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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굽은 콧대 아래 좁은 콧망울에서 헤픈 웃음과 담배 연기가 동시에 흘렀다. 호세는 중증이다. 틀림없이 밤새 에시드와 코카인, 니코틴과 알코올을 마구 섞어 퍼넣었을 거라고 요한은 확신했다.

마약이든 의약이든 모든 종류의 약물은 털어 넣기 시작하면 내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가 알기로 약쟁이의 결말은 대체적으로 그랬다. 피가 썩고 뇌가 녹는 줄 모르고 점점 더 많은 양을 들이마시다 스펀지처럼 온몸에 숭숭 구멍이 뚫리고, 그러다 어느 순간 심장이 낙엽처럼 바스라져 골로 가 버린다. 그런 식의 최후는 대부분 환각 상태에서 이뤄진다. 내가 나인지 남인지 숨을 쉬는지 시체가 됐는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치사하고도 무정한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그는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호세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반 토막 난 담배를 쥔 엄지와 검지가 눈에 띄게 덜덜 떨린다. 그러고 보니 움푹 패인 뺨이며 앙상한 손목이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다. 이 새끼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요한은 불식간에 눈살을 찌푸렸다.

“야, 어제 폴이 죽이는 여자앨 데려왔는데,”

“비즈니스부터.”

턱짓하자 호세가 손에 쥔 담배를 냉큼 입에 물었다. 오른손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빼더니 악수를 청하듯 세로로 세워 내민다. 큼직한 손바닥 안에 숨은 명함첩만 한 크기의 물건은 요한의 손에도 가볍게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건네받아 주머니에 넣은 다음 같은 방식으로 돈을 건넸다. 반으로 접어 고무줄로 고정시킨 백 달러짜리 지폐 뭉치. 순식간에 현찰을 받아 챙긴 호세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는다. 거래는 눈 깜짝할 새 끝났다.

“근데 걔가 혀 놀림이 아주 예술이더라고.”

“뭔 소리야.”

“폴이 데려온 여자애 말이야. 대학생이라던데. 대학교에선 그런 것도 가르쳐 주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학 가 본 사람한테 물어보든지.”

예술은 무슨. 니가 약에 쩔어 안 서니까 걔도 어떻게든 세워 보려 애쓴 거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요한은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포장을 벗겼다. 파인애플 맛 사탕을 혀 위에 굴리며 호세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고개를 짧게 저은 그가 아쉬운 듯 꽁초를 한 모금 더 빨더니 발치에 툭 버린다. 착실히 타던 담뱃불이 하얗게 얼어붙은 눈 위에서 픽 사라졌다.

“참, 너 퀸즈보로 브릿지는 언제 접수했냐?”

“정보력하고는. 그거 한 지가 언젠데.”

“와, 하여간 이거 존나 쿨한 새끼야. 나 엊그제 보고 깜짝 놀랐잖아. 거길 어떻게 올라갔대?”

“영업 비밀.”

“미친 새끼. 야, 너 언제 파티할 때 꼭 좀 와 주라. 세븐써리 내 친구라고 백번을 말해도 안 믿는다니까?”

대뜸 흥분한 호세가 요란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목소리가 치솟고 발음이 뭉개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약이 덜 깬 게 틀림없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대 요한은 의식적으로 파카 깃에 턱을 묻었다.

“근데 아직 못 잡았어?”

“뭐가.”

“그 쥐새끼 같은 놈 말야, 네 작품 쫓아다니면서 망가뜨리는 새끼.”

요한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잡아, 그걸.”

“브루스 그 개새끼라니까. 그 새끼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해? 세븐써리 그래피티를 어떤 새끼가 건드리냐고?”

눈 덮인 한겨울의 센트럴 파크는 몹시도 추웠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데도 공원이라 그런지 더 추운 것 같아 김이 펄펄 솟는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요한은 가볍게 주먹 쥔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입 좀 닥치고 이만 헤어지자.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호세가 나불대던 입을 슬쩍 다물었다.

“또 연락할게. 잘 지내고.”

“나야 돈만 주면 언제든.”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힌 다음 요한은 빠르게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온통 조깅하는 주민과 관광객뿐인 늦은 오전, 센트럴 파크에 마약단속반 사복 경찰이 잠복해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들은 지금쯤 으슥한 할렘가 골목에서 마리화나 피우는 잡범들이나 찾으려 개처럼 코를 킁킁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경찰이라면 나 같은 마약 조직 하바리쯤 얼굴만 봐도 잡아낼 수 있을 텐데. 요한은 헛짓만 하고 있을 뉴욕시경을 향해 보란 듯이 중지를 쭉 뻗어 주는 상상을 했다.

양손을 파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동쪽을 향해 걸었다. 비닐 포장된 묵직한 덩어리 때문에 오른쪽 주머니가 비좁았다. 정면을 보며 시가지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우거진 나목들 사이로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브라운스톤이 멀지 않다. 5애비뉴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가 어디 있더라. 그는 훤히 아는 맨해튼 골목의 지도를 머릿속에 펼쳐 더듬어 보았다.

잔잔하던 시야에 낯선 여자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불쑥 나타난 여자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맨다리를 절반쯤 드러낸, 무릎 위까지 오는 러닝 팬츠와 턱밑까지 지퍼를 채운 점퍼는 하나같이 똑 떨어지는 블랙. 여자는 노루처럼 가볍게 달려와 가까운 벤치 앞에 멈춰 섰다. 드러난 맨살에 절로 시선이 간다. 쳐다보기만 해도 제 다리가 다 시렸다. 한겨울에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하는 게 요즘 맨해튼 부촌의 최신 유행인 모양이지. 요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추위를 모르는 동양인 여자. 그 외에 다른 감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작정하고 달리러 나온 사람답게 여자는 화장기가 없었다. 결 좋아 보이는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었는데 도자기 같은 피부와 까만 눈동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십 대 후반 같기도 하고 이십 대 중반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심하고도 오만한 표정은 뉴욕 시민다웠다. 몇 걸음만 다가가면 입김이 뒤섞일 것 같은, 불과 몇 미터 앞에 여자는 서 있었다.

