간 위치에 있었다. 본 축제가 막 시작된 날이라 거리에는 나팔 소리와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오후에는 온 마을을 휩쓰는 규모의 행진도 시작한다는 모양이었다. 소란을 뒤로하고 에스테일과 레오는 골목의 작은 약품상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쇼….”

뚱한 얼굴의 약품상 주인이 건성건성 인사를 했다.

“매입하십니까? 괜찮은 진통제 가져왔는데.”

에스테일은 뒤따라 들어오는 레오를 향해 턱짓했다. 그림이 영락없이 전형적인 짐꾼과 그 고용주로 보이겠다고 레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누구 소개 받고 왔어요?”

“소개랄 게 있겠습니까. 물건을 알아봐 주실 것 같으니 와 본 거지요.”

“떠돌이 마법사인가? 요새 워낙 흉흉한 일이 많으니, 웬만하면 새로 거래 안 트는데요.”

“물건이라도 한번 봐 주세요.”

레오는 약병이 든 나무 상자를 내려놓고 한 병을 에스테일에게 건넸다. 에스테일은 약병을 약품상에게 건넸다.

“마법사 양반, 같은 물약이라도 1급, 2급, 3급이 있는 건 아시죠? 다 똑같이 1급 가격으로 매입하는 게 아니거든.”

“급에 맞는 가격만 치러 주시면 됩니다.”

“글쎄, 물건이 좋다면야 얼마든지 그만한 값을 내겠다마는.”

약품상은 마개를 열고 손부채질해 물약의 냄새부터 맡았다. 약병을 빙빙 돌리며 점성과 성상을 확인하고는, 연한 푸른색의 물약을 시음용 스푼에 반 스푼쯤 따라 맛을 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작은 불꽃을 일으켜 가열하며 반응을 보았다.

레오는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당연히 1급이겠지. 어쩌면 1급보다 상위의 판정이 나올지도 모른다. 떠돌이 마법사가 다짜고짜 들고 온 물약 50병이 모두 최상품이라는 걸 알면 이 무뚝뚝한 약품상의 눈이 얼마나 휘둥그레질까.

“딱 3급이네.”

약병을 내려놓으며 약품상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에스테일이 선선히 답했다.

“이만한 물건이어서야 한 병당 9쿠프 쳐도 잘 쳐주는 거예요. 잘 봐주려 해도 3급이니.”

“흐음, 그렇습니까.”

“에라, 기분 좋게 병당 10쿠프 쳐 드리지. 내가 맛본 한 병도 매입하는 걸로 쳐서 도합 500쿠프. 마법사님이 여기까지 오신 수고를 봐서 잘해 드리는 겁니다.”

레오는 불쑥 ‘말도 안 돼!’ 소리가 튀어 나가려는 것을 억눌러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에스테일 님이 직접 조제한 진통제가 3급일 리 없잖아요’ 하면서 낯짝 두꺼운 약품상을 몰아세우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에스테일의 체면 때문이었다. 1급이라면 하나에 50쿠프, 잘하면 70쿠프도 나올 텐데…. 병당 10쿠프라는 채점을 받고도 속도 없는지 웃기만 하는 에스테일을 보며 레오는 속내를 꾹꾹 눌렀다. 에스테일은 아마도 마찰을 빚기가 싫은 나머지 터무니없는 매입가를 받아들이는 모양인데, 자신이 나서서 큰소리를 냈다간 에스테일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였다.

“에스테일 님!”

레오는 약품상을 나서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에스테일을 불렀다. 에스테일은 빙그레 웃었다.

“왜, 레오.”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한 병에 10쿠프를….”

“그야 3급이니까.”

“터무니없는 판정 아닙니까. 에스테일 님이 만든 약을 어떻게 3급으로….”

“그거야 정말로 3급이니까 그렇지.”

“정말로 3급… 예?”

이번에는 레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재미있는지 에스테일은 낄낄 웃었다.

“1급일 줄 알았어? 레오, 내가 만들었으니까 무조건 1급인 줄 알았어?”

“그, 그건…. 말하자면….”

“3급이니까 3급이라고 하지. 저 물약상, 보기 드물게 인심도 후하고 정직한 사람 같던데. 보는 눈도 있고. 떠돌이라고 값을 후려칠 만도 한데 꽉 채워서 10쿠프를 쳐줬잖아.”

에스테일은 연신 킥킥거렸다. 레오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되물었다.

“그, 그러니까, 일부러 3급으로 만드신 겁니까?”

“그렇지. 우리 짐꾼이 눈치가 빠른데?”

“어째서 그렇게….”

레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에스테일을 보았다. 에스테일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급을 납품하면 귀찮아지잖아.”

“…….”

“아무 연고도 없이 나타나서 1급을 납품한 마법사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 눈과 귀가 쏠릴 거라고. 이 근방에 1급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약품상이 알지도 못했다고 하면 희한하잖아. 근처에 머무는 그만한 급의 마법사쯤은 꿰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 그렇군요.”

