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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기후

1화


화판을 옆구리에 끼운 채 들어선 강의실의 기류가 평소와 다르다.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묘하게 들뜨고 수선스러운 분위기.

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굳이 애써서 대화에 끼지 않더라도 그들이 하는 소리가 귓가를 멋대로 맴돌았다.

“대박이라니까? 진짜 모델 같았어.”

“모델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냐?”

“아니 내 말은, 음, 패션쇼 같은 데 나오는 그런 모델 말이야! 아니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생긴 게 더 대박이더라. 배우인가? 아님 아이돌?”

“얘 또 오버한다. 배우나 아이돌이 미쳤다고 삼십만 원 벌려고 이런 데서 홀딱 벗겠어?”

충분히 일리 있는 반격에 설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달라고 가슴을 팡팡 치고 발을 구르는 동기가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끝이 뭉툭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연필을 발견한 순간 흥미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가방에서 칼을 찾아 연필을 깎는 얼굴은 무감했다. 애초에 잘생긴 남자에 열광하는 취미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없던 것이다.

티격태격 입씨름하는 소리가 뿌옇게 희미해질 즈음이었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어떤 소리도 용납되지 않는 진공 상태에 빠진 듯 강의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교수의 등장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학생들의 시선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교수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검은 가운 차림의 남자에게 꽂혀 있었으니까.

“자. 조교한테 설명은 들었죠? 저기 가운데로. 아, 가운은 벗고.”

사십 대 중반의 남교수는 곧 얼빠진 학생들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남자를 향해 새침하게 지시를 내렸다.

‘예엡.’ 하는, 말을 길게 늘여 권태가 짙은 목소리가 그에 응답했다.

다 깎은 연필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설주가 고개를 든 것은 그 직후였다.

시선이 얽혔다.

낯선 사람과 예상치 못하게 눈을 마주치고도 남자는 놀라거나 시선을 돌리며 시침을 떼는 대신 빙긋 웃었다. 입이 먼저였고 눈이 그다음이었다. 그 순서가 너무나 명확해서 도저히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러움을 실종한, 마치 의무에 가까운 웃음이다.

설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 이전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아닐까 머릿속을 뒤졌다.

아닌데. 아는 사람.

잠깐의 고민 끝에 설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장님이 아니고서야, 저런 남자를 기억에서 지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건 남자의 외모에 무관심한 설주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강의실 중앙으로 걷는 짧은 순간조차 그녀를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입가에만 희미하게 남은 웃음이 선이 뚜렷한 검은 눈동자와 어우러져 어쩐지 섬찟한 기운마저 풍겼다.

“아……. 저 얼굴로 저렇게까지 웃는 건 진짜 반칙 아니냐?”

“그치. 쩔지. 인정하지, 이번엔?”

“완전 인정. 야 근데 자꾸 내 쪽 쳐다보는 것 같아. 아아, 오늘 화장 잘 안 먹었는데.”

그러나 그 미소에서 어떤 계산을 읽은 것은 그녀뿐인가 보다. 다들 칭찬 일색인 것을 보면.

설주는 동기들의 표정이 궁금해서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며 남자의 불편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두 뺨에 불그스름한 홍조를 띠운 채였다. 설주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자신의 얼굴도 그녀들과 별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이상 기후로 인한 때아닌 폭염을 한여름으로 착각했을까.

아직도 벚꽃이 듬성듬성 남은 5월 초의 교정에는 성급한 매미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모든 유리창이 꽉 닫혀 있고 빈틈없이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는데도 짝을 찾는 매미의 노래가 기어이 강의실로 비집고 들어왔다.

발악 같은 매미 소리. 여학생들의 속삭이는 소리. 남학생들의 짜증스러운 헛기침 소리. 누군가 껌을 씹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정적이 지나간 자리엔 그렇게 많은 소음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러나 설주를 어지럽게 하는 건 아주 작고 사소해서 놓치기 쉬운, 그런 소리였다.

허리끈이 풀린 검은 가운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

설주는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체의 모델을 그리는 것은 이미 열두 번도 더 해 본 일이잖아.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입시켰지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상체를 조금 더 비틀어 볼래요? 응, 그렇지. 몸은 좀 힘들어도 그런 포즈가 근육이 도드라져서 그리기엔 더 좋거든.”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감은 눈꺼풀 안에 멋대로 그려지는 헐벗은 몸에 놀라 설주는 눈을 번쩍 떴다. 바닥에 앉은 채 불편하다 못해 고통스러워 보이는 자세로 포즈를 취한 남자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야.

이쯤 되니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서로 주장하는 옆의 동기들처럼 차라리 착각이면 좋을까. 낯선 남자의 이토록 노골적인 시선을 이유도 모른 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자, 10분 준다. 실시!”

교수가 교탁 위에 모래시계를 놓으며 소리쳤다.

설주는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떨쳐 냈다. 연필을 쥔 손에 다부지게 힘을 주고 여전히 가시처럼 콕콕 찔러 오는 남자의 눈을 무시한 채 그녀가 바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스윽스윽.

남자의 약간 마른 듯한 몸을 눈으로 더듬으며 설주는 새하얀 크로키북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섬세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선으로 큰 근육은 물론 작은 근육까지 거침없이 표현했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도드라진 갈비뼈, 세로로 길게 갈라진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율을 가진 몸이었다.

