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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미국에서 틈틈이 서은에게 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하루 내지 이틀이면 돌아왔다. 한국에 있을 땐 나누지 않았던 대화를 미국에 가서야 나누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오늘 우리 급식은 이거였는데 그쪽 네 급식은 맛있는지. 영어는 많이 늘었는지, 친구는 생겼는지. 새 학년의 새 담임은 어떠한지, 서울과 캘리포니아는 어떠한지. 각자의 풍경이 담긴 사진을 주고받기도 했다.

어느 순간 서로의 일상이 바빠지고, 메일을 보내고 받는 기간이 길어졌다. 각자 대입 준비가 한창이었을 때라 서로 이해해 주었다. 주혁의 대학이 먼저 결정되었고, 그다음으로 서은의 학교가 결정되었다. 서로 축하를 했다. 맥주잔과 소주잔 사진을 보내며 메일 속에서 짠, 건배도 했다. 서울에서 만나면 서은이 밥을 사고 주혁이 술을 사기로 약속도 하였다.

그리고 그즈음이었다. 주혁이 메일을 보내자 없는 주소라고 반송되었다.



나쁜 계집애. 매정한 계집애.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다시,

흐르는 시간과 분주한 일상 속에서 그는 서은을 잊었다.

그 정도의 인연이었다. 얕지는 않고, 깊지도 않은.

그렇게 잊히고, 앞으로 잊는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저 이제 가 봐야…….”

“매정하시네.”

여전히.

서은은 돌렸던 몸을 다시 주혁에게로 틀었다. 그래도 동창인데. 남자가 낮게 읊조리는가 싶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습관처럼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가 익숙했다.

“반가워서 인사나 좀 하려 했더니 바로 내빼시고..”

무색하다는 듯 말하지만 여유가 흐르는 눈빛이 연기임을 알려 준다. 이어 다정한 눈이 도발하듯 꽂혀 왔다.

“나는 네가 반가운데, 너는 반갑지 않은가 봐?”

남자의 밝은 눈동자가 나뭇잎 사이의 빛살을 튕겨 낸다. 튕겨진 빛살이 따갑게 가슴을 치는가. 서은은 우산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솔직하구나, 싶었다. 여전히 키가 크고 잘생겼고. 오만한 듯 우아하고. 유려한 듯 나른하고. 서은의 관찰하듯 살피는 시선에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남자는 외려 보란 듯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비에 젖어 싱그러운 풀 냄새가 바람과 함께 코끝에 스몄다. 소낙비가 내려 더위가 누그러지고, 내리는 태양 빛은 투명하고 찬란했다. 그 향과 태양이 남자를 닮았다.

“……그럴 리가요.”

말하며 서은은 선선히 웃었다. 순한 듯 서늘한 웃음이 주혁의 가슴에 고요한 파랑을 일으키다 가라앉는다.

“여기서 잘 보이면 상무님 라인 타는 건데, 반갑지 않을 리가. 곧 퇴사할 예정이라 아쉬울 뿐입니다.”

서은은 담담한 어조로 농담인 듯 아닌 듯, 조금 속물적이고 조금 당돌하게 말하였다. 주혁은 서은의 말에 감추어진 속뜻을 짐작한다. 퇴사하면 곧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게 될 테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때, 하고 선을 긋는.

서은의 의도된 속물과 숨겨진 의도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가벼이 웃었다.

“많이 컸네.”

“……딱 상무님 나이 드신 만큼만 컸습니다.”

“아직 나이 드실 정도의 나이는 아닌데.”

“저도 많이 컸다는 말 들을 정도의 나이는 지나서요.”

“이런, 내가 잘못했네.”

주혁의 능청에 서은이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줄곧 여자를 감쌌던 기묘한 공기의 울타리가 깨지는 듯했다. 주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미팅까진 넉넉하다. 그렇게 손목을 들고 내리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오늘 이렇게 뵈어서 반가웠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은이 홀로 인사를 마치고 등을 보인다. 그 약빠른 동작을, 주혁은 낮게 조소했다.

“데려다줄게.”

서은이 몸을 돌린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이다.

“데려다준다고. 방향이 어디야?”

“아뇨, 괜찮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거기까지.”

“그러실 필요는, 바로 앞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럼 그 바로 앞까지 배웅해 줄게, 라고 말하면 넌 또 다른 핑계를 대겠지.”

단번에 속내를 읽혔지만 서은은 부정도 않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얼굴엔 겹겹의 가면이 씌워진 채로.

“상무님과 사적인 용무를 만드는 건 부담스러워서요.”

스스로도 조금 안타깝다는 듯 짓는 서은의 표정은 정중을 가장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 거짓이 불쾌함과 동시에 그를 자극했다.

문득 시선을 내렸다. 서은의 두 손이 우산을 공손히 쥐고 있다. 마디마디가 불룩한 것이, 두 손에 힘을 준 듯했다.

다시 여자의 손등과 손목을 타고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어쩌면 그를 보는 것이 여자에겐 무료한 일상의 일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사내 통신을 통해 그를 곱씹고 홍보 자료를 만들며 그의 얼굴을 되새길 거였다.

