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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여직원 이름이 뭐라고 했죠?”

윤 비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열심히 두뇌를 회전시켰다.

“서주희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주희 씨와는 그 후로 어떤 접촉도 없으셨어요?”

접촉이라. 그 후로 한 번도 그녀와 대면하지 않았으니까. 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윤 비서가 의아함을 띠었다.

“아니, 왜요?”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더 이상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불쾌하다고 했어요?”

“네. 다시는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 그래서 그대로 내버려 뒀다는 말입니까?”

아니겠지, 설마. 그 정도로 사람이 융통성 없진 않겠지. 일말의 희망을 품었으나, 설우가 그것을 처참히 무너트렸다.

“그 후로 한 번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윤 비서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부서져 내렸다. 그는 흐느끼며 힘없이 탁상을 내리쳤다.

“……당장 붙잡아서 해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요? 서주희 씨가 대표님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 이 회사의 대표가 사실은 변태였구나, 사이코였구나! 그렇게 혼자만 생각하면 다행이게요? 누구한테 말이라도 해 봐요. 그게 어디 한 명이겠냐고요. 이제 망했어요. 모두 망했다고요.”

윤 비서가 또다시 곡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설우가 깍지 낀 손에 턱을 묻으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거 큰일이군요.”

그걸 이제야 알았냐, 이 양반아!

“제가 보기엔 이번에도 틀린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는 게…….”

“아니요. 그 여자는 다릅니다.”

꽤나 단호하게 설우가 말을 자르자 윤 비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뭔가가 달라요.”

고심한 표정을 지은 그가 한쪽 눈꺼풀을 찡그렸다.

“온기가 보여요. 그 여자 손에서. 그리고…….”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비가 쏟아질듯이 퍼붓던 그 날.

‘미안해. 흐윽……. 정말 미안해. 이제 다시 못 올 거 같아. 잘 살아.’

그 여자는 울고 있었다.

“그럼 차라리 이실직고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냥 모든 걸 다 사실대로 말해 버리지. 이게 뭡니까. 지금 겪고 있는 일도 벅차 죽겠는데, 왜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하나 더 만들어 버렸냐고요.”

사실대로 말한다라……. 그 생각을 설우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과연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어쩌면 차라리 윤 비서가 걱정하는 사이코 변태 이미지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설우는 느긋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어둠에 깔린 건물들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어두웠다.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에서는 노란 빛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은 빛이 하늘에서 부서져 내릴 것이다.

그럼 곧 어둠 속에 잠길 저 건물들 또한 환히 빛을 발할 테고, 나는 당연하듯이 변하겠지.

“윤 비서님.”

윤 비서가 못마땅한 눈으로 설우를 흘겼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뭘 말입니까.”

설우가 힐끗 윤 비서를 돌아보고는 짧게 웃었다.

“진심으로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아, 그러니까 뭘요.”

“제가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걸…….”

설우는 말을 마저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새 밝게 스며 들어오는 달빛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윤 비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선가 하얀 빛이 부서지듯 그의 두 눈을 찔렀다. 너무 새하얘서 눈을 뜨는 게 버거울 정도였다.

눈꺼풀을 한참 동안 비빈 후에야 겨우 눈을 뜬 그는 숨을 훅 들이켰다.

수십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

그의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김설우’라는 명패 곁에 꼬리를 농염하게 흔드는 생물체 하나.

청회색으로 물든 것이 그린 사파이어와도 같은 눈동자로 윤 비서를 직시했다. 그리고 날름거린다.

“니야옹.”

그 소리에 등줄기가 주뼛 선 윤 비서는 창밖 너머를 바라봤다. 보름달이 어느 때보다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오지 마. 제발, 오지 말란 말이야!’

주희는 사색이 된 얼굴로 넓은 대지를 달렸다. 악몽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저 뒤쫓아 오는 거센 어둠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머지않아 사람들로 추정되는 실루엣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도, 도와주세요.’

간곡히 애원하자 그들의 고개가 주희에게로 향했다. 이제 살았구나, 안도한 순간.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에 내리꽂혔다.

‘왜 그랬어?’

주희는 주춤했다. 사람들의 눈빛이 살쾡이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마치 한입에 저를 잡아먹고 말겠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흉포했다.

‘왜 해선 안 될 짓을 했어. 그렇게 굴지 말았어야지. 네가 그런 식으로 굴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잖아.’

하나의 비수는 곧 수십 개가 되어 심장을 할퀴었다. 끊임없이 같은 말이 반복되며 그녀를 괴롭혔다.

이건 네 잘못이야. 이건 다 너로 시작된 일이야.

반복되는 아우성을 들으며 주희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거짓말하지 마! 다 너 때문이야, 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주희는 돌아섰다. 저들 중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어디 있지?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어딜 가야…….

두 발이 어느새 벼랑 언저리에 닿았다. 그 끝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뒷모습만으로도 주희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목소리를 쥐어짰다.

‘……선배, 도와주세요.’

남자가 서서히 몸을 틀었다. 시선이 맞물렸고, 남자의 기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역시. 선배는 아니죠. 선배는 다르죠.’