몇 가지만 제외한다면, 그는 마치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거장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생각될 만큼 현실감이 없는 몸을 갖고 있었다.

그 몇 가지란 느리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이나, 호흡에 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옆구리에 진하게 남은 세로줄의 흉터, 또…… 미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제멋대로 난 무성한 음모나 그 사이에 자리한 굵은 살덩이 같은 것들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긴장감’이라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자각한 순간 설주는 내내 유지해 오던 여유를 잃고 말았다.

그녀는 대충 연필을 휘갈겼다. 얼버무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10분이라는 제한 시간, 게다가 원래가 세세한 묘사를 요하는 작업도 아니지 않느냐는 변명을 갖다 붙였지만 신체의 다른 부위에 비해 남자의 성기 부분만이 확실히 무성의해 보인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스톱. 모두 손에 든 것 내려놔.”

다른 때라면 교수의 지시에 아쉬움을 느꼈을 테지만, 묘하게도 이번엔 해방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모델을 위해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설주는 기다렸다는 듯 누구보다도 빨리 강의실을 벗어났다.



“……뭐야.”

당황한 목소리가 화장실 벽면을 튕기고 커다랗게 울렸다.

열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두 뺨이 잘 익어 있었다.

설주는 찬물을 얼굴에 마구 끼얹었다. 덕분에 홍조는 가라앉았지만 거칠게 문지른 탓인지 화장이 지워져 주근깨가 옅게 드러나 있었다.

김 기사의 잔소리가 벌써 귓가에 앵앵거리는 듯해서 급격히 피곤해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거울에 누군가 막 화장실로 들어서는 것이 비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홱 뒤돌아 쏘아붙였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

“알아요.”

그렇게 대꾸하는 남자에게는 최소한의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뭐 이런 뻔뻔한.

설주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투박하기 짝이 없는 삼선 슬리퍼에 어설프게 실크 흉내를 내는 검은 가운을 걸친 남자는 보란 듯 입구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설 뿐이었다.

그 큰 키로 막고 있으니 어쩐지 갇힌 듯한 기분마저 들어 조급해지는 것은 오히려 제 쪽이었다.

“알면 안 나가고 뭐 해요?”

“그쪽이랑 대화하고 있잖아요.”

대화? 대화아?

마구 빈정거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을 간신히 내려놓고 설주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것도 대화라고 하나요?”

“아닌가? 그럼 지금부터 하죠, 뭐.”

“저기요. 아까 내 말 못 들었어요? 여기 여자 화…….”

“나 잘 그렸어요?”

“네?”

맥락 없이 튀어나온 질문에 순간 말허리를 잘렸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멍청히 되물었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약 15분 전의 강의실에서처럼.

그건 굉장히 근사했지만, 아니 실은 굉장히라는 부사로는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인 미소였지만 여전히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각도를 얻기 위해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 같은 미소다.

다시 은근히 열이 오르던 뺨이 싸늘하게 식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건 왜 물어요?”

“잘 못 그린 것 같길래.”

“내 그림, 봤어요?”

“아니요.”

“근데 무슨 근거로 그런…….”

“초조했잖아요. 불편했잖아. 그거, 다 보였어요.”

기어이 발끈하려던 찰나, 그가 또 한 번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냉소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넘겨짚는 취미가 상당하시네요.”

“넘겨짚는 거 아니고, 말했잖아요. 다 보였다고. 내가 내내 그쪽만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알고 있었지. 도저히 모를 수가 없게 빤히 쳐다봤으니까.

역시나 그 시선이 다분히 고의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금 의문 부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얇은 가운만 겨우 걸친 남자와 여자 화장실에서 마주한 상황. 누군가 이 광경을 보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젠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내가 알아주길 바라고 쳐다봤단 소리네요, 그럼?”

“맞아요.”

“왜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왜요? 어떻게 기억을 못 해? 나는 한눈에 알아보겠던데.”

“무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말 하나도…….

찝찝함이 죄의식으로 발화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자가 서운한 듯 아랫입술을 비죽거리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기억해 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남자의 기계 같은 미소를 목격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누구든,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이든, 그것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혹은 기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별것 아닌 만남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든가, 종업원과 손님으로라든가.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비계획적인 만남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시답잖은 말장난은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잘 기억해 봐요. 나, 처음 본 거 아니잖아.”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코끝이 닿을 정도로 그 얼굴이 가까워져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리고 쿵쿵.

그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남자가 그랬다.

“나도, 내 여기도.”

한쪽 손가락으로 아랫도리를 가리키면서.

“하긴. 그때보다 많이 커졌…… 컸죠?”

“네에?”

물음표를 단 비명을 내지르자 남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쿡쿡’으로 시작해 이내 ‘하하하’가 되어 버리는 그 웃음을 설주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더웠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록적인 5월의 폭염이었다.

이게 다, 이상 기후 때문이야. 날이 이러니까 매미도 미치고, 사람도 미치고, 그러는 거야.

그새 물기가 말라 버린 뺨에 손등을 갖다 대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소리치게 될 것 같아서.

그만하라고. 그렇게 웃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