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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길이, 이놈 녀석!”

남자는 단숨에 녀석을 안아 들었다. 신기하게도 녀석은 어떤 거부 반응도 없이 남자의 어깨에 앞발을 철썩, 올렸다. 남자는 주희의 눈치를 살피며 허겁지겁 말하기 시작했다.

“허허, 그게 말이야. 아가씨. 이 녀석이 며칠 전에 집을 나갔지 뭐야. 내가 아주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남은 노후를 함께할 이라고는 요놈 하나뿐인데, 잠깐 문을 열어 둔 사이에 금세 사라져 버린 거야.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요, 심장이 벌렁거린다니까?”

말을 건 것도 아닌데, 제 사정을 술술 말하는 남자의 고백에 주희는 당혹스러웠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나서야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저기 실례지만 이 아이 이름이 복길이인가요?”

남자가 재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요. 잘 먹고 잘 자라라고 내가 직접 지어 준 이름이지.”

“아……, 네. 죄송한데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암, 물어봐요, 물어봐.”

“혹시 2년 전에도 이 친구를 아저씨가 키우셨나요?”

2년 전? 그건 갑자기 왜?

남자의 두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그러나 금세 주름이 질 정도로 눈꼬리를 접어 보인다.

“아무렴. 이 녀석이랑 나랑 함께한 지 벌써…….”

남자가 힐끔,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10년이라우.”

“10년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꽤 나이가 있는 친구네요.”

고양이의 수명은 개보다 긴 편이긴 했지만, 10년을 살았다면 중년은 훌쩍 넘었을 터였다. 그런데 녀석은 많이 봐야 여섯 살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빛도 새초롬하고, 이따금씩 드러나는 송곳니 색도 좋았다. 그러나 2년 전에도 녀석을 남자가 키우고 있었다는 건, 녀석이 브릿지가 아니란 걸 증명했다.

“이제 복길이도 찾았고, 나는 그만 가 봐야겠네.”

남자가 서둘러 몸을 틀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초조했다.

“아가씨도 밤길 어두운데 이만 들어가 봐요. 내일 일찍 출근도 해야 할 텐데, 피곤할 거 아니야.”

“네. 아저씨도 살펴 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별안간 주희의 두 눈이 서글프게 빛났다. 그녀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그럼 당연한 소리를. 무튼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남자는 몇 초도 되지 않아 모습을 감췄다.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주희는 문득 의아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근데 내 얼굴에 바쁘다고 써 있나? 내일 일찍 출근하는 건 어떻게 아셨지?”



*



윤 비서는 화가 나면서도 그 분노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달리 설우가 차디찬 시선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윤 비서님.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라뇨.”

거의 코앞이었다. 주희의 손이 스스럼없이 제게 뻗어졌고, 그 손이 닿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설우는 직감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윤 비서가 망쳤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의 등장이 설우로서는 퍽 당황스러웠다.

“대표님이야말로 왜 자꾸 무리수를 두십니까. 이건 그야말로 도박이라고요, 도박.”

“도대체 어느 부분이 도박이라는 거죠.”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서주희 씨가 대표님 몸에 손을 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래서 혹시나 이 일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고의적으로 설우의 뒤를 밟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만찬이 끝난 후, 곧장 자택으로 향해야 할 그가 따로 가 볼 곳이 있다는 말에 윤 비서는 어쩐지 뒤가 찝찝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의 영혼에 들어간 것처럼 기계적인 목소리와 움직임이었다.

“대표님, 서주희 씨가 이곳에 거주한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따로 뒷조사라도 하신 겁니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리고 설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 비서가 아는 최소한의 그는.

“남 뒷조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렇게 도덕적인 면에서 답답하리만큼 철칙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 말씀은…….”

설우가 씁쓸히 웃으며 제 손을 바라봤다. 덩달아 윤 비서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 갔다.

“이 녀석에게 서서히 잡아먹히고 있다는 거겠죠.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눈 깜짝할 새였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설우에게는 의식이 흐려지는 현상이 종종 나타났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제 두 발이 낯선 땅에 붙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목구멍에서 ‘냐옹’ 소리가 흘러나왔다. 녀석이 제 몸을 빌린 것이었다. 녀석은 늘 설우의 몸을 빌려 어딘가로 가기를 원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 눈에는 설우의 모습이 고양이로 변해 있었다.