“별다른 소리 소문 없이 납품할 수 있는 1급 약품의 규모래 봤자 대여섯 병쯤 아닐까. 그래서야 3급 50병보다야 돈도 안 되잖아.”

“그렇군요….”

레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테일은 환하게 웃으며 50개의 은화를 공중으로 촤르륵 쏘아 올렸다가 다시 양손으로 받았다.

“자아, 이제 수중에 50시르, 그러니까 500쿠프가 있다. 효과가 약한 3급이긴 해도 불순물 없는 괜찮은 물건을 납품했고, 그러면서 별달리 눈에 띄지도 않았지. 500쿠프를 벌면서 말이야.”

에스테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레오.”

“예?”

“500쿠프면 네가 아무리 잘 먹는다고 해도 몇 주 치 식량값은 되겠지. 이제 어디든 갈 수 있단 거야. 화폐가 통하는 지역이기만 하면 말이야.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어딜 갈까, 레오.”

“아, 음…. 그건….”

갑자기 물어 봤자 생각날 턱이 없었다. 고민하던 레오가 답하기도 전에 에스테일이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맞다, 너, 추우면 죽지.”

“아, 네.”

“더워도 죽고, 잠자리가 불편하면 살이 짓무르고.”

“웨, 웬만해선 살이 짓무르진 않습니다만.”

“아무튼 함부로 노숙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아니야. 치잇, 숙박비는 비싼데….”

투덜거리던 에스테일이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공중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사람 하나가 족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손끝 한번 대 봐. 손 집어넣지는 말고, 살짝 손가락만 한번 대 봐.”

레오는 에스테일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에 닿은 손끝이 거세게 욱신거리더니 뼈가 저려 왔다. 레오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거부해?”

“거,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대체….”

“그냥 뭐, 이런저런 보호 마법이 걸린 침낭인데, 원한이 깃들어서 자기 주인 말고는 인정 안 하거든. 몇백 년 지났으니까 풀렸으려나 싶었는데 아직 멀었나 보네.”

“이, 이건 어떻게 얻은 물건이십니까?”

“친구 유품.”

가볍게 대답하고는 에스테일이 곧 손을 내저으며 레오를 보았다.

“아, 원한을 남기고 죽은 침낭 주인이 내 친구라는 건 아니고. 그런 무거운 사연은 아니야. 재미있는 물건이라 내 친구 하나가 사다가 자기 골동품 컬렉션에 넣어 놓았는데 그 친구도 오래전에 죽은 거지. 컬렉션 중에서 돈 안 될 물건은 나한테 떠넘기고 말이야.”

레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테일이 덧붙였다.

“돈 되는 물건은 자기 자식들 주더라. 하여튼 친구라는 놈들은.”

“…저,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마법사 분들은 그, 대개 수명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짧으면야 아무 때나 죽고. 길면 120년. 아주 길면 150년.”

“…….”

“나는 620년 살았지. 아마 앞으로 500년 정도는 수명이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요.”

“대마법사니까.”

에스테일이 고약한 소리를 내며 킬킬 웃었다.

“응, 레오, 한 시대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대마법사라고. 마력이 흘러넘치니까 죽지도 않아. 신체가 걸레짝이 되어도 마력의 중심만 파괴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소생시킬 수가 있지. 그런데 말야, 이게 지혜나 능력하고는 별 상관이 없거든. 인간성하고도 상관없어. 그냥 마력. 마력이 미친 듯이 넘치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대마법사라는 거….”

“…….”

“친구들 많이 죽였지. 살리기도 많이 살리고. 지킬 수 있었는데 못 지킨 적도 많고…. 그러다가… 뭐…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다들 죽고…. 나라는 몰락하고, 또 세워지고…. 그렇게 해서 살아오고 있는 거야, 레오.”

“…….”

“에스테일이지, 네가 보는 대로.”

레오는 가만히 에스테일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태어나셨을 때 받은 이름은 윤, 이 세계에서 받은 이름은 유리스티스, 공문서에 기록된 이름은 켈타이르 엘 테이레스, 라고 하셨었죠.”

“그래.”

“…에스테일 님, 이신 겁니까?”

“에스테일이다.”

레오는 에스테일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네, 에스테일 님.”

에스테일이 한번 기지개를 켰다.

“그건 그렇고, 이 침낭은 어쨌든 아직 못 쓰겠네. 비슷한 물건이 있긴 한데 이건 좀 작아서.”

에스테일은 허공에서 작은 마대 자루처럼 생긴 허름한 침낭을 하나 더 꺼냈다. 레오는 그 침낭을 한번 뒤집어써 보았다. 핏자국 물든 가죽 침낭처럼 사람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크기 자체가 빠듯해 레오가 안에 들어가 자기는 어려웠다.

“이건 역시 무리겠지?”

