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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기후

3화


“아무튼, 그쪽이라고 부른 건 미안해요. 적당한 호칭을 찾기가 힘들어서 그랬어요. 그렇다고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가까운 사이가 왜 아니야.”

“또 수영 얘기를 할 거라면…….”

“네가 내 첫사랑인데.”

하긴, 윤설주가 어떤 사람이든 달라질 게 뭐가 있나.

원은 앞으로 저지를 일들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 스스로에게 비소를 날렸다. 여자가 천하의 악녀라고 할지라도, 이 관계에서 가해자가 자신이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남자한테 첫사랑은 죽을 때까지 평생 못 잊는 그런 거래.”

원은 흔들리는 여자의 동공에 비치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내뱉는 남자에게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 잊은 것처럼 지내다가도 불쑥 생각나면 막 설레고 그립고.”

사실 첫사랑이 어떤 건지, 그런 거 소유해 본 적도 없는 그 남자를 향해서 말이다.

“나한테 그런 거야. 너.”

이름을 불린 여자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 원은 그 눈 속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걸.”



* * *



원이 윤설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생각보다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력서 필수 항목인 취미나 특기뿐만 아니라 외조부로부터 당시 평가액 5억 원 정도의 주식을 열 살 생일 선물로 받은 일이라든가, 동유럽으로 떠난 12박 일정의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간에 장염으로 혼자 귀국한 일 같은 과거의 자질구레한 사건들까지.

더불어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만나는 약혼자의 학력이나 여자관계 같은 것도.

보고서로 작성한다면 열 장은 가뿐히 채울 수 있을 만큼 그 양이 방대해서 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설주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자부했었다.

연애 경험 무.

원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고, 그래서 첫사랑이니 뭐니 하는 말을 나불대면서 은근히 그녀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쩔 줄 몰라서 도망가진 않을까. 감동받아 울어 버리면 어쩌지. 그도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기절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 마지막 가설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골치 아프니까.

상상이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을 만큼 충분히 뜸이 든 다음이었다.

“호신용 전기 충격기라도 준비해야 하나요?”

그렇게 말하는 윤설주는 다소 시니컬하게 웃고 있었다. 해머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 머리가 얼얼해서 원은 선뜻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무슨 선전 포고처럼 들리긴 하는데 대체 뭘 각오하라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그쪽, 그러니까 차해준 첫사랑이고, 첫사랑은 설레고 그립고 평생 못 잊는 거고. 그래서요? 스토킹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지만, 좋다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놈은 많았던 건가? 보고서 어디에도 인기가 많았단 말은 없었는데. 이성은 물론 동성에게도.

원은 헷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박한 시골 처녀 같았던 여자가 이젠 종신 서원을 한 엄숙한 수녀쯤으로 보였다.

그토록 로맨틱했던 순간을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박살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원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카페 안의 여자들이 동경과 질투의 시선으로 이쪽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남자 배우 누구와 아이돌 누구를 절묘하게 섞어 놓은 것 같다는 그의 얼굴이 오늘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뜻이다.

원은 조각조각 흩어진 여유를 그러모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스토킹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내 뜻은, 보고 싶었다는 거였어. 그리고 앞으로도 보고 싶을 거란 소리였고.”

“오늘은 용건이 있다고 해서 나온 거예요. 그리고 그 용건이라는 게 첫사랑 얘기라면……. 제 기준에 그건 앞으로 다시 만날 이유는 아닌 것 같구요.”

오늘 이 여자의 쿠킹 클래스 요리 재료는 단호박인가? 왜 이렇게 단호해?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시간이 다 돼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윤설주가 핸드백을 어깨에 걸며 일어섰다.

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설주를 떠나보냈다. 아니, 그녀가 거의 뭐에 쫓기다시피 카페를 빠져나간 덕분에 붙잡을 틈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나 참.”

원은 황당함에 혀를 차면서도 빠르게 인도를 걷는 설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녀가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를 사 들고 나온 후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선 여자가 뺨과 귀에 따지도 않은 생수 통을 대고 문지른 바로 그 순간.

이상한 5월이었다.

발가벗은 채 여자를 만났던 첫날은 덜 여문 여름이었고, 새벽에 비를 쏟은 오늘은 아직은 시린 봄 같은, 그런 5월.

목도리를 다시 꺼내고 싶을 만큼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며 아침 뉴스의 기상 캐스터는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옷깃을 여미며 빠르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달아오른 얼굴을 생수 통으로 식히는 윤설주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 것은. 밉지 않게 보인 것은.



* * *



“3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응? 뭐가?”

“심사숙고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말이야.”

“심사숙고?”

“뭔가를 오래 고민한 느낌이 나냔 말이야. 3일 정도면.”

원이 입가에 잔뜩 소스를 묻혀 가며 자장면을 먹는 해준에게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

해준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휴지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검은 소스와 함께 곧 그 표정도 함께 지워졌다.

“고민은 짧게 하는 게 좋은 거랬어.”

티 없는 얼굴로 해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극히 해준다운 대답이라 원도 피식 덩달아 웃어 버렸다.

“나 나갈게, 형. 이따 바에서 봐. 나갈 때 창문 확인, 가스 확인, 문단속은 철저…….”

