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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망설이던 여자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매력적인 남자의 미소 앞에 5분을 채 버티지 못한다. 보기보다 나이가 어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귀찮은 일이라도.”

막 입을 열려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그녀의 어깨 뒤로 웬 낯선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진즉부터 요한에게 닿아 있다.

어두운 금발을 말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는 맞춘 듯한 검정 수트 차림이었다. 중키를 훌쩍 넘는 장신에다 수트 속에 숨은 몸매마저 다부져 보였다. 요한은 재빨리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역시나 저만치 뒤쪽, 보도에 바짝 붙여 세운 검은색 세단이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다. 롤스로이스. 익숙하고도 낯선 엠블럼에서 압도적인 돈 냄새가 풍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여자는 놀란 기색 없이 대꾸하더니 가볍게 몸을 돌려 세단으로 향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요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치면 두 번 다시 마주할 리 없는, 수많은 무리 속의 행인을 대하는 것처럼.

여자가 차로 향했으나 수트 차림의 남자는 앞질러 가지도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럴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선 채로 그저 요한만을 뜯어보았다. 여자는 제 손으로 뒷좌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사라졌고, 남자는 상석에 앉은 여자를 기다리게 하면서도 아랑곳 않았다. 연인이라기엔 명백히 사무적이고 운전기사라기엔 무례하게도 고압적이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남자는 여전히 보도 위에 선 채 요한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이마와 어두운 금발. 쾌청한 하늘의 색을 닮은 푸른빛 홍채. 뉴욕에는 저런 아일랜드계 혈통이 흔하다. 위협인지 호기심인지 모호한 시선의 정체를 가늠하려 요한이 고개를 갸웃했을 때, 남자는 드디어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세단을 향해 걸어갔다.

자동차로 다가간 그가 자연스럽게 운전석 문을 열었다. 홀로 남아 멀뚱히 서 있던 요한은 입맛을 다셨다. 두 남녀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제 곁을 지나칠 때는 기분이 조금 나쁜 것도 같았다. 검은색 세단은 거침없이 다운타운을 향해 멀어졌고, 그는 잠시 후에야 잊고 있던 커피를 떠올렸다. 5애비뉴와 72스트리트. 여기서 가장 가까운 가게는 렉싱턴 애비뉴에 있다.

요한은 성긴 자동차들 사이로 길을 건넜다. 보행자 신호에 여전히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다. 도로 이쪽으로 태평히 건너온 다음 걸음을 멈추고 다운타운 쪽으로 돌아섰다. 동일한 방향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들의 꽁무니 사이로 그는 잠시 시선을 놓았다.







세단의 승차감은 묵직하고도 고요하다. 분주한 맨해튼과 완전히 차단된 자동차 실내는 마치 딴 세상 같다. 음악도 대화도 없는 무거운 공간에서 정교한 엔진이 돌아가는 미미한 소음만이 잘게 흩어졌다.

제인은 매끄러운 가죽 시트에 깊숙이 등을 묻은 채 차창 밖으로 의미 없는 시선을 묶어 두었다. 정지신호를 받은 자동차가 플라자 호텔과 카르티에 매장 사이에 멈춰 섰다. 미드타운 5애비뉴는 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쇼윈도가 화려해지는 12월은 특히 그렇다. 앞으로 2주 후면 크리스마스고, 전날 내린 폭설까지 더해져 맨해튼의 연말 분위기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센트럴 파크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관광객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모여 있었다. 마부석을 비워 두고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젊고 늙은 남자들. 그 새삼스러울 것 없는 풍경을 그녀는 무상히 바라보았다. 히팅이 알맞게 설정된 차 안은 덥지도 춥지도 않다.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전방을 향해 시선을 둔 채 남자가 물었다. 한 시간짜리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아파트로 돌아가 더운물에 한참 동안 목욕을 한다. 정해진 동선을 이미 열흘째 수행하는 남자가 새삼 행선지를 물을 리 없었다. 질문의 요지를 아는 제인이 차창 밖에 눈을 둔 채 입술을 뗐다. 짤막한 말투는 퉁명스럽다.

“아무 데도 안 가.”

지난주 대학들의 가을 학기가 끝났다.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겨 두게 됐으니 졸업 기념으로 연말은 유럽에서 보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도 좋고 이탈리아의 어느 조용한 섬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제인은 탱탱한 대구 살을 씹으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졸업 기념이라고. 4년간 허락한 자유에 대한 관대한 종지부겠지. 속으로 시부렁댔지만 입 밖으로 꺼낼 용기까지는 없었다.

“모처럼 좋은 기회일 텐데요. 해외여행이라니.”

놀리는 말이 분명하건만 발끈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뉴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뉴욕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지 4년째였다. 부아가 났으나 냉랭한 척 무신경을 가장했다.

“당신도 따라올 거잖아.”

“아마도 그렇겠죠.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안 간다고. 나도 당신 따위랑 연말 보내고 싶은 생각 없어.”