눈을 떠 보면 매번 낯선 곳이었다.

이를테면 지하철역과 몇 걸음 떨어진 구석진 곳이라든가, 흙과 풀잎이 가득한 공원이라든가, 골목 모퉁이를 지나면 나오는 비좁은 길이라든가.

녀석은 늘 그런 곳에 가기를 원했다.

어째서?

그 이유를 찾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 그 여자를 만났다. 서주희를.

2년 전이었을까. 그날은 하늘에서 구멍이 났나 싶을 정도로 비가 잔뜩 쏟아졌다. 고양이로 변한 설우는 멍하니 비를 맞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타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설핏 고개를 들었다.

여자였다. 모자를 잔뜩 눌러쓴 여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갑자기 그를 껴안더니, 울먹이며 서글프게 속삭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를 혼자 두고 갈 수밖에 없어서…….’

그 속삭임을 끝으로 여자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설우는 빗물로 흐리멍덩해진 시야 속에서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

여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의 체취도 아니었다.

손.

제 머리를 쓰다듬던, 정확히는 녀석의 머리를 매만지던 그 여린 손에서 희미한 빛줄기를 보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벅찬 그 따스한 온기.

그리고 기적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그가 대표직을 달고 있는 회사에서 말이다.

“이제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가벼워진 설우의 어감에 윤 비서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어느새 반달이 된 달을 주시하며 설우가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달이 참 예뻐요.”

윤 비서는 문득 겁이 났다. 영혼을 잡아먹히기 시작하면 뇌도 잡아먹히는 건가? 그 순간 설우가 돌아서며 언짢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그래도 복길이는 너무하셨습니다. 복길이가 뭡니까, 복길이가.”

멍…….

뭐야, 지금 심기 불편한 게 고작 복길이 때문이었어? 이런!

“아, 같이 가요!”

윤 비서가 부리나케 설우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비추는 달빛이 유난히도 짙은 밤이었다.



*



“주희 씨, 어디 아파?”

소연은 올라오는 길에 산 비타민 음료를 내려놓으며 주희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원체 말수가 없고 조용조용한 편이라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형광등 아래 드러난 하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 쉬엄쉬엄 하지. 양 볼이 빨개.”

“오늘 정리할 문서들이 많아서요.”

“저번에 다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야 한데…….

“인턴은 인턴이지.”

인기척 없이 나타난 고 대리가 두 여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열심히 해. 우리 부서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마당에 설렁설렁 하면 되겠어? 조직 개편되기 전에 인사기록부에 한 문장 정도는 인상 깊게 남겨 줘야지. 그래야 어딜 가든 눈칫밥은 안 먹고 다닐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고 대리. 조직 개편이라니?”

난데없는 개편 소식에 소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고 대리가 쯧, 혀를 찼다.

“뭐야, 새삼스럽게. 전혀 몰랐다는 그 눈빛은. 설마 우리 부서가 승승장구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콧방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지금 회사 내에서도 라인을 잘 타야 한다는 소리로 시끄러운 마당에 누가 우리를 달갑게 보겠어. 눈엣가시 아닌 게 다행이지.”

어느 회사에나 사내 정치는 존재하는 법이다. 김설우와 최 전무. 사내에서 심심찮게 언급되고 있는 두 개의 큰 라인에서 굳이 누군가의 뒤에 서야 한다면 물을 것도 없이 설우였다. 그가 대표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 사내 정치, 라는 그 권력 싸움 또한 수심 밑으로 가라앉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조직 개편이라니?

소연과 주희가 미심쩍은 눈길을 비치자 고 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툭 까놓고, 이미 화공이니 제철 플랜트니 떼돈 벌고 있는 회사 입장에서 인테리어가 가당키나 하겠어? 이름만 들어도 그쪽 분야로 유명한 기업들이 몇 곳인데. 그리고 인테리어 부서를 만든 사람도 김 대표잖아. 만약 김 대표가 완벽히 대표 자리를 꿰차지 못해 봐. 그럼 우린 개밥에 도토리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고 대리의 말은 한바탕 쓸고 간 쓰나미와도 같았다. 조직 개편도 감당하기 벅차 죽겠는데, 부서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니까 살아남으려면 이 악물고 열심히 해, 그래야 미운 놈 떡 하나라도 더 주지. 그럼 수고!”

