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베런은 일방통행 도로를 따라 솜씨 좋게 차를 몰았다. 훤히 아는 길목들을 능숙하게 지나 유백색 건물 입구 앞에 정확히 세단을 세웠다. 건물에서 나온 도어맨이 세련된 동작과 미소로 차 문을 열자 제인이 희미한 억지웃음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금색으로 깃을 장식한, 새것처럼 빳빳한 유니폼이 그녀의 눈에는 영국 병정처럼 좀 우스꽝스럽다.

“운동은 어떠셨습니까, 미스 비첼리오?”

“좋았어요. 고마워요, 윌.”

의례적인 질문과 더 의례적인 대답이 한 차례 오갔다. 제인은 도어맨 윌 카터가 열어 준 문을 통과해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남자는 능숙하게 열쇠를 꽂아 전용층 잠금을 풀고 9층을 누른 다음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 여자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섰다.

9층 펜트하우스에는 젊은 동양인 여자가 4년째 살고 있다. 리오나르도 비첼리오의 이름으로 임대된 최고급 아파트에 혼자 사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말수는 무척이나 적은 여자. 4년 전 처음 입주했을 때는 하도 말이 없어 벙어리인 줄 알았다. 매일같이 마주치면서 실수로라도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가 지나치리만치 주변을 경계했고, 장례식에 참석한 추도객처럼 언제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의 신분을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기껏해야 십 대 후반의 어린 정부를 위해 거액의 임대료를 몇 년씩이나 내주는 물러 터진 남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비첼리오라는 남자는 이곳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밤을 보내고 간 적은 카터가 알기로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의 정체는 뭘까. 건물을 통틀어 유일한 동양인 세입자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은 다행히도 카터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고, 재바른 청소 직원 하나가 임대 사무실을 통해 답을 알아냈다. 그래도 역시 정부일 거란 쪽에 돈을 걸었던 카터는 덕분에 피 같은 20달러를 잃고 말았다.

“오빠분이 방금 올라가셨습니다. 비첼리오 씨는 언제 봬도 참 멋진 분이에요. 조금만 일찍 도착했다면 같이 들어가실 뻔했네요.”

“그러게요. 그럼 카터 씨 일이 줄었을 텐데.”

“별말씀을. 저는 엘리베이터 안내를 무척 좋아합니다.”

퍽이나. 제인이 비스듬히 입술을 비틀었다. 모자를 쓴 도어맨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깔린 붉은색 카펫으로 시선을 옮겼다. 점퍼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어 열쇠를 집었다. 얼음 조각 같은 열쇠가 손바닥 안에서 뱅뱅 돌다가, 차갑던 쇳덩이에 체온이 옮아 미지근해졌을 즈음,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미스 비첼리오.”

깍듯한 인사와 함께 도어맨이 사라지고 난 뒤 제인은 마호가니 문 앞에 홀로 섰다. 빅토리안 스타일로 음각해 간유리를 넣은 문은 중세시대 교회의 것처럼 장식이 웅장하다. 열쇠를 꽂아 넣으려다 그만두고 빈손을 뻗었다. 잠기지 않은 문은 쉽게 열렸다. 제인은 외출할 때 결코 문단속을 잊지 않는다. 열려 있는 까닭을 알고 있는데도 별수 없이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섰다.

펜트하우스는 복층 구조다. 두 개의 층을 관통하며 높게 트인 천장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 놓인 원목 테이블을 중심으로 소파와 각색의 안락의자들이 둘러 있다. 거실 한쪽 벽면을 채운 4층짜리 장식장은 온통 책으로 차 있었다. 대부분 영어로 쓰인 책이지만 이탈리아 서적도 간간이 섞여 있는데, 제인의 이탈리아어는 실로 형편없는 수준이라 8할 이상은 화보집이었다. 이름난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의 최신 컬렉션이 수록된 패션잡지도 한쪽에 잔뜩 쌓여 있었다.

러닝화를 벗고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부러 소리를 죽이지도, 들으란 듯 요란스레 굴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행동하기 위하여 그녀는 오히려 애를 써야 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운 점퍼 끝단을 잡아 아래로 두어 번 끌어 내렸다. 신축성 없는 겨울용 러닝점퍼는 정확히 허리까지만 덮는다.

분명하게, 실내에서 남자 향수 냄새가 풍겼다.

코에 익은 향내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 거실로 향하는 복도식 통로에는 추상화 유화들이 예닐곱 점 잇달아 걸려 있다. 그림들을 지나 거실에 가까워질수록 향수 냄새는 점점 더 짙어졌다.

남자는 거대한 유리창 앞, 물소 가죽을 씌운 윙체어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몸에 꼭 맞는 네이비 컬러 수트와 새하얀 드레스 셔츠가 완벽하게 어울렸다. 적당히 목을 조인 셔츠 깃 아래 기하학적 무늬의 타이. 언제나처럼 잘 다듬어 뒤로 넘긴 고동색 머리칼은 무서울 정도로 빈틈이 없다. 하얀 셔츠 소매 끝에 은색 커프 링크. 저토록 수트가 한 몸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를 제인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의 기척을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상대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눈을 들지 않았다.

“리오.”

한숨처럼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든다. 창을 등져 역광 아래 숨었음에도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다.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낯엔 아무런 감정도 지나지 않았다. 리오는 다만 짧게 제인과 눈을 맞춘 다음 무릎까지 드러난 맨다리에 시선을 주었다. 짙은 눈썹 아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

마침내 울린 남자의 음성은 묵직한 저음이다.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무엇이든 뜻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선명한 위압감. 남자에게서 5미터쯤 떨어져 선 제인은 기꺼이 인정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속절없이 압도된다.

