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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 다녀오세요.”

윤 비서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예정대로 해외 출장이 잡힌 그는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순수하게 웃고 있는 설우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고 치지 마세요.”

단단히 경고하자 넓은 어깨가 뻔뻔하게 위로 솟았다 아래로 떨어진다.

“윤 비서님도 없는데, 누구 좋으라고 사고를 치겠습니까.”

전과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윽박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았다.

“최소 일주일 안에는 꼭 돌아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테니까, 그사이에 혹시라도.”

사고를 쳤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벌한 시선에 설우가 담백하게 받아쳤다.

“염려 마세요. 절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윤 비서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설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윤 비서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순간 입에 머금고 있던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은 빼고 말이죠.”

느긋하게 돌아선 그가 책상 위 키폰을 눌렀다. 삐이, 소리와 함께 고즈넉한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인테리어 부서, 강 팀장에게 연결 부탁합니다.”



*



“오늘 하루만 주희 씨가 올라가도록 해. 보고서 관련된 내용은 걱정하지 말고. 그냥 이것만 대표님께 전해 드리면 돼.”

주희는 건네받은 보고서를 조용히 응시했다. 팀원들이 전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파티션 너머로 뻗은 강 팀장의 손짓이 은밀했다. 용건은 간단했다. 다만 그 용건이 주희에게는 난감하기 그지없었지만.

“기다리고 계실 거야. 지금 올라가 봐.”

“……네. 알겠습니다.”

주희는 갑갑한 마음으로 부서를 나섰다. 강 팀장을 대신해 설우에게 보고를 올리는 일은 그렇다 쳐도, 그게 왜 자신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조만간 또 보도록 하죠.’

도무지 그 의미를 찾지 못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닐 거야. 그때 본 게 처음인데, 어떻게 날…….

주희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무실로 향했다. 데스크에 앉은 비서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에 다가서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를 스쳤다.

비로소 홀연히 집무실에 들어서게 된 주희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책상 위 명패를 바라봤다. 그곳엔 대표 ‘김설우’라는 이름이 정교하게 박혀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 탓일까.

음영 진 그의 얼굴은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눈매였다. 쌍꺼풀 없는 눈치고 뚜렷하면서도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사뭇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편하게 앉아요.”

설우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주희는 주춤거리며 마련된 자리에 앉으려다가 허리를 곧게 폈다.

“강 팀장님께서 대신 보고서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이쪽에 내려 두면 될까요?”

흘러나온 목소리가 딱딱했다. 설우가 보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젖히며 시선을 던졌다.

차분하면서도 정교함이 흐르는 까만 눈동자.

그것이 찬찬히 주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려갔다.

“서주희 씨는 내가 불편한가 보죠?”

속내를 꿰뚫는 듯한 말투에 주희는 침묵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이 회사를 대표하는 상사와 대면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무엇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기분 나쁘게 뛰어 대던 심장이 어느 순간 거칠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불길한 직감.

그게 자꾸만 붉은 경고 등을 울려 댔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서주희 씨를 이곳으로 불렀어요.”

어째서? 주희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담백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

“당사자가 꽤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주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 몇 초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설우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주희 씨.”

냉혈한 눈매가 전신을 찔렀다.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려는데.

“손 한 번만 내밀어 볼래요?”

주희가 흠칫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설우가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괜찮다면 왼손이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손은 왜? 묻고 싶었으나 이미 제 손은 설우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고요한 시선이 손안 가득 머무른다. 꼭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예리한 시선에 어깨가 경직된 순간, 그가 갑자기 무릎을 굽혀 같은 눈높이를 유지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낯선 타인의 향기에 주희가 당황하며 고개를 뺐지만, 그 전에 먼저 손목이 붙잡혔다. 부드럽고 단단한 악력이었다. 꼼짝없이 그에게 붙들린 입장이 되자 머릿속이 하얬다.

무엇보다…….

너무 가깝잖아.

서로의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앞뒤 볼 것 없이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려는데, 설우가 진중한 얼굴로 운을 뗐다.

“혹시.”

“…….”

“그 손으로.”

그 손으로? 주희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내 머리 좀 쓰다듬어 줄 수 있습니까?”

아주 깊은 침묵이 흘렀다. 주희는 몇 번이나 설우가 뱉은 말을 되새겼다.

어딜 쓰다듬어…… 줘?

“그게 무슨…….”

도통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급작스레 대표실로 온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이 남자의 변설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니.

“잠깐이면 됩니다. 아주 잠깐만.”

설우가 본래의 차분한 페이스로 돌아와 설득했다. 그러나 주희는 이미 경계심을 품은 터였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폼이 꽤나 겁을 먹은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일순 설우의 눈빛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 모습에 주희는 기가 차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일갈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절 부르지 마세요.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저, 서주희 씨.”

주희가 쏜살같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붙잡지 못한 설우의 기다란 팔이 허공에 처량히 매달렸다. 한동안 주희가 머문 흔적을 응시하던 그가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역시 무리인 건가.”



