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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icated to the brightest muse of my life,

my beautiful Lee.


많은 경우, 성자의 통찰은 죄인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다.



― 에릭 호퍼


· 일러두기



1. 본문 속 대화는 영어를 기본으로 하며 한국어 발언은 서술을 통해 별도로 언급합니다.

2. 일부 대화는 원어 표현을 살리기 위해 영문 괄호 병기합니다.

3. 본 작품은 실제 단체와 장소를 배경으로 꾸며 낸 이야기로, 실존 인물 및 업체와 관계없는 허구임을 밝힙니다.



1화

0 프롤로그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그리고 하늘 위 천국의 천사들도

바다 아래 악마들도 갈라놓지 못합니다

결코 나의 영혼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로부터



……



탕!

총성이 울렸다.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물 빠진 데님 셔츠가 검붉게 젖어 든다. 이지러진 원형으로 퍼지는 핏자국은 파문을 닮았다.

제 어깨에 난 총구멍을 구태여 확인한 남자가 다시 여자를 본다. 화장을 갓 마친 얼굴이 끔찍하도록 아름다웠고 양손으로 리볼버를 쥔 손가락은 바들바들 떨었다. 립스틱으로 완벽히 치장한 입술이 달싹였다. 고혹적인 레드. 희게 질린 여자의 뺨은 그러나 핏기 없이 창백하다.

“……나가(Get out).”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멍 난 어깨를 틀어막는 대신 마음껏 피를 토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총상을 입고도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다만 여자가 움켜쥔 은빛 총신에 눈길을 주었다. 섬세한 손가락. 그 손에 쥔 무기와 어울리지 않는, 골이 옴폭 패여 부러질 것 같은 양쪽 손목. 하얀 두 팔을 따라 남자는 계속하여 시선을 옮긴다. 검은색 드레스 위로 노출된 어깨. 도드라진 쇄골의 뼈마디. 틀어 올린 머리카락. 완전히 드러난 목덜미. 그리고,

가느다란 목에 감긴 진주 목걸이.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가라고!”

여자가 소리 죽여 윽박질렀다. 그리고 초조한 눈길로 남자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아치형의 마호가니 문은 굳게 닫힌 채 잠겼으나 바깥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남자도 알았다. 묵직한 무게의 사내가 분명한, 한 쌍의 구둣발이 내는 소리. 총성이 울린 후 발소리는 시시각각 접근해 오고 있다.

“제발, 어서 가.”

총구를 겨눈 채 여자가 애원했다. 빈손으로 선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왼쪽 어깨에서 솟은 피가 이미 흥건히 소매를 적셨다. 툭.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남자는 여자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흰색 운동화 밑창에 붉은 얼룩이 묻었다.

“같이 가(Come with me).”

총을 겨눈 여자를 향해 마른 입술을 벌렸다. 대꾸 없이 어깨를 떠는 여자를 향하여 그는 다시 더듬대듯 한 걸음을 뗐다. 조금만 더. 이제 몇 발짝만 더 가면 손에 잡힐 듯 여자는 가깝다.

“같이 도망쳐. 같이 가.”

다시 한 걸음. 다가오는 남자를 위협하듯 여자가 권총을 고쳐 쥐었다. 그녀가 등지고 선 커다란 여닫이창은 밖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주물로 장식된 철제 비상계단. 바깥은 한밤의 어둠을 배경으로 온갖 불빛이 흥청대고, 얼음처럼 찬 밤공기가 안으로 들이쳤다. 크림색 시폰 커튼이 춤추듯 하늘하늘 흔들린다.

“……잘 들어, 요한 리.”

여자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가늘고 섬세한 목선과 달리 그녀의 음성은 낮게 울린다. 검은색 드레스를 장식한 비즈 위로 백열등 빛이 부서졌다.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마치 거대한 불덩이처럼 여자의 정수리 위에 아슬아슬 떠 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선언하며 팔을 옮겨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댔다. 지켜보던 남자가 비로소 동요한다. 붉은색 발자국을 남기던 두 발도 묶인 듯 멈춰 섰다.

“Jane! Open the door! Jane!”

고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대는 문을 힐끗 본 여자가 방아쇠에 걸린 검지를 천천히 안으로 당긴다.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은빛 총구. 맨살에 닿은 금속은 발사의 잔열로 더웠다.