“준비하고 나와. 한 시에 예약해 뒀어.”

리오가 말했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들여다보고는 다시 읽고 있던 책장으로 눈을 돌린다. 등받이가 높고 가죽이 단단한 윙체어에 그림처럼 앉은 남자. 그 모습을 건조한 눈길로 보던 제인이 한숨처럼 읊조렸다.

“십오 분만 기다려요(Fifteen minutes).”







요한은 렉싱턴 애비뉴의 오래된 델리에서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기갈난 듯 마셨다. 속이 더워지자 허기가 몰려와 땅콩버터를 바른 베이글도 한 개 주문했다. 베이글을 가져다준 웨이트리스가 청하지도 않은 커피 한 잔을 리필해 주었다. 주홍빛 립스틱을 바른, 그 앞에서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려 애를 쓰던 금발의 웨이트리스는 터질 듯한 젖가슴이 인상적이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블라우스 단추 사이로 레이스 브래지어와 깊은 가슴골을 충분히 감상하고는 베이글을 먹어 치우자마자 미련 없이 가게를 나왔다. 말끔히 비운 커피 잔 옆에 후한 팁을 놓아두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러시아워를 한참 지난 이른 오후의 지하철은 좌석이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조도가 낮은 형광등 아래 띄엄띄엄 앉은 승객들은 저마다 책을 읽거나 신문을 펼쳐 들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제 머리만 한 헤드폰을 쓰고 끄덕끄덕 리듬을 타는 젊은 치들도 간혹 보였다. 열차가 다운타운으로 가까워질수록 승객들의 평균 연령은 낮아졌고, 객차 내 분위기는 유니언 스퀘어를 지난 후 완전히 바뀌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화려한 문신, 피어싱 따위를 매단 남녀들이 열차에 올라타기 시작했을 때 요한은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뉴욕대와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등진 채 동쪽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가 사는 곳은 맨해튼 동쪽 구석의 이스트 빌리지. 꿈을 좇아 뉴욕에 온 청년과 대학생들, 뮤즈를 찾느라 술과 담배와 환각제에 찌든 괴짜 예술가들이 일본계 이민자와 더불어 사는 작은 동네였다. 요한은 그곳에서도 가장 집세가 싼 허름한 5층짜리 건물 반지하에 살았다. 아파트 주민들이 공용으로 쓰는 세탁실이 곁에 있어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걸 제외하면 딱히 불만은 없는 곳이다.

“안녕, 리.”

아파트로 돌아가기 앞서 단골 철물점부터 들렀다. 낯익은 가게 주인의 인사에 응하며 요한은 카운터 맞은편 끝에 놓인 진열대에서 검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를 세 통 집었다. 파란색과 노란색은 맨 꼭대기에 있어 양팔을 쭉 펴고도 발돋움을 해야 했다. 바로 곁에 사다리가 있었지만 그는 몸을 길게 늘리는 쪽을 택했다. 차갑고 딱딱한 캔이 아슬아슬하게 손끝이 닿았다.

“별일 없지?”

스프레이 캔 일곱 개를 카운터 위에 올렸다. 철제 캔들이 저들끼리 부대끼며 깡깡대고, 턱수염을 구름처럼 기른 중년 남자가 종이봉투를 꺼내 솜씨 좋게 물건을 쟁여 넣었다. 두툼한 손의 모양과 달리 날렵한 놀림을 보며 요한이 대답한다.

“맨날 그렇죠 뭐.”

말하며 습관적으로 뒷주머니 쪽에 손을 가져갔다. 지갑 대신 딱딱한 물체만 만져지자 그제 아차 싶었다. 자연스럽게 팔을 거둬 점퍼 지퍼를 내리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게 주인이 씩 웃었다. 그러나 태연한 얼굴에 섞인 경계의 빛을 요한은 놓치지 않는다. 봤구나. 확신한 뒤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뉴욕이잖아요.”

머리 위 높다란 데 놓인 캔을 집으려 버둥댈 때는 등허리에 꽂아 둔 리볼버가 훤히 드러났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뉴욕 시내에서 총기 소지는 엄연한 불법이다. 작년에 취임한 루디 줄리아니 시장이 범죄에 대한 무관용을 선포한 후 시내 경찰들의 눈초리는 더욱 삼엄해졌다.

요한은 적당한 미소를 띤 채 주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여기 한 달에도 몇 번씩 와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무더기로 사 가는, 허리춤엔 권총까지 꽂은 대단히 의심스런 놈이 있다고 신고라도 당한다면 몹시 골치 아파질 것이다. 잠시간 말없이 마주 보던 남자는 다행히도 화답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몸조심하라구.”

“사장님도요.”

조금 더 밝게 웃으며 값을 치렀다. 묵직한 스프레이 캔이 담긴 커다란 봉지를 들고 철물점을 나섰을 때 청바지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울었다. 걸으면서 호출기를 끄집어내 번호를 확인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빈 공중전화가 보여 호주머니를 뒤졌다. 10센트와 25센트짜리가 네댓 개쯤 뒤섞여 있다. 동전은 충분했다.

슈퍼마켓 옆에 붙은 공중전화는 부스 없이 노출돼 있었다. 수화기를 집어 다이얼을 누르며 그는 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새로 녹음된 음성메시지를 재생시키자 예상했던 여자의 발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자기, 나야 트레이시. 맥주 열 병이랑 스프라이트 스물다섯 캔이 필요해. 이따 일곱 시에 코너에서 기다릴게. 오늘 저녁 일곱 시야. 이따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