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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홍은동


이상한 일이다. 이 동네에서 저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세 번째였다. 자주 오는 동네도 아니었다. 첫 번짼 홍은슈퍼에서였고, 두 번째는 한 달 전쯤. 주혁은 차 안에 있었고, 여자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온전히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류장의 광고판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그러다 신호등이 바뀌고 주혁은 무심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였다.

여전히 보이는 건 여자의 뒷모습뿐이지만 그 뒤태만으로도 지난번의 그 여자라는 걸 알았다. 어째서 뒤태만으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저 뒷모습을 보면 또 ‘그 여자네.’ 하는 감상이 불쑥 솟는다. 뒤이어 ‘이번에도 뒷모습이고.’ 하는 생각이 유유히 스쳐 갔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동네의 작고 오래된 면옥집이었다. 메뉴라고는 냉면과 칼국수밖에 없었는데 나름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난 곳인지 식당 안이 제법 붐볐다.

오른편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평상에 좌식 테이블들이 모여 있고, 왼편엔 2인용 식탁들이 교실 안의 책상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주혁의 사선 방향의 앞자리가 바로 여자의 자리였다.

어수선한 소란과 진동하는 비 냄새 속에서 여자의 뒤태가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묘한 일이었다.

여자의 하얀 손목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어느 순간 긴 머리가 방해되었는지 손목의 머리 끈을 빼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다. 다시 젓가락을 든 여자는 슬쩍슬쩍 고개를 움직이며 면을 삼켰다.

주혁은 찰나 푸른 안광을 띤 눈을 내리고 눈길을 틀었다. 유리창 밖 빗소리가 유난하다. 한낮, 후덥고 질척이는 공기는 불쾌했다.

그저 무료해서일 것이다. 피로가 몰려 헛생각에 빠지는 탓이고, 이 지루한 동네에 마땅히 신경 둘 곳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지만 건조한 시선이 결국 멈추는 곳은 역시나 여자였다.

그의 눈빛에 무심한 자조가 스쳤다.

별수 있나.

본능이 이끄시는데, 따라 주어야겠지.

분명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의 뒤태가 이토록 그의 신경을 잡아끄는 일도, 그의 가슴이 기이한 긴장으로 매섭게 박동하는 일도. 해서 말이나 걸어 볼까 하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뻔한 말로 번호를 묻고 가지고,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보면서.

주혁은 우스운 생각을 하며 들이마시듯 면을 삼켰다. 뒷모습만 보고 그 여자라 확신하는 허점 많은 생각도 우스웠다.

그릇의 바닥이 보일 즘이었다. 여자가 그의 옆을 스쳐 간 것은. 그때 주혁은 핸드폰으로 U캐피탈 대표에게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곧 어떤 결심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 여자의 앞모습을 봐야겠다, 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한다. 주혁이 계산을 하는 동안 여자는 자판기 옆의 바구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먹고 우산 통에 다가갔다. 그때 단체로 들어왔던 손님들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주혁의 몸이 앞으로 밀렸다.

소란에 여자도 고개를 돌리고, 처음으로 여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사탕을 물어 볼이 불룩했다. 이마에서 시작되는 선이 부드럽고, 머리를 넘기는 손가락이 길고, 순간순간 드러나는 목덜미는 투명하다. 무엇 하나 진한 데 없는 파스텔 톤의 여자였다. 그럼에도 여자는 선명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 모순이 의아해 주혁은 무신경한 낯을 하면서도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여자를 밀친 중년 남성의 사과였고 여자의 말이었다. 낮지도 높지도 않아 억양이 없는 목소리. 여자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쉬웠다.

여자는 우산 통에서 하늘색의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주혁의 것과 똑같은 색깔의 우산이었다. 주혁도 우산 통에서 우산을 꺼냈다. 여자의 것처럼 하늘색 우산인데, 다만 주혁의 것엔 손잡이 부분에 리본 비슷한 모양의 천 조각이 달려 있었다.

어라.

그런데 주혁이 집은 것엔 천 조각이 없다. 다시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손에 잡힌 우산 손잡이에는 천 조각이 달려 있다. 주혁의 것이다.

잘됐네.

희미하게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주혁이 여자를 불렀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앞을 보여 주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는 듯했다. 다시 여자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마침내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갠 후의 습기가 더럭 가슴을 적신다면 그런 느낌일까.

너무 가까웠는지 여자의 신발이 주혁의 구두를 밟았다. 여자가 짧은 탄성을 뱉으며 서둘러 발을 뗐다.

“죄송해요.”

요란 속에서 여자의 음성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 역시 기이한 일이었다.

여자를 부른 건 주혁이었는데, 정작 주혁은 이유 없이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묘한 전율이, 긴장이, 감각이, 빠르게 그의 몸을 휘감는다.