이번에 구입한 신상 백을 툭툭 두드리며 고 대리가 부서를 빠져나갔다. 소연은 얼빠진 얼굴로 철썩, 자리에 앉으며 탄식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전에 있던 부서를 포기하고, 여길 들어왔는데.”

당황스러운 건 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야기가 나돌았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텐데, 어떠한 낌새도 알아챌 수 없었다.

“설마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까요. 아시잖아요. 우리 대표님…….”

별안간 입술이 다물어졌다. 우리 대표님? 자연스레 설우의 얼굴이 생각나자 주희는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김 대표님, 그렇게 능력 없는 분 아니시잖아요.”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김설우는 언제나 화젯거리를 몰고 다녔다. 그는 그 어렵다는 중동 지역의 EPC를 한 번에 따내는 성과를 내보였다. 그 결과, 나라 대 나라의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방송 언론을 비롯해 유명한 잡지사, 경제 신문사에서 한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근데 고 대리는 이런 이야기를 왜 우리한테 해 줘? 남들 다 퇴근한 마당에 심지어 그것도 은밀하게.”

소연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는데요.”

“뭐?”

주희가 제 앞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바라보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전 오늘 야근이라는 거.”

“헐. 잠깐만, 이거 다시 보니까 고 대리가 작성해야 할 결재 서류들 아니야? 이게 왜 주희 씨한테 가 있어?”

“글쎄요.”

어쩐지 그냥 넘어간다 싶었다. 이건 명백한 보복이다.

“으! 이 마녀! 심보가 이렇게나 고약해서 누가 데려가기나 하겠어!”

“먼저 퇴근하세요.”

“낯빛이 안 좋은데, 괜찮겠어?”

“내일 아침에 변변찮은 말로 시달리는 것보다는 낫겠죠.”

“무리는 하지 말고.”

소연이 나가자 비로소 혼자가 된 주희는 빙그르르, 의자를 돌리며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하아…….”

진짜 몸살이라도 나려고 그러나. 입 안이 텁텁한 게 침을 삼킬 때마다 목 안이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잠을 깊이 자지 못한 게 원인인 듯싶은데.

불면증이 도진 건가.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세수라도 좀 하고 와야겠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부서 밖이 어둑했다. 또각또각, 낮은 굽 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히 울려 퍼지는 걸 의식하던 차였다.

“니야옹.”

……응?

“니야옹.”

이게 무슨 소리야?

주희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경계했다. 누가 들어도 이건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한데 이 소리가 왜 이 복도에서 들리는 걸까.

“어? 너는…….”

주희의 두 눈이 크게 팽창되었다. 모퉁이 구석에서 자그마한 것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하지만 서글퍼서 더 빛을 발하는 초록색 눈동자.

“……복길이?”

소리를 내자마자 녀석이 돌아섰다.

“잠깐만. 거기로 가면 안 되는데.”

녀석은 듣는 척도 않고, 가볍게 몸을 털어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복길아, 잠깐만.”

얼마나 쫓고 쫓는 추격전을 벌였을까. 어느새 눈앞에 막다른 길이 들이닥쳤다.

“이상하다. 분명 이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그새 길이 엇갈린 걸까. 서둘러 몸을 돌리려는데.

“서주희 씨.”

소름이 돋을 만큼 낮은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기만 한 부름. 이 목소리를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눈을 가늘게 뜨며 돌아선 주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

눈동자.

어느새 밝아진 복도 한 켠에서 복길이와 똑같은 색을 머금은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짐승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라는 것.

눈이 마주친 순간 주희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그 여린 몸을 설우가 단숨에 받아 들었다. 창백한 주희의 상태를 살핀 그가 흐음, 고적한 숨을 흘렸다.

“기절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