*



윤 비서는 잡혀 있던 해외 일정을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본사로 돌아왔다. 마음이 조급했다.

달칵―!

평소 같았으면 노크 정도는 했을 텐데, 오늘은 무조건 생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뒤통수를 향해 냅다 소리쳤다.

“왜 이렇게 막무가내입니까!”

“아, 왔어요.”

“아, 왔.어.요? 지금 뭘 잘했다고 여유가 넘쳐흘러요?”

더 격하게 반겨 줘야 하는 건가.

윤 비서의 까칠함을 그렇게 해석한 설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 듣자고 숨도 못 쉬고 달려온 줄 알아요?! 아니, 일을 저지를 거면 최소한 저랑 상의 정도는 하셨어야죠. 무턱대고 실행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더 언성을 높였다간 혈압이 오를 기세인데.

윤 비서는 평소 고혈압을 달고 살았다. 종종 약을 처방받고 돌아오는 그를 볼 때면 새삼 깨닫는다. 단정하게 올라간 머리가 언제 저리 하얗게 바랐었나. 눈가는 언제부터 주름이 이렇게 자잘했었나.

“윤 비서님.”

설우의 부름에 윤 비서가 눈을 치켜떴다.

“왜요.”

“윤 비서님도 이제 퇴직할 시기가 다가오신 것 같아서요.”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사직의 사 자도 못 꺼내고 있는 건데.”

원칙적으로 사직서는 벌써 내고도 남았어야 했다.

올해로 그의 나이, 쉰여덟.

그에게 살면서 단 하나의 로망이 있다면 앞자리 수가 ‘5’로 바뀌는 해, 당당히 사직서를 내고 그간 모아 둔 돈으로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때문에, 김설우 때문에 모든 게 산산조각 났다.

노후는커녕 이러다가 평생 그의 옆을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싫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것만큼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단 말이다. 어떻게 모아 둔 돈인데. 그걸 한 푼도 쓰지 못하고 관에 갇히라니.

“그래서 그 여직원이랑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도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대표실 문을 박차고 나가냐고요.”

탑승하기 전에 급히 통화를 한 탓에 뒷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설우가 사고를 쳤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머뭇거리는 걸 보아하니 단단히 큰일인가 보다.

“똑바로 말하세요.”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설우가 금세 이실직고했다.

“머리 좀 쓰다듬어 달라고 했습니다.”

“……뭐요?”

“왼손으로 머리 좀 쓰다듬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을 바라보던 주희의 눈빛이 생각난다. 설우는 그 기억을 더듬어 비슷하게나마 주희와 같은 눈으로 윤 비서를 바라봤다.

“이런 눈으로 날 보더군요.”

윤 비서는 날카롭게 설우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을 캐내었다. 정확히 3초 후, 불벼락이 떨어졌다.

“융통성을 밥 말아 드셨습니까!”

그렇다. 주희의 두 눈에 비추었던 것은 경멸감인 것이다. 갑자기 제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니. 그 누가 거기서 암요, 쓰다듬어 드려야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미친놈으로 보지 않았으면 다행이지.

“내가 그렇게 사고를 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요, 말귀를!”

설우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그러다가도 아이고야, 아이고. 뒷목을 잡는 윤 비서의 상태에 다급히 그를 소파에 앉혔다.

“윤 비서님, 일단 진정하세요. 그러다 혈압 올라갑니다.”

“지금 안 올라가게 생겼어요?!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요! 아이고야, 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 마르고 닳다가 내가 닳게 생겼네.”

윤 비서는 한참 동안이나 곡소리를 냈다. 이제 나의 노후는 날아갔네, 나는 이렇게 죽을 운명인가 보네, 끊임없이 한탄을 쏟아 내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설우를 다그쳤다.

“대표님, 이제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뭘 어떡하다니요.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죠. 그 여직원이 혹시나…… 혹시나 대표님과 있었던 일을 회사 내에 퍼트리고 다니면…….”

그것만큼 아득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 왔던 설우의 이미지가 모래성 허물어지듯 부서지는 건 물론이고, 김 회장을 볼 면목조차 없어진다.

김 회장은 현재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회장 자리는 비어 있었고, 임시직으로 그 자리를 그의 외아들인 설우가 대신했다. 얼마나 많은 반발이 빗발쳤는지 모른다. 그 자리를 채우기엔 설우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부터 시작해 나이가 적절치 않다, 신뢰성이 떨어진다, 별별 이유들을 들먹이며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김 회장에게 자식이라고는 설우뿐이었고, 회사의 지분을 상당량 가진 대주주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엔 외아들 쪽이 낫지 않겠냐며, 설우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믿음에 보답하듯 설우는 물 흐르듯이 제게 놓인 업무들을 해치워 나갔다. 반발하던 이들도 그의 능력 앞에서는 하나같이 합죽이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기 직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