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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브릿지, 너 브릿지 맞는 거야?”

주희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녀석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높은 담장에 착지한 녀석은 고요히 주희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살을 꿰뚫는 것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주희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 녀석이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져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동네.

두 번 다시 발도 딛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이 존재하듯 안 좋은 기억만 있던 건 아니었다. 비록 딱 하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주인공인 녀석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정말로 그 아이가 맞긴 한 걸까. 어둠 속이라서 그런지 깊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니야옹.”

하얀 달빛이 녀석의 등 뒤로 쏟아지며 녀석이 웅얼거렸다. 그 소리에 주희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확신과 의심.

그 경계선에 서 있던 중심축이 확 기울어진 순간, 달빛에 안기듯 녀석이 튀어 오르며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췄다.



*



설우가 고심함에 빠져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는 잠시 어제 일을 회상했다.

‘……브릿지, 너 브릿지 맞는 거야?’

가늘게 떨리던 여자의 목소리, 황망하게 흔들리던 눈동자. 그건 분명 고양이로 변한 저를 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브릿지.

그게 이 녀석의 이름인 건가.

“그렇게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말을 끝마친 하 상무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입을 연 순간부터 설우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떻게든 최 전무의 눈독에 들어야 하는 프로젝트이건만, 이리 초를 치면 어쩌자는 거야.

“김 대표 생각은 어떤가.”

하 상무를 대신해 부사장이 물었다. 설우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 대표.”

브릿지, 브릿지.

“대표님.”

윤 비서가 속삭였다. 그때까지도 설우는 미동이 없었다. 부사장이 언짢은 티를 낸 순간이었다.

“크흠, 김 대표.”

“브릿지.”

응?

저녁 만찬에 초대된 임원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설우의 고개는 정확히 부사장을 향해 있었다.

“대표님.”

유일하게 사태 파악을 한 윤 비서가 눈칫밥을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설우가 부사장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마치 내가 무슨 소리를 했냐는 듯이.

부사장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하긴 김 대표가 줄곧 쉬지 않고 달리긴 했지. 아무리 젊다고 해도 체력이 고갈될 때가 있는 법이야. 이러다가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질까 봐 걱정이네.”

우스갯소리로 던진 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래도 성심성의껏 준비한 하 상무를 생각해서라도 듣는 성의는 보였어야지. 그리고 이 자리가 취향이 아닌 건 알겠는데, 그게 얼굴에 나타나면 쓰나. 초대한 최 전무는 뭐가 되나.”

부사장의 시선이 왼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얼마 전, 설우를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던 최 전무가 앉아 있었다. 예순을 앞두고 있는 이답지 않게 희고 멀끔한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최 전무가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사장님. 젊은 사람 취향 고려도 않고, 무작정 초대하려고 했던 제 실수도 있죠. 안 그런가, 김 대표?”

이런 요물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윤 비서의 눈에 스파크가 튀었다. 최 전무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든 설우를 짓밟고 말겠다는 부사장의 속내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럼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설우가 무심한 눈길로 임원들을 훑어 내렸다.

“쭉 지켜보니까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있자니 조금 지루해져서요. 괜찮겠죠, 최 전무님?”

최 전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설우를 응시하더니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럼. 초대에 응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고 있네.”

“김 대표.”

보다 못한 부사장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그건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방 밖을 나서려던 설우가 돌연 멈추며 누군가를 직시했다.

“아, 그리고 하 상무님.”

갑작스러운 호명에 하 상무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우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프로젝트는 기반적으로 실행되기가 어려운 거 아시죠?”

하 상무는 아리송했다. 당연히 흘려들은 줄 알았던 이야기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그뿐일까. 뒤이어 들려오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는 프로젝트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캐치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듣지 못한 게 아니라, 이미 생각을 끝내 놓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터무니없이 높은 예산이 예상되는데, 이 부분을 당연히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으실 테고. 그래서 여쭙는 건데 부사장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꽂았던 화살이 제게 돌아오자 부사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오늘은 무슨 수로 김설우에게 엿을 먹일 수 있을까, 그것만 내내 골몰했으니 다른 놈의 말이 귀에 박힐 리가.

“하 상무님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의 답안은 준비해 두셨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설우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부사장의 언행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황한 부사장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처럼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다음에 있을 회의에서는 부사장님의 유익한 의견, 꼭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한 방까지 꽂고 나서야 설우는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



어떻게 거기에 있던 거지.

