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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기후

2화


* * *


“어땠어? 예쁘지? 착하지? 키는 많이 컸어? 예전엔 나랑 비슷했는데. 나는? 내 이름은 기억해? 응?”

촐싹거리는 목소리. 해준이다.

휘휘 내젓는 손에도 줄곧 그놈의 ‘예쁘지? 착하지?’ 타령과 함께 들러붙는 걸 보니 하루 종일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원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보자 해준이 냉큼 그 허리에 앞치마를 둘러 주며 아부를 시작했다.

“얘기 좀 해 주라, 응? 원아아.”

이를 어쩐다.

원은 손끝으로 턱을 긁으며 고민에 빠졌다.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 줘야 이 심약한 인간이 울지 않고 넘어가려나.

“아님, 혹시 알아챈 거야? 네가 나 아닌 거? 그런 거야?”

“형은 헌혈하면 피 대신 김칫국이 나올 거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도 못 하더라.”

“응?”

“차해준이 누군지 모르더라고.”

귀찮게 팔에 매달려 있던 해준이 여름을 다 보낸 매미처럼 톡, 하고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원은 괜히 죄지은 듯한 느낌이 들어 짜증스럽게 뒤통수를 긁었다. 그 짜증에는 꼴같잖은 자기 위안으로 또 땅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는 해준이 한몫 단단히 했다.

네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여잔데, 차라리 욕을 할 것이지.

“하긴, 그게 벌써 15년도 전의 일인데.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하지. 게다가 걔는 우리 고아원 말고도 다른 데도 봉사 많이 가서……. 나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안 그래?”

“이야, 그랬겠구나. 재벌 3세가 전국 고아원 봉사 가서, 갈 때마다 거기 애들이랑 개천에서 발가벗고 수영하고. 뭐, 그럼 형 하나쯤이야 기억 못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겠네, 그치?”

“그래. 되게 좋아했었다니까. 수영도 엄청 잘하고…….”

“형. 형이 나한테 그랬잖아. 수영하다 그 집 사모님한테 걸려서 뺨 맞았다고. 대놓고 반항하려는 게 아니면 미쳤다고 계집애가 혼날 짓을 전국구로 했겠어?”

“아, 아니야! 난 맞을 뻔만 했어! 걔가 내 대신 맞아 줘서…….”

“그러니까.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왜 형을 기억 못 하느냐고.”

일 복잡해지게.

마침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해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여자를 두둔하느라 나불거리는 게 짜증 나서 다그쳤더니, 저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건 그것대로 또 성질이 난다.

에잇, 하고 툭 내뱉으며 원은 소파에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그 빌어먹을 놈의 모델인지 뭔지를 하느라 온몸이 다 쑤셨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 일인데, 기대한 만큼의 소득을 얻지도 못한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냥 개고생만 했다 이거지.

해준에게 이름 좀 빌리겠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진짜 해준의 이름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전에 여자가 먼저 관심을 드러낼 거라고 원은 확신했었다.

왜냐고?

지금까지 다 그래 왔으니까.

여자가 얼마나 쉽고 가벼운 존재인지 설명하자면 하루를 다 써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 많은 여자들이 모든 남자에게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적어도 원에게 여자란 마치 편의점의 생수처럼 너무나 간단히 얻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나이가 적든 많든, 미혼이든 기혼이든 상관없이 그랬다.

길게 지속되는 시선이나 짧은 미소 따위를 멋대로 ‘신호’라고 오해한 여자들은 지금껏 기꺼이, 아주 열성적으로 그에게 가진 모든 걸 내놓으려고 들었다. 가끔은 아주 성가실 정도로.

“귀하디귀한 애기씨께서 감당하기엔 너무 파격적인 첫 만남이었나…….”

“응? 뭐라고?”

혼잣말에 해준이 귀를 쫑긋하며 묻는다.

원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겨우 3개월 남짓 남았는데, 청순한 방법으로 내숭 떨어 가며 진도 나가서야 목적 달성은 어림도 없다.

잘한 일이야.

원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그의 손가락이 수많은 여자들의 이름 사이에서 ‘윤설주’라는 이름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뭐 해]



물음표를 붙이는 것조차 귀찮아 대충 그렇게 적어 보내는데 해준이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원아, 근데 진짜 이쁘긴 하지?”

“예쁘긴 퍽이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알지? 딱 그래. 거기서 머리만 까매.”

원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럴 리가 없다며 발끈하는 해준을 보며 설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쁘냐니. 성장하면서 무슨 큰 재앙을 겪지 않은 이상 어렸을 때에도 딱히 예뻤을 것 같은 외모는 아니었다.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는 희미한 쌍꺼풀이나 밋밋한 코, 색기라고는 없는 얇고 단정한 입술이 차례차례 그려졌다. ‘여기 여자화장실이에요.’ 하던 목소리도 그 얼굴만큼이나 썩 매력 있는 편은 아니었다.

겨우 장점을 하나 찾자면…….

“웃는 건 그나마 봐 줄 만하더라.”

그것도 웃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코웃음에 가까웠다.

발끝을 세워라, 목을 더 젖혀라, 도저히 불가능한 자세를 지시하던 교수라는 작자 때문에 열이 받아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이럴 거면 오징어나 낙지를 갖다 쓰지, 라고 했었나.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여자의 피식하는 흐트러진 숨소리와 아래로 처지던 눈매 같은 것은 또렷했다.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갈무리해 버리는 바람에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 버린 그 표정이, 이상하게도 유난히 선명했다.

“그래도 예쁜 얼굴은 아니야.”

다시금 신이 나서 설주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해준에게 따끔하게 덧붙인 후, 원은 이만 머릿속에서 그녀를 몰아내고 쪽잠이나 자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세요?]