“아이, 알았어. 내가 애야?”

해준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토라진 듯 흥, 콧방귀를 뀌면서도 먹던 것을 두고 굳이 방 하나, 주방 겸 거실 하나인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마중까지 나온다.

해준을 알게 된 게 거의 10년에 가까워 오지만, 해준이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볼 때면 원은 한결같이 속으로 욕을 내뱉곤 했다.

병 걸리면 치료해 줄 부모도 없는 인간이 소아마비인지 뭔지 그런 거지 같은 병엔 왜 걸려 가지고는, 이런 험한 말이 혀끝에 맴돌아서 입안이 소태를 문 것처럼 씁쓸했다.

“됐으니까 들어가. 면 불어.”

“그래그래. 이따 늦지 말고!”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 후다닥 자장면에게 돌아가는 해준을 뒤로하고 원은 미로처럼 복잡한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가 스물에 정착한 이 동네는 스물넷이 된 지금까지도 재개발 문제로 주민과 개발사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칠이 벗겨져 가뜩이나 흉한 담벼락엔 결사반대라든지 물러나라 따위의 새빨간 글자가 마치 피로 쓴 것처럼 휘갈겨져 있다.

매일 보는 살풍경에 시큰둥한 원의 옆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은 여고생 둘이 팔짱을 끼고 지나갔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데가 있어? 라고 둘 중 하나가 말했다.

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이런 데도 있고, 이런 데에 사는 이런 사람도 있다. 여기서 ‘이런’이 무슨 뜻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원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좆같은, 이라고.

어느새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원은 자그마한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자의 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놀이기구처럼 이따금 엉덩이를 허공에 띄울 정도로 크게 요동치는 버스에 앉아서도 원은 머지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일했기 때문이었다. 하필 어제 마감조였던 탓에 겨우 서너 시간 눈을 붙인 게 다였다.

“이봐요. 일어나. 종점이야.”

“……네?”

“종점이라고. 젊은 사람이 대낮부터 무슨 잠을 그렇게 자?”

제길. 욕이 절로 입 밖으로 샜다.

설주의 시간표와 그녀의 학교까지 가기 위해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며 원은 걸음을 빨리했다. 택시를 탈까 잠시 갈등했지만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여자의 학교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적어도 허탕은 치지 않을 것 같았다.

꽃이라도 한 송이 사서 가려던 원래의 폼 나는 계획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뭔 놈의 학교가…… 이렇게 넓어.”

원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쳐 냈다. 그러나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다. 각 건물마다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제 막 강의가 끝나는 시간인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미대 건물 앞에 도착한 원에게 몇몇 학생들이 알은체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중에 그가 찾는 사람은 없다.

놓친 건가?

전담 기사 하나가 여자의 시간표와 동선에 맞춰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윤설주의 뒤를 밟으며 안 사실이지만, 원의 시선에 그건 여자의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감시 같아 보였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함께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가진다거나 하는 평범한 대학 생활이 그녀에겐 없었다.

이 같은 생활에 대해 여자가 만족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그녀의 생각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김 기사라는 이름의 감시자 때문에 윤설주를 쉽게 만나기 어려운 환경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정확한 시간을 공략하지 않으면 여자를 가로채이게 되니까.

오늘은 이미 글렀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원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대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복도는 이미 한산했다. 누드 크로키 수업을 했던 강의실을 지나, 뭔가가 되다 만 찰흙 덩어리가 여기저기 늘어서 있는 또 다른 강의실을 기웃거리던 찰나였다.

“……거기서 뭐 해요?”

여자였다. 화구통을 맨 채 놀란 토끼 눈을 한 윤설주.

“오늘도 모델 하러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

누군가 그의 말을 끊고 설주의 관심을 끌었다. 원은 뒤돌아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훼방꾼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본명 김춘식. 약칭 김 기사. 나이는 마흔하나에 초등학생 쌍둥이 딸을 둔, 전직 사설 경호 업체 에이스 출신.

“아, 아저씨. 지금 가요.”

망할, 버스에서 졸지만 않았더라도 10분은 여유가 있었을 텐데.

원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획했던 꽃도, 흔한 캔 커피 하나도 없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두 번째 만남을 치러야 할 줄이야. 차라리 오늘은 그만 물러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주가 눈인사와 함께 이만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화구통 끈을 붙잡고 말았다.

“나 그냥 스토킹인지 뭔지, 그거 하려고.”

이것 역시 계획에 없던 말이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도저히 오지 않을 수 없었어.’ 뭐, 그런 말들을 준비했었던 것 같은데…….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스토킹이요?”

“어, 그거. 그러니까 전기 충격기를 사든, 경호원을 더 고용하든, 그도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하든 마음대로 해.”

“아가씨?”

“참고로 나는 끈기도 있고 맷집도 있고 고집도 있고…….”

“괜찮아요, 아저씨. 잠시만…….”

“상처도 잘 안 받아.”

저벅저벅 가까워져 오는 춘식의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원은 허겁지겁 말을 맺었다.

땀이 마르자 한기가 느껴졌다. 아니, 말없이 빤히 올려다보기만 하는 여자의 시선이 불길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엎어 치기와 돌려 차기의 대가라는 김 기사의 존재 때문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