그런 상사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난다 하여도 하등 놀랄 것이 없겠지. 그를 앞에 두고 속을 감추느라 애쓰는 게 마뜩잖았지만 여타 직원들과 다를 것 없이 하늘 높은 상사를 앞에 둔 부하의 고충이라 치부할 수 있었다.

흥미 없어 보이는 여자를 앞에 두고 홀로 흥을 내며 광대놀음 하는 데에 열을 내고 싶진 않다.

성가시고, 무의미한 일.



그래.

서은이 안개 같은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루한 합쇼체를 쓰지 않았더라면, 홍은동에서 서은을 세 번이나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서은이 그의 것과 같은 색의 우산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는 서은을 그대로 보냈을 거였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그러지 않은 서은의 잘못이었다.

주혁은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언젠가의 서러움을 끄집어냈다.

“메일 주소 바뀌었던데.”

“……네?”

“그것도 모르고 난 계속 기다렸거든.”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진부한 핑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혁은 빙긋 웃었다. 웃고 있지만 묘하게도 겉으로 드러나 읽히는 감정은 없다.

“밥 사기로 했던 것도 기억 안 나요?”

그는 서은을 따라 말에 예의를 갖춰 보았다. 서은이 이런 깍듯한 예의를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맞추어 줄 수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요.”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말이다. 말을 마치고 서은은 눈으로 더 하실 말씀 없나요,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없으면 이만 가도 될까요, 하는 얼굴이다.

여전히 어림없는 일이었다.

“메일은 씹고, 오랜만의 인사는 모르는 척 연기하고, 내 우산을 가져가고, 내 신발도 밟고, 전에 했던 약속은 기억이 안 난다라.”

“……죄송합니다.”

“그뿐?”

“……고등학교 졸업할 즘 메일을 해킹당해서 주소를 없앴어요. 알고도 모르는 척한 건 아니고, 혹시나 했지만 확신이 안 들었습니다. 우산과 신발은, 제 불찰입니다. 우산은 돌려드렸고 신발은 수선비를 드리는 게 당연한데 수선비를 필요로 하진 않으실 것 같아서요.”

“뭐든 성의를 보이는 게 중요한 거죠.”

“……수선비를 드리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고.”

서은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주혁을 올려 보는 서은의 얼굴이 아주 오래전 ‘왜요?’ 할 때의 그 얼굴과 닮아 있다.

“그럼, 뭘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저 깍듯한 경어체라니. 주혁의 안에서 불쑥 충동이 일었다.

“일단은.”

서은의 지루한 합쇼체를 깨뜨리고 싶다. 서은의 한숨 같은 미소를 흩트리고 싶다. 서은의 가면 같은 얼굴을 벗겨 내고 싶다.

“번호나 줄래요?”

주혁이 얼굴에 천연한 미소를 띠었다.



#2. 유쾌와 불쾌


비틀즈의 음악과 커피 향이 잘 어울리는 비 오는 수요일이다. 비 오는 수요일이면 아빠는 차 안에 꼭 비틀즈의 음악을 틀었다. 음악을 틀며 꼭 빠뜨리지 않는 멘트도 있었다. ‘네가 배 속에 있을 때 엄마랑 많이 들었어.’와 ‘이래 봬도 아빠가 한땐 비틀즈 조지 해리슨 닮았다는 말 꽤 들었다니까.’ 하는.

서은이 태어나기 전 아빠는 기타 연주가였다고 한다. 경산에서 음악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혈혈단신의 몸으로 상경하여 밴드를 만들었다 했다. 무슨 가요제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게 된 것도 그 기타 덕분이라 했다. 기타는 그 시절 흔한 악기가 아니었는데 기타를 계기로 엄마와 말을 트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청혼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해서도 아빠는 음악인의 꿈을 키웠다. 결혼을 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 했다.

그러나 연예계 데뷔를 목전에 두고 사기를 당해 그길로 꿈을 접었다. 곧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었고 돈이 필요했다.

새벽이면 집을 나가 일을 구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했고 공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어느 날 윤철의 성실함을 알아본 어느 사장의 추천으로 서정가(家)에 들어가게 되었다. 몸이 편해지고 월급이 올라 엄마가 기뻐했다. 홍은동에 집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가난은 끈질기고 지리멸렬하여 결국 엄마는 윤철과 서은을 떠났다.

그래도 윤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은도 무너지지 않았다. 윤철의 손을 잡고 버티어 이겨 냈다.

지금도 서은이 사랑해 마지않는, 성실하고 자상한 아빠였다. 그 성실함과 사람 좋은 성격 덕에 아빠는 서정가에서 꽤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신뢰를 받고 신임을 얻었다 한들 그들은 고용주였고 아빠는 피고용인이었다.

그리고 서주혁은 그 집의 둘째 아들이었다.

별로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 불편하고 서먹했다. 서은이 볼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서은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서은은 할 수 없던 것을 해내는 남자를 보며 시샘을 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