그러면서 에스테일이 꺼내 든 것은 간이 텐트였다. 크기도 넉넉하고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듯해 든든한 것까지는 좋은데, 부담스러운 레이스가 가득한 데다 바깥 면은 온통 야릇한 춘화로 뒤범벅이었다. 절대 독신자가 혼자 쓰기 위한 용도의 물건이 아니어 보였다. 뒤엉켜 아우성치는 불그스름한 허벅지들의 향연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레오는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응? 무리가 아니라고?”

“아, 아뇨, 제 말은.”

“음, 그래, 역시 좀 그렇지.”

왜인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에스테일이 춘화로 도배된 텐트를 도로 공중의 문 너머로 집어넣었다. 대체 왜 그런 물건을 들고 다니냐고 물으려다가, 야릇한 깊은 사연이라도 튀어나오면 그런 건 별로 듣고 싶지 않겠다 싶어 레오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쯧, 이것도 써먹으려면 한참 걸리겠네.”

손끝을 댄 것만으로 레오의 뼈를 저리게 만들었던 원한 서린 가죽 침낭을 에스테일이 마법을 써서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품질은 좋은 물건인데 말이야. 그만큼 충성심이 강한가 봐. 물건더러 충성심이라고 하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마법사들끼린 종종 그런 얘길 하거든. 어떤 물건은 마법이 잘 붙고 어떤 물건은 또 죽어라 안 붙으니까 말야, 물건에도 기질이 있다고 비유하곤 해. 이놈은 억세다, 이놈은 새침데기다…. 그런 식으로.”

“이건 충성심 강한 침낭…인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제 주인을 몇백 년은 모시고 있는 셈이잖아. 우리로서야 이미 죽고 없는 주인만 찾지 말고 곱게 좀 열려 주면 좋겠다 싶지만.”

“…….”

레오는 잠시 가만히 피로 얼룩진 가죽 침낭을 바라보았다. 침낭을 도로 집어넣으려던 에스테일이 공중에 둥실둥실 침낭을 띄워 놓은 채로 멈추었다.

“…에스테일 님.”

“너 골치 아픈 소리 하려고 그러지.”

“죄송합니다.”

“충성심 강한 침낭의 원한을 풀어 주자는 거지? 우리가 도와주자고?”

“주, 주제넘은 생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좋아.”

에스테일이 킥킥 웃었다.

“나는 새로 고용한 짐꾼이 마음에 들어. 그러면 이런 문제의 전문가가 있는 곳을 찾아가 보실까. 여기서 가깝게 들를 만한 곳이라면…. 음, 그래, 레이덴이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거기가 어디입니까, 라든지 그곳에서 누구를 찾아가는 겁니까,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에스테일은 레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카리아 이드 아르키아 (1)





하루 더 칸텐에 머물며 축제의 분위기와 포도주 그리고 곳곳의 바가지를 피해 피난처처럼 틀어박힌 객실의 고요함을 즐기고, 에스테일과 레오는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레이덴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노정은 순조로웠다. 야영 도중에 두 사람을 급습한 늑대 두 마리가 에스테일에게 머리가 깨져 죽었고, 그냥 두고 가자는 에스테일을 설득해서 레오는 서툰 솜씨로나마 늑대 가죽을 벗겨 보관했다.

레이덴에 도착하자마자 레오는 무두장이부터 찾아가자고 했다. 늑대 가죽 두 장을 넘기고 받은 돈은 고작 30쿠프였다. 솜씨가 서툴어 가죽 여기저기 흠집을 내어놓은 데다 발과 머리를 제대로 벗기지 못해 늑대 가죽으로서 값을 제대로 쳐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낙심하는 레오를 에스테일은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가죽 벗기는 건 언제 배웠어?”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잘 가르쳐 주셨어요.”

“호오, 어렸을 때 배운 걸 용케 잘 기억하는구나.”

“아뇨, 제 말은, 지금 계신 새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일곱 살 때이니 그때 뭘 배웠어도 여태 기억하진 못할 거예요.”

에스테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맞다, 레오, 지갑은 있어?”

“아, 아뇨, 천에 동여매서 품에 넣어 다닙니다만.”

“좋아. 하나 사 줄게.”

에스테일은 노점에서 자수가 새겨진 4쿠프짜리 지갑을 하나 사서는 레오에게 건넸다. 필요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레오는 잠자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 에스테일의 선물을 받았다.

늑대 가죽을 팔고서 두 사람은 우선 공중 욕탕으로 가서 몸부터 씻었다. 대도시의 수도 시설을 기반으로 한 욕탕에서 씻는 것은 여행길에서 개울물로 씻는 것과는 기분부터가 달랐다. 긴 머리를 말리며 에스테일이 말했다.

“머리 모양 좀 골라 줘 봐, 레오.”

“예? 머리 모양이라…. 여태까지처럼 늘어뜨린 머리도 괜찮지 않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 지금 가려는 집에선 좀 덜 부랑자처럼 보여야 하거든.”

“그, 그러면, 음…. 묶어서 틀어 올리는 건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