“안 추워요?”

요한이 말을 걸자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 것은 매우 찰나였다.

여자는 분명 눈에 띄는 미모를 지녔다. 그러나 뉴욕에는 미인이 많았으며 저쪽은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영화처럼 대번에 시선을 쫙 빨아들이거나, 침착하던 동공이 느닷없이 확대된다거나, 여자를 제외한 주변 배경이 온통 흐리게 처리된다거나 하는 따위의 특수효과는 전혀 없었다.

다만 수북이 쌓인 눈을 배경으로 허옇게 드러난 종아리. 평일 늦은 오전에 센트럴 파크를 달리는 또래의 젊은 여자. 오만한 표정의 동양인. 그 부르주아적 조합이 괴상하게도 신경을 건드려 요한은 살짝 입매를 비틀었다.

“오늘 날씨 드럽게 추운데(It’s frickin freezing today).”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경계하는 눈길로 힐끗 쳐다본 다음 시선을 거둬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양손을 허리께 짚고서 이쪽저쪽 목을 돌리는 모습을 요한은 그저 쳐다만 보았다. 수작 거는 남자를 무시하는, 경멸이 분명한 태도가 묘하게 사락사락 속을 긁었다.

“저기, 그쪽한테 말한 건데.”

스스로 기꺼이 시인하건대 요한은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거미처럼 팔다리가 마른 체형은 선호하지 않는다. 더욱이 동양인 여자는 24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대낮에 공원에서 수작 거는 실없는 놈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말을 걸었을까. 팔자 좋은 또래의 여자가 눈꼴시어서. 날씨가 추운 탓에 제정신이 아니어서.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적당한 핑계거리를 궁리해 보았으나 달리 마땅한 정답을 고르지 못했다.

“나 알아요(Do I know you)?”

세 번째 말을 건 후에야 여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경계만이 가득한, 화장기도 표정도 없는 얼굴에는 아무런 온도조차 없었다. 요한은 길게 뻗은 포니테일에 눈길을 주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 하등 낯설 것 없는 색깔인데도 자꾸 시선이 들러붙는다.

“아아,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반짝이는 호의를 다분히 섞었건만 별 소용은 없는 것 같다. 여자는 왈왈 짖는 남의 집 개를 피하듯 사뿐히 몸을 돌리더니 5애비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요한은 망설이지 않고 뒤를 따랐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다.

“나는 그냥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거거든요. 이런 날씨에 그렇게 입고 뛰면 체지방이 더 잘 타나? 딱 봐도 추워 보이는데 왜 굳이 한겨울에 센트럴 파크냐 이거죠, 저렇게 눈까지 쌓였는데. 피트니스 클럽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 그렇게 달리고 싶으면 러닝 머신,”

“저기요.”

걸음을 멈춘 여자가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숨 쉴 틈 없이 재잘대던 요한도 덩달아 멈춰 섰다. 뒤통수 중앙에 바짝 묶인 머리채가 휙 돌며 반원을 그렸다. 피루엣을 하는 발레리나처럼 우아한 동작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공원을 벗어나 있었다. 호화로운 브라운스톤이 늘어선 5애비뉴는 다운타운을 향해 뚫린 일방통행 도로다. 동일한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여자의 어깨 너머로 쉼 없이 지나갔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아요.”

“요한 리. 그쪽은?”

넉살 좋게 눈까지 찡긋해 보인다. 미친놈 보듯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을 그는 흡사 즐기는 것 같았다. 네 이름 따위 전혀 관심 없거든. 굳은 얼굴에 쓰인 분명한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받았으나 경계하는 여자를 향해 더욱 환하게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눈이 선량하기 그지없다.

요한은 스스로의 강점을 잘 아는 남자였다. 그린 듯 섬세하고도 분명한 이목구비는 온갖 인종이 모이는 이곳에서도 흔치 않은 조합이다. 촘촘한 피부에 건강한 윤기가 흐르고, 경계가 선명한 밝은 갈색 홍채는 사시사철 물기가 유난스럽다. 보기 좋게 솟은 광대뼈와 꼭 알맞은 높이의 잘생긴 콧대. 농담이 확실한 그 윤곽 덕분에 순수한 한국계 혈통을 의심받는 것조차 그는 익숙했다.

“같은 시민들끼리 인심 한번 야박하네. 뉴욕이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안 그래요?”

능글맞게 책망하면서도 눈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여자의 시선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도 않았다. 이러면 대부분은 버티지 못하고 픽 웃어 버린다. 어떤 상황이든 여자가 웃으면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그는 최대한 매력적으로 미소하며 이름을 다그치고, 상대가 못 이기는 척 성을 뗀 이름을 던져 주면 그때부터 분위기는 급물살을 탄다. 그 모든 과정이 요한의 눈에는 손금처럼 훤했다.

뉴욕. 아름다운 나의 고향. 돈과 예술과 섹스의 도시.

이곳에서 낯선 남자와 여자는 시선을 섞고 말을 섞고 체액을 섞다가 몸을 섞는다. 그 지루한 과정이 놀랍도록 축약되는 마법의 도시. 이 정글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라며 때 이른 발정기에 돌입한 그는 적어도 지금까지, 마음먹은 여자를 마음먹은 곳까지 데려가는 데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