“그러니까 어서 꺼져. ……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는 피 흘리고 선 남자를 본다. 등지고 선 커다란 창으로 쉼 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흔들리는 크림색 커튼 뒤로 도시의 불빛이 일렁이고, 두 남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막막한 절벽을 마주하듯 여자의 흰 얼굴을 망연히 바라본다. 그녀의 관자놀이 바짝 으르렁대는 은빛 리볼버. 이제 그는 다가갈 수도, 그러나 이렇게 돌아설 수도 없다. 길을 잃은 남자는 문득 지금이 금요일 밤임을 상기한다.

“제인…….”

어디선가 아득히, 즐거운 사람들이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my darling―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그래서 밤새도록, 나는 누워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랑하는―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바닷가 그녀의 무덤 안―

파도 소리 들리는 그녀의 무덤 안에.



― 에드가 앨런 포, 애너벨 리(Annabel Lee) 중에서



1 헤매는 자들의 도시


1995년



숨을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알몸뚱이를 드러낸 나무들 위로 잔설이 드문드문했다. 요한은 파카 주머니에 양손을 단단히 찔러 넣은 채 꽁꽁 언 센트럴 파크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정오가 가까워지는데도 한가로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다리 윤곽이 드러나는 운동복에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눈 쌓인 공원을 달린다. 두꺼운 점퍼 아래로 반바지 차림인 남녀도 드물지 않았다. 그 광경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던 요한이 보란 듯이 아래턱을 부르르 떨었다. 입김을 푹푹 뿜으며 건강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히 쳐다보다 고개를 위로 꺾었다. 하늘은 쾌청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게 불과 어젯밤이건만 어느새 파랗게 갠 하늘이 천연덕스럽다.

“안녕, 이쁜이(Hey, pretty).”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스치며 옆에 선 남자가 키들키들 웃는다. 수수깡처럼 마른 남자에게서 코를 찌르는 향수 내음이 진동했다. 싸구려 머스크 향 아래 감춘 마리화나 흔적을 요한은 곧장 감지했다.

“맞을래?”

이쁜이란 호칭을 질색하는 걸 모를 리 없다. 호세가 좋다고 낄낄대자 금으로 테두리를 씌운 왼쪽 앞니가 번쩍였다. 오른쪽 앞니에는 오부 다이아 박겠다는 걸 겨우 뜯어말린 사람이 요한이었다. 그게 열여섯 살 때였나 열일곱 살 때였나. 쓸모없는 기억을 되짚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처웃지 마, 느끼한 새끼야.”

짐짓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키득대며 담뱃갑을 꺼낸 호세가 한 개비 꺼내 입에 문다. 불을 붙여 연기를 푹 뿜고는 권하듯 내밀자 요한이 가볍게 인상을 썼다.

“너나 많이 피우고 빨리 뒤지세요.”

“알았어.”

씩 웃은 호세가 양 볼이 깊이 파이도록 맛나게 담배를 빨았다. 요한은 먼 산을 향해 선 채 곁눈으로 그를 힐끗 살폈다. 모자챙 아래 드러난 얼굴이 한 줌이다. 호세가 얇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걸었다.

“요새 장사 잘 되나 봐?”

“되는 날도 있어야지. 근데 추워 죽겠는데 뭔 공원으로 나오래.”

“갑자기 보자고 한 게 누군데.”

“그럼 어떡하냐, 재고가 똑 떨어졌는데.”

“이 근처에 볼일 좀 있어서. 대낮에 보니까 좋구만 뭘. 너도 내 덕에 바람 쐬고 좋잖아.”

한겨울에 칼바람 쐬어서 퍽이나 좋겠다, 새끼야. 구시렁대자 담배 문 입이 낄낄 웃는다. 강 건너 사는 놈이 센트럴 파크 근처엔 무슨 볼일이냐고 요한은 묻지 않았다. 길게 연기를 뿜어낸 호세가 말을 이었다.

“너 때깔 더 좋아졌다.”

“넌 꼴이 볼만하네.”

상대를 응시하며 요한이 빈정댔다. 호세는 눈길을 피하듯 야구 모자 아래 비어져 나온 곱슬머리를 만지작대더니 모자챙을 푹 누른다. 찰나였지만 상태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올리브빛 홍채 안쪽의 동공이 야밤의 고양이처럼 확장됐고 눈 아래는 시커멓게 꺼져 있다. 요한은 다시 먼 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숨 쉬듯 말했다.

“작작 해라. 가루에 코 박고 죽고 싶지 않으면.”

“오, 어떻게 알았어? 내 장래 희망이 그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