주희의 머릿속은 온통 어제 본 고양이로 가득 찼다. 푸르스름한 은회색이 우아한 광택을 드러내던. 몇 번이나 생각해도 그 아이는 분명 브릿지였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거의 동고동락하다시피 그 아이의 밥을 챙겨 주고 출근길과 퇴근길을 함께했다 하겠다.

특히 그 눈.

반달 같으면서도 날카로운 그 눈매는 누가 봐도 브릿지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녀석이 그곳에 있는 걸까. 전에 살던 동네와 지금 사는 동네는 자그마치 지하철로 30분 이상이 걸렸다. 그 먼 거리를 녀석이 찾아 나설 리도 없고. 고양이는 특성상 제 영역이라고 생각한 곳의 일정 거리 이상은 잘 벗어나질 않는 법이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건가?

“주희 씨, 퇴근 안 해?”

고심에 한층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불쑥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주희의 사수인 소연이 의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내려갔는데, 왜 아직까지 이러고 있어? 설마 고 대리가 따로 일이라도 시켰어?”

소연의 표정이 사뭇 날카로웠다. 전에 있던 부서에서부터 고 대리의 행실을 겪은 탓인지, 고 대리가 목소리를 높이기만 해도 신물을 내곤 했다.

“아니요.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그럼 같이 내려가자.”

부서를 나서고, 1층에 도착할 때까지도 주희는 고양이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스피드게이트에 사원증을 막 찍은 찰나였다.

“저기 대표님 맞지?”

주희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서 훤칠한 실루엣이 걸어 들어왔다. 그 행보가 로비 중앙 부분에까지 이르자, 설우임을 알아볼 만큼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근데 왜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소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기다란 두 다리가 움직이는 방향이며, 꽂혀 있는 시선이며 모두 다 주희를 향해 있었다. 주희는 본능적으로 주변부터 살폈다. 정말로 설우의 목적지가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피해야만 한다.

혹시나 그가 알은척이라고 했다가는 이목을 받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게 뻔했다.

“이 대리님, 죄송한데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소연을 뒤로하고 주희는 서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설우가 쌩하니 주희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찬바람이 쌩쌩 불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했다.

“……뭐야, 방금. 대표님 표정 봤어? 완전 쌔한데.”

소연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건 주희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잠깐의 스침이었지만, 허공에 두는 시선과 일자로 다물린 입술. 그리고 서늘한 분위기까지. 며칠 전 모습과는 확연히 대조됐다.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주희의 머릿속은 설우로 가득 찼다. 이중적인 그의 면모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화가 난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볼 순 없는 거잖아. 역시 그날이 원인인 건가. 그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 냈던 그날 말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역을 빠져나와 골목길로 들어선 때였다.

부스럭.

주희는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막상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금세 고개를 돌리는데.

부스럭.

또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주변이 어둠으로 자욱했다. 단순히 바람이 나뭇잎에 흔들리는 소리라기엔 그 세기가 거칠다.

설마, 아니겠지.

주희는 팔뚝을 쓰다듬으며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불안감이 묻어 나오는 행위였다.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의해 신경이 곤두서는 건지. 주위를 경계하며 걸음 속도를 높이는데, 부스럭, 소리가 심해지더니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주희는 흠칫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멀어지며 눈앞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릿지?”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거렸다. 소리를 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어제 보았던 청회색 고양이였다. 녀석의 머리에 낙엽 잎이 붙어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어제와 같은 고요한 눈으로 주희를 응시했다.

“설마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금세 주희의 얼굴에 화색이 돋아났다. 녀석이 브릿지인지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녀석에게로 다가섰다.

“밥은 먹었니?”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주희를 묵묵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애틋해 보이기도 하고 서글퍼 보이기도 한다면 제 착각이려나.

주희는 손을 뻗었다. 브릿지는 평소 머리와 얼굴 옆을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이 녀석도 그러지 않을까. 이 아이가 만약 브릿지라면 반기지 않을까. 손끝이 녀석의 머리 위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아이고, 복길아!”

난데없는 외침이 등 뒤로 크게 울려 퍼졌다. 골목길 어디선가 중년의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리나케 이곳으로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