라는 답장이 돌아온 순간, 잠기운이 모조리 달아나 버렸다.

그때 직감했어야 했다.

좀처럼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아무것도 잃지 않고 상대의 전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다를 거라는 걸.



* * *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

후루룩.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컸다. 마주 앉은 여자가 수다와는 먼 타입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지 10분 경과. 여자는 자신의 질문에 간신히 네, 아니오 정도의 답만 내놓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 재미라곤 더럽게 없는 여자다. 무시무시하게 희박한 사회성의 소유자거나.

“네……?”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고집도 세다. 이쪽에서 줄곧 반말을 하는데도 돌아오는 것은 대쪽 같은 존댓말이다.

화장실에서 얘기했을 때의 여자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 같았는데, 오늘의 여자는 죽을 날 받아 놓은 노인네 같다. 이마에 그렇게 쓰여 있다. 무기력.

“저기, 용건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 아니에요? 제가 다음 스케줄이 있는데.”

안다, 알아. 월요일은 필라테스, 화요일은 쿠킹 클래스, 수요일은 꽃꽂이 교실, 목요일은 예비 시어머니와 갤러리 투어, 금요일은…… 뭐더라?

어쨌든 윤설주는 학교를 다니는 것 외에도 자유 시간이 아니라 ‘해야 할 일’로 꽉꽉 찬 시간 계획표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중에 여자가 진심으로 원해서 생긴 일정은 몇이나 될지, 문득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뒷조사와 미행으로 알게 된 사실을 당사자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은 오늘은 칼이나 국자 따위가 들릴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비린내가 나는 생선을 토막 낸다든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주물거리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손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손을 보고 있자니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손’이 과연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저기요?”

“아, 미안. 뭐라고 했더라?”

어제는 고양이 같았다가 오늘은 노인네 같은 이상한 여자와 있으니 따라서 이상해지는 걸까. 자꾸 딴생각이 들어 심란했다.

윤설주는 차분한 건지, 차가운 건지 헷갈리는 시선으로 빤히 응시해 오더니 끈기 있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용건이 뭐냐고 물었어요.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을 오래 못 낼 것 같다고도 했고.”

“근데, 아까부터 왜 계속 존댓말 해? 동갑이라니까. 게다가 우리가 보통 사인가? 홀딱 벗고 같이 수영…….”

“기억에도 없는 예전 일을 가지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 안 해 줬으면 좋겠어요.”

역시, 노인네보단 고양이 쪽이라니까.

“존댓말이 편해요. 그리고 내가 예의를 갖추는 이상 그쪽도…….”

사실을 따지자면 존대를 해야 하는 것은 제 쪽이라 여자의 깍듯한 예의가 더 거슬리는 건지도 모른다. 차해준이라는 가면을 벗고 나면 그녀가 그보다 한 살이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정 싫다는데 뭐 별수 있나.

“아, 예예. 알아서 모시란 말씀이시죠, 아가씨?”

“빈정대지 말고요.”

“빈정대는 거 아닌데.”

“그게 빈정대는 게 아니면…….”

“섭섭해서 투정 좀 부리는 것 가지고, 무슨 빈정씩이나.”

거듭 말을 끊자 마침내 인내심이 다한 것인지 윤설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우글우글 주름이 잡힌 콧잔등에 주근깨가 내려앉아 있어 그저 철부지 소녀의 짜증 정도로만 보였다.

한마디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친한 척 좀 해 주면 안 돼? 난 되게, 엄청, 완전, 까무러치게 반가웠는데.”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친한 척을 해요.”

“좋아. 그거야 어쩔 수 없다 치고. 존댓말도 정 원한다면 오케이 하겠지만……. 예의 차리자는 사람이 그쪽, 저쪽 하면 듣는 그쪽은 되게 기분 묘한데 말이지.”

“그럼…….”

“내 이름 몰라서 안 부르는 건 아닐 테고.”

여자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속이 뻔히 읽혀 자칫 웃음이 삐져나올 뻔했다.

해준아, 하고 부르자니 존댓말과는 어울리지 않고, 어린 시절 소꿉친구 비슷한 상대에게 해준 씨라는 호칭은 더더욱 적당하지 않을 테니까.

“아, 혹시 그런 건가? 내 전화번호 저장 안 한 것처럼, 이름 따위 외울 가치가 없다든가…….”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윤설주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손사래까지 치며 극구 부인했다.

원은 이로써 어떤 요령 하나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저 몇 번 같이 어울린 고아를 대신해 제 부모에게 뺨을 내어 줬다는 얘길 전해 들으며 원은 그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파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윤설주에게 붙은 분류표는 다음과 같았다.

쓸데없는 측은지심에 휘둘려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

원에겐 잘된 일이었다. 설주로 하여금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와 정반대의 세상을 살고 있는 그에게 가장 쉬운 일일 테니까. 뭔가를 더하고 빼고 할 것도 없이, 밑바닥 인생 그대로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윤설주가 자기보다 잘난 남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부류의 여자가 아니라는 데 원은 크게 안도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장하는 걸 깜빡한 것뿐이에요. 그날 강의가 끝나자마자 교수님 면담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구구절절 해명하는 여자가 조금 가엾기까지 했다. 원은 한껏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우고 이내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윤설주는 가슴을 들썩이며 밭은 숨을 내뱉더니 음료를 쭈욱 들이켰다. 꽤나 목이 탔나 보다. 말을 빠르게 잇느라 그녀의 얼굴은 온통 촌스러운 빨강이었다.

측은지심과 마찬가지로, 이런 순박함 역시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대기업 회장을 외할아버지로 둔 여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덕목은 아니었다. 그것이 원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약아 빠진 사람이었으면 나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