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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prologue


“전망 하나는 기가 막히죠. 언덕길이라 조금 불편하긴 한데, 차 있으시죠? 그럼 걱정 없으실 테고, 덕분에 전망은 끝내준답니다. 뒤에 백련산이 있어서 공기도 맑고 운동하기도 좋고. 요즘은 미세 먼지다 뭐다, 환경이 안 좋아서 공기 질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서울에서 이렇게 공기 좋은 곳도 드물 거예요. 저기 앞마당은 텃밭으로도 활용 가능하고요. 전 세입자는 상추며 고추며 호박이며, 뭐든 주렁주렁…….”

주혁은 말하기 좋아하는 중개인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 테라스에 나가 보았다. 중개인이 자랑하는 전망은 그저 그랬다. 낡은 빌라들과 특별할 것 없는 골목길,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들이 만드는 무질서한 풍경은 그저 평범했다.

여름의 초입임에도 백련산을 뒤로해서인지 벌레 소리는 우렁우렁하고, 골목이 좁아 교통은 불편하니, 필시 팔기 쉬운 집은 아닐 거였다. 중개인이 제시한 가격이라면 강남 한복판 아파트는 안 돼도 서울 교통 좋은 목에 이 정도 연식 된 아파트는 살 만할 테니. 그럼에도 가격을 낮출 수 없는 건 리모델링한 인테리어와 이 정도 넓은 평수가 아까워서일 거였다.

이어 중개인도 주혁을 따라 테라스에 들어왔다. 중개인이 또 무어라 떠들려는 찰나, 학교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 저기 고등학교가 하나 있어요. 이제 애들 하교 시작하겠네. 아직 미혼이시니 상관은 없겠지만, 이 동네가 학군도 나름 괜찮아요. 저 고등학교가 옆 동네 부촌이랑 학군이 겹쳐서 부잣집 애들도 몇몇 있답디다.”

멀리 운동장과 교문이 작게 보였다. 그리고 하나둘 건물을 나오는 고등학생들도. 잘은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교복이 눈에 띄었다.

주혁이 저 학교를 다녔던 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무어라 웃고 떠들며 골목길 사이사이를 지나다닌다. 방랑하던 주혁의 시선이 멈춘 건 어느 여학생에게서였다. 책을 손에 들고 고개를 묻다시피 숙인 채 홀로 걷는 여학생.

“집주인이 가격을 좀 낮출 생각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말 좀 잘해 보면 지금 가격보다 일이천 정도는 더 낮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별로 말이 없는 주혁의 태도가 불안하였는지 중개인이 아까 전의 기세 좋은 목소리보다 조금 뭉개진 투로 말을 붙였다.

시끄럽다, 생각하며 주혁은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계약하겠습니다.”

“네, 네?”

“계약 가능한 날짜와 시간, 알려 주세요.”

중개인의 입이 귀에 걸리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주혁은 집을 나왔다. 녹이 슨 철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여닫힌다. 사실 이 집의 대문을 볼 때까지만 해도 계약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애초, 이 동네에 집을 보러 온 것 자체가 순간적인 충동이었으니까.

시작은 지겨움이었다. 사내 술꾼으로 알아주는 구조조정본부장과 회식을 한 새벽, 그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였다. 결국 아예 밤을 새 버리자, 작정하고 부엌에 들어가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어스름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겨워지고, 그다음엔 그가 그곳에서 산 시간들을 헤아리다가 이사를 가야겠다, 생각했다. 이사를 간다면 어디로, 자문했을 때 불현듯 떠오른 동네가 이곳, 홍은동이었다.

대문을 나오자 중개인이 볼멘소리를 한다.

아니, 누가 이 앞에 차를 대 놨어.

문 앞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중개인은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주혁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이 동네가 이렇게 경우 없이 막 차 대 놓고 하는 동네가 아닌데, 하며 말을 흐리는데 그 차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오고 주혁에게 묵례를 한다. 어라라. 중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약하기로 하셨습니까?”

“네.”

“그럼 제가…….”

“아뇨. 홍 실장님은 별로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

“사장님, 여기서 주는 명함은 받지 마시고 여기로 연락 주세요.”

주혁이 퍽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연락처를 건넸다. 옆의 홍 실장이라는 사람이 가슴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다 아쉽게 집어넣는다. 중개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혁의 명함을 받았다. 곧 주혁이 묵례를 하고 차에 오른다. 홍 실장이라는 사람도 주혁을 따라 중개인에게 묵례를 했을 때, 중개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중개인은 저들의 세련된 차가 낡은 길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아연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명함을 확인했다.

꼴깍, 침을 삼켰다.



* * *



출근 없고 야근 없는 아름다운 주말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서은은 세탁기에 이불을 넣고 돌렸다. 이제 좀 있으면 더워질 테니 얇은 이불을 꺼낼 요량이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때늦은 아침을 먹고 베란다에서 선풍기를 꺼내 와 먼지를 닦았다. 이불을 널고 청소를 하고, 그러다 유월의 햇살이 나른하여 다시 또 낮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오후 네 시였다. 정서은 너 정말 잉여롭구나,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백련산 산책 길이라도 한 바퀴 돌려다가, 덥고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발을 돌렸다. 그러다 결국 도착한 곳이 홍은슈퍼였다.