주희가 눈물을 머금고 한 발짝 내딛던 찰나였다.

‘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선배.’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말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미련 없이 돌아서자 주희는 그를 붙잡기 위해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강욱 선배,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그게 아니에요. 그게……!’

남자에게 닿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우직, 소리가 들리더니 두 다리가 밑으로 하강했다. 절벽이었다. 죽음이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심장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아픔 속에서도 주희는 끝없이 외쳤다.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그런 게 아니야. 제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줘요. 제발…….

“하아!”

주희는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하아, 하아,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커튼 밑으로 스며 들어오는 빛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탄식했다.

“……왜 또 이러는 건데.”

한동안은 잘 꾸지 않던 악몽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순간 진동이 느껴졌다.



[엄마]



주희는 휴대폰을 쥐고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된 심장을 붙잡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엄마.”

― 딸, 자고 있는데 깨운 거 아니지?

“아니에요.”

― 다른 게 아니라. 그, 이번에는 내려오는 거지?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울린다 싶더니.

“내려가야죠. 아빠는 좀 어떠세요?”

― 네 아빠야 늘 한결같지. 그래도 이번에는 내심 내려오길 바라는 눈치더라. 직접 물어보면 될 걸, 꼭 나를 시켜요.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주희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원체부터 아빠는 표현하는 데 있어서 서투른 남자였다.

― 저 주희야.

전과 달리 정희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묻고 싶은데, 물을 수 없다는 수심. 이를 눈치챈 주희가 덤덤하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한참의 정적 끝에 조바심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 요새 만나는 사람은 없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다. 아니, 요새 가는 곳마다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자식은 너 하나뿐이어서 그런지,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가네. 미안해.

주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더 이상의 통화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지금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 어, 그래, 그래. 마지막 주에 내려오는 걸로 알고 네 아빠한테 귀띔해 놓으마.

“네, 알겠어요. 또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끊자마자 주희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결혼이라…….

두 글자가 아득히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이제는 낯설기만 하다. 가슴 불타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언제더라.

아니.

내가 다시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막연함에 마음이 가라앉던 찰나, 어젯밤 보고 펼쳐 둔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김설우, 그가 추구하는 시온이란?」

주희의 눈빛이 심란했다.

솔직히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김설우가 어떤 인물이던가. 매사에 차갑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회사를 이끄는 남자였다. 사내에서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입방아에 올랐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주희도 그를 관심 있게 주시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김설우 때문에 시온에 입사한 것도 없지 않아 있으니까.

그런데…….

“남자는 다 똑같아.”

결국 김설우도 권력을 남용하는 놈들과 다를 게 없다고, 단정 지으려다가도 주희는 생각을 멈췄다. 정말 이상했다.

‘내 머리 좀 쓰다듬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을 그렇게나 정중한 얼굴로 하는 남자는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



“이 정도면 되려나.”

주희는 현관문 앞에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봤다. 봉지에 손수 담은 사료와 몇 개의 간식용 참치 캔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오면서 주희는 가장 먼저 높은 담장과 공원, 주차된 차 밑을 꼼꼼하게 살피고 다녔다.

“저번에 보니까 두 마리 더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그녀에게는 유일한 취미가 있었다. 길고양이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밥을 챙겨 주고 다니는, 일명 캣 맘이었다.

“후딱 주고 한 시간 내로 와야겠다.”

생각보다 이 동네는 많은 길고양이들이 먹이를 찾아다녔다. 쓰레기통 주변에 떨어진 찌꺼기를 먹는 걸 볼 때면 내심 마음이 쓰렸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준비한 참치 캔을 따서 아이들이 먹을 만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샤샤샤, 풀잎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마리가 금세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

퇴근길에서 몇 번 봤던 아이다. 몸통은 까만색이면서 네 발바닥은 글러브를 찬 것처럼 하얀 고양이.

“다시 보니까, 얼굴에 점박이가 있네. 괜찮으니까 이리 와서 먹어.”

살뜰하게 굴었지만, 녀석은 경계 태세를 갖추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배가 고픈지 노란 눈동자는 황망하게 흔들리며 참치 캔을 주시한다. 그 모습에 주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러섰다.

“혼자만 먹지 말고, 다른 친구들 것도 남겨 둬야 해. 알았지?”

이곳저곳에 먹이를 주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마지막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곳을 찾았다.

이 근방쯤이면 될 것 같은데.

아이들이 쉽게 먹이를 찾되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는 곳에 그릇을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또 금세 먹이를 알아차린 녀석인가 싶어 몸을 돌린 주희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예상한 대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고양이였다. 그런데 생김새가 다른 녀석들과는 많이 달랐다.

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아이.

“너는…….”

러시안블루다. 흔히 애완용으로 키우는 고양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녀석의 생김새.

같은 러시안블루여도 턱선이 유난히 날카롭고, 몸 곳곳마다 선이 유려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홀릴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는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주희가 홀린 듯이 속삭였다.

“……브릿지.”

그 소리에 반응하듯 녀석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