주혁이 말을 않자 여자가 의아하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우산.”

“네?”

“그거, 내 거라서요.”

여자가 우산을 내려 본다. 주혁이 쥔 우산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점을 발견했는지 눈으로 멋쩍게 호선을 그렸다. 이어 “죄송합니다.” 정중히 말하며 우산을 건넨다. 여자는 주혁에게 우산을 건넸음에도 내민 손을 빼지 않았다. 자신의 우산을 돌려 달란 뜻이다.

그러나 주혁은 무시하고 여자를 응시했다.

뭘까, 이 느낌은.

어느 순간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고, 여자도 의아하게 조금은 덤덤하게 주혁을 보았다.

주혁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곧이어 가물거렸던 인상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지고,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떠올린다.

아아, 그래.

그러니까, 정서은.



어느덧 비가 그쳤다. 빗물이 말라붙은 유리창으로 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길을 막지 말라는 주인의 말에 둘은 가게 밖으로 나온 터였다. 빛을 등지고 서은이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제 우산…….”

“오랜만이네.”

손을 뻗던 서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묻는 시선으로 그를 본다. 그 시선마저 익숙하다. 주혁은 시간을 세어 봤다. 그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으니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러나 물끄러미 주혁을 향한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기억 안 나는 건가?”

여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도 몇 초간 여자는 말이 없었는데, 왜인지 주혁에게 그 수 초는 수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뇨, 알고 있습니다. 서주혁 상무님.”

의아한 눈빛과 모순되는 순종적인 말투였다. 서주혁 상무, 그 직함을 여자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번엔 주혁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한다. 눈치 빠른 여자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서정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정? 전자?”

“네.”

“어느 부서?”

“……홍보2팀입니다.”

서은의 말투가 퍽 사무적이다. 방금 전의 순한 미소는 사라지고, 목소리와 얼굴에 겹겹으로 낯선 무언가가 덧칠된다. 서은은 주혁이 기억했던 것과 다르게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어릴 적엔 좀 더 친근하고 밝은 이미지의 소녀였는데 성인이 된 서은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선을 틀어도 여운을 남겨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서은은 그의 후배이자 동급생이면서 고용인의 딸이었다. 서은의 아버지는 주혁의 집에서 갖가지 일을 돕는 고용인이었다. 기계를 수리하기도 했고, 물건을 나르기도 했고, 정원을 정리하기도 했고, 운전을 하기도 했다. 이름이, 아마 윤철이었을 거다. 정윤철.

주혁은 윤철의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였는데 그럴 때면 그 옆자리에 서은이 앉아 있었다. 윤철의 딸, 서은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탓이었다. 주혁이 초등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가고 또 고등학교를 일 년 휴학 후 복학한 덕에 서은은 그의 후배이자 같은 반 동급생이기도 했다.

그 고등학교를 다닌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주혁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불편했다. 서은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싫어한다 생각이 들 만큼. 부모들이 고용인과 고용주의 사이여서인가 보다고 짐작은 했지만, 무슨 이유든 미움을 받는 건 싫었다. 그래서 그도 서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 차가 있어도 동급생이므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에게 말을 놓았다. 처음엔 선배,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형, 오빠가 되어 있었고. 그런데 서은만이 그에게 꼬박 존대를 하고 선배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상한 여자애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내 어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국으로의 유학이 결정되고 마지막 등교일이었다. 주혁이 사물함 속 물품 정리를 하고 학급 임원이었던 서은이 담임의 지시로 주혁을 돕고 있을 때에, 불쑥 주혁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왜인지 서은을 두고 아직 떠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은을 붙잡고 말했다.

너,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줘.

……저 핸드폰 없는데요?

왜 난 이제껏 이 애 핸드폰 없는 것도 몰랐나. 스스로에게 드는 한심함을 감추고 다시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럼 이메일 주소.

왜요?

가서 편지하게.

……왜요?

심심할 것 같으니까.

말하며 주혁은 그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어리고 미숙했던 시절이다.

서은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반쯤은 거절할 걸 알면서 물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은이 공책에서 종이를 찢어 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건네는 서은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싹였다. 다른 아이들에겐 상냥하고 친절해도 그에게만큼은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여자애였는데 그때 서은의 얼굴은 묘하게 어딘가 울 것도 같았고, 무언갈 참는 것도 같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다 만 것 같기도 했다.

종이를 받으며 주혁이 물었다.

왜?

그가 달라고 했으면서, 왜를 묻다니. 스스로 묻고도 어이가 없었다. 서은은 한참간 답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멀리서 누군가 주혁을 부르고, 주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나도 심심할 것 같아서.

서은이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