이 동네의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오래되었지만 그중에서 제일 오래된 게 아마 이 슈퍼와 주인 부부일 것이다. 서은의 식구들이 이곳에 터를 잡기 전부터 있었던 홍은슈퍼.

아저씨, 아줌마였던 주인 부부는 어느덧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리어도 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오기를 반복하는 중에도 이곳 홍은슈퍼만은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홍은슈퍼의 주인 부부는 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은과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이기도 했다.

서은이 슈퍼에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이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느리게 움직이는 입술을 보며 서은은 멋쩍게 웃었다. 바빴어요, 대충 대꾸하고는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 산 지 몇 년째더라. 초등학생 무렵부터였으니, 십 년이 훨씬 더 넘었네. 전세와 월세를 전전하다가 처음 ‘우리 집’을 갖게 되었을 때. 아빠는 소년 같은 얼굴로 뿌듯이 웃으며 ‘여기가 앞으로 서은이 집이야.’ 말하였다.

생각을 하다 서은은 허허로이 웃는다. 지금은 그 집도 팔고 근처의 빌라에 다시 세를 얻었다.

조금 덥기는 했어도 게으르게 흐르는 시간과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서은은 아이스크림 입구를 물어 쪽 빨았다.

길바닥 위로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돌담에 몸을 기대어 잠든 고양이 한 마리를 보다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갈 즘 서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오르막길에 있는 주택이었다. 서은의 빌라와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그 집의 테라스 창문에 못 보던 커튼이 펄럭였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참외 한 봉지를 사며 물었다.

“저 집, 팔렸어요?”

“응. 꽤 오래 비워져 있다 싶더니 드디어 팔렸나 봐. 소문으론 저 집 산 사람, 부자라대. 근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저기 첨 가구 들였을 때가 벌써 한 달도 더 전이야. 그 뒤로 두어 번 트럭도 왔다 갔다 했는데. 근데 사람이 안 보여. 저 집이 돈 장난 하기 좋은 집도 아니고, 안 살 거면 집은 왜 샀나 몰라.”

돈이 많아서 돈지랄하는 갑지. 플라스틱 의자에 파리채를 들고 앉아 있던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이었다. 입이 커서 항상 과장되게 말하는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구수한 말투를 상상하며 서은은 살풋 웃음을 지었다.

참외 봉지를 달랑대며 집으로 향했다. 집의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간장을 사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슈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를 보았다.

조금 전의 서은처럼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물고 핸드폰을 보는 남자를.

발을 멈추었다.

남자가 고개를 일으켜 눈이 마주치려던 찰나, 서은은 조용히 몸을 돌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홍은슈퍼 주인아줌마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언덕 위 집의 주인이라 했다. 하지만 진짜 집은 따로 있고, 홍은동은 어쩌다 가끔씩 들르는 집이라고. 그렇게 자주도 아니고, 남편 말대로 돈 많은 놈이 돈지랄이라도 하는가 보다고.

다행이었다.



* * *



작은 일탈이었다. 모처럼 일정이 비어 있는 토요일에 차를 끌고 홍은동으로 간 건, 다분히 충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야근을 했는데 눈을 뜨니 오전 열 시였고 출출한데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쪽지를 발견한 것 역시 우연이었다. ‘홍은동 음식, 가구 모든 준비 다 되었습니다.’ 하는. 신경 쓰지 말라 했는데 기어코.

홍은동에 집을 사 놓고도 일이 바쁘고 거리가 멀어서 자주 찾지 못한 터였다. 여전히 그가 몸을 누이는 집은 여의도의 오피스텔이었다. 그래도 집이랍시고 샀는데 한 번은 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가 없는 동안 틈틈이 홍 실장이 사람을 보내 놓았는지 집은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냉장고엔 가지각색의 반찬이 들어가 있고 테라스엔 커튼을 달아 놓고 가구에는 먼지 같은 것 없이 깔끔하게.

쓸데없는 일을 했네,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중개인이 자랑했던 백련산이라도 올라 볼까 하였다.

하지만 곧 오후에 애널리스트와 약속이 잡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홍은동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이곳에 집을 사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발길을 돌리다 슈퍼 하나를 보았다. 이 더위에 맥주 한 캔이 간절했지만 운전을 해야 하니 안 되고, 대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잠시 파라솔 아래 가판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메일을 확인했다.

첨부된 기사와 그래프를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내고,

그러다

여자를 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이리로 오고 있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몸을 돌리고 빠르게 어디론가 가 버리는 여자를.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여자의 긴 머리와 등과 뒷모습이 익숙하였다.

누구지.

기억을 제대로 더듬기도 전에 여자는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