역시나. 무신경을 가장한 지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가 대뜸 목에 핏대를 세워도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미동도 않았다. 오히려 코끝으로 얕게 웃은 것도 같다. 제인은 이제 정말로 입을 다물리라 다짐하며 차창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파랗게 갠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바삐 오갔다. 두터운 외투와 털모자, 목도리 위로 드러난 얼굴들이 하나같이 해밝았다. 제인은 관광객임이 분명한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들은 한결같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얼어붙은 도시를 기쁘게 누비고 있었다.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차내에서도, 대기에 노랗게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제인의 귀에는 들렸다. 놀라운 일이다. 이 차갑고 오만한 도시에서 누군가의 시간은 저토록 행복할 수 있다니.

돌연 밀실에 갇힌 듯 숨이 막혀 와, 그녀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디오라도 좀 틀어 봐.”

말하며 맵 포켓에서 생수병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때맞춰 주행 신호를 받은 세단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안정적으로 다운타운을 향해 달리고, 제인은 5애비뉴 양쪽으로 늘어선 상점들을 바라보며 병을 기울여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죠, 미즈 제인 헤닝.”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인 헤닝. 구태여 저 이름을 부르는 것도 역시 놀리려는 의도임을 안다. 주파수가 맞춰진 라디오에서 지루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제인은 입술을 깨문 채 오른쪽 차창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미스터 베런 콜린스.”

그가 룸미러를 통해 이쪽을 힐끗 쳐다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채 마주 보지 않았다. 퉁명스런 말은 비스듬히 던질지언정 정면으로 눈을 마주칠 배짱까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구두 위로 발가락 긁듯 어설프게 긁어 대 스스로 갑갑증만 돋울 뿐이다. 잠자코 있을 만큼 온순하지 못하고 구두를 벗어 던질 용기도 없다. 완벽히 순종하지도,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한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난 걸까. 제인은 내키지 않는 오케스트라를 억지로 들으며 쓸데없이 화려한 상점들의 쇼윈도를 바라보았다.

띠띠띠.

록펠러 센터를 지나자 전화기가 울었다. 베런이 콘솔박스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망설임 없이 입을 뗐다. 번호를 아는 사람이 한 명뿐인 모양이지. 그녀는 무척이나 뻔한 생각을 해 보았다.

“예, 보스.”

그의 목소리는 고저가 불분명하다. 늘상 지독히도 무료해 보이는 무표정과 썩 잘 어울리는 말투였다. 그 심심한 목소리는 단답형의 대답만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1분도 채 채우지 않은 채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정면을 향해 통보한다.

“아파트로 오신답니다.”

창밖을 보던 제인이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지금?”

뻔한 질문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못마땅한 심정을 밖으로 꺼내려면 무슨 대꾸라도 해야 했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에도 베런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다만 말끝에 미약한 한숨.

“예. 지금.”

무어라 말할 거리를 찾듯 입술을 오물댔으나 그만두었다. 앞으로 당겼던 상체를 좌석 시트에 던지듯 파묻는 것만이 불만족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상태로 제인은 두 눈을 감았다. 불현듯 한기가 느껴져 어깨를 움츠렸다.

‘안 추워요?’

방금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쾌활한 톤이었고 비아냥과 호기심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멋을 부려 꾸미지 않은, 가진 그대로의 순정한 음성. 청바지에 두툼한 파카를 입은 남자는 말끔한 차림새였으나 영락없이 뒷골목 냄새를 풍겼다. 틀림없이 브루클린이나 퀸즈 출신이리라고 그녀는 보는 순간 확신했다.

‘오늘 날씨 드럽게 추운데.’

장난기가 드글드글한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특히 유리구슬 같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뇌리에 꽤나 선명히 남았다. 경박한 말투와 건들대는 몸짓이 볼 것도 없이 한심한 치였다. 대화는커녕 시선조차 마주하기 불유쾌한 타입. 그런데도 지금 그 건달 같은 남자를 떠올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제인은 알지 못했다.

‘요한 리. 당신은?’

그가 동양인이기 때문일까. 듣는 순간 몰래 움찔했던, 너무나도 친숙한 성씨를 쓰기 때문일까. 아마도 같은 곳에 두었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혈통의 뿌리 따위에 속절없이 끌렸던 걸까.

한심하게도.

딱한 생각에 잠긴 여자를 싣고 세단은 좁은 골목을 잘도 누볐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 감았던 눈을 뜨자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아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지않아 자동차가 멈춰 설 테고 아파트로 올라가면 곧 그가 도착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 아마도 그는 출발한 뒤 통보하듯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제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Frickin freezing.”

룸미러로 이쪽을 넘겨다보는 시선이 다시 느껴진다. 드럽게 춥네. 그녀는 혀에 걸리는 낯선 단어들을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는 제풀에 키득거렸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않았고, 뒷좌석의 여자는 모처럼 입가에 웃음기를 묻힌 채 익숙한 창밖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드럽게 춥네.

요한 리. 그 건달 같은 남자의 말이 옳았다. 오늘은, 확실히 드럽게 추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