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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품어 줘 >


1.



어둠이 내려앉은 주말 밤.

세찬 빗줄기가 매섭게 바닥을 내리쳤다.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들은 극히 드물었고,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찍 셔터 문을 내렸다. 사람 냄새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거리는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천천히 잠식되어 간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자정이 넘은 고요한 시각.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설우의 숨소리가 꽤나 거칠었다. 그는 평소보다 두 배의 운동량을 해결했다. 이렇게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하지만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짙은 어둠으로 뒤덮인 이 시각만이 그에게는 유일하게 자유를 선사해 주는 조건이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그 누구의 구속도, 하물며 벗어날 수 없는 숙명조차도 그를 방해할 수 없는 순간.

축축한 머리칼을 털어낸 그는 능숙하게 대문을 넘어 자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현관에서 낯선 구두를 포착한 순간, 고운 얼굴 위로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오늘 같은 날은 쉬실 줄 알았더니.

거실에 다다르자 어둠에 익숙한 설우의 눈동자 안으로 한 남자가 스며들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남자는 창밖을 향해 서서 뒷짐을 진 채 폭풍 같은 장대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설우가 센서 등 버튼에 손을 데려던 찰나, 남자가 말했다.

“켜지 마세요.”

“윤 비서님.”

“켜지 말라고 했습니다.”

젊게 보아야 쉰에 가까운 남자, 그러니까 윤 비서라고 불리는 그가 돌아서며 고요히 설우를 직시했다. 그 적막한 시선에 설우는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윤 비서님. 사실은…….”

변명을 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섬광 같은 빛줄기가 번쩍이더니 우르르 쾅, 거센 굉음이 귓가로 찢을 듯 파고들었다. 한 발, 한 발 묵직하게 다가온 윤 비서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설우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정식 취임식이 있기 전까지는 회사를 제외한 그 어느 곳에도 대표님, 흔적. 일체 남기지 않는 걸로.”

귀가 닳도록 당부했던 경고를 그가 모를 리 없다. 오늘 오전에 급하게 잡힌 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진지한 얼굴로 화답했다.

‘당연하죠. 염려 마세요. 주말 저녁은 집에만 처박혀 있을 거라서.’

한데 입가에 미소까지 문 모습이 영 수상치 않았다. 혹시 몰라 불시에 집에 쳐들어오니 역시나. 그의 흔적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자, 어디 한번 그 잘난 입으로 떠들어 보시죠.”

“변명할 게 있을까요. 사실인걸.”

“뻔뻔한 구석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해져 갑니다?”

“그거 칭찬입니까? 그럼 더 날뛰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드는데.”

“대표님!”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있던 윤 비서가 큰 소리로 다그쳤다.

“지금 저랑 여유롭게 말장난이나 할 때입니까!”

“말장난? 칭찬인 줄 알았는데, 꽤 서운한데요?”

한쪽 눈꺼풀을 찡그리며 서운한 티를 냈지만 윤 비서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설우는 이 상황이 그저 즐겁기만 한 듯 축축한 셔츠를 단숨에 벗어젖혔다.

갈증이 났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중 한 방울이 또르르, 각진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자 다소 투박하게 닦아 내며 윤 비서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한 모금 하시겠어요?”

“오늘 최 전무가 어떤 연락을 한 줄 아십니까?”

“최 전무님이요? 글쎄요. 제게 무슨 볼일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아님 진짜 몰라서 묻는 겁니까.”

딱히 최 전무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를 마주하는 것은 회사에서뿐. 그마저도 회의를 제외하고는 드물었다. 설우는 제 몫을 해치우느라, 최 전무는 초기 회장 ‘김성범’의 오른팔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원체 바쁜 사람이었다.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더군요. 나, 원 기가 차서. 부사장이랑 벌써부터 손을 잡은 게 확실합니다. 어쩐지 잠잠한 게 수상하다 싶었지.”

“그래서 윤 비서님은 뭐라고 답하셨는데요?”

“그야 당연히 안 될 것 같다고 했죠.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제 어쩌실 겁니까. 곧 있으면 해외 출장도 가야 하는데, 막막해서 원.”

예정대로라면 설우가 중동 지역으로 떠나야 했지만 애초부터 무리였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그를 대신해 윤 비서가 2년째 해외 출장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하필 이럴 때 최 전무가 접촉을 시도해 오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제발 주말에는 집 안에만 있으라고요. 간곡히 부탁하면 좀 들어주는 척이라도…….”

“분명 윤 비서님도 허락하신 부분일 텐데요.”

말허리가 잘리자 윤 비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설우가 팔짱을 끼며 냉장고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저한테 자유라고 할 시간은 주말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을 제외하곤 회사, 집. 그게 전부죠. 그리고 말은 바로 하셔야죠. 윤 비서님이 간곡히 부탁하실 부분은 그게 아니잖아요? 하루빨리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모를까.”

안 그렇습니까.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윤 비서는 또 한 번 분노가 치솟았으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오호, 거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찾으려는 노력은 하셨고요? 아아, 초반에는 그런 척이라도 해서 이 늙은이가 속아 주기라도 했지. 지금은 뭐죠? 저번주에는 뒷산을 뛰어다니지 않나, 저번달에는 회사 주변을 뛰어다녔다죠?”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윤 비서는 무언가를 보곤 기함했다. 집에 얌전히 있어야 할 설우가 회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의 얼굴이 아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 변화를 자신이 먼저 발견해서 망정이었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했다면…….

상상만으로 현기증이 일자 윤 비서가 빙그레 웃으며 씹어뱉었다.

“그냥 이 늙은이를 죽이세요. 누구 때문에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직전이라. 노년에 아파서 뭐 하나. 콱 죽어 버리는 게 낫지.”

“극단적으로 상황 몰아가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그리고 들으면 기뻐할 소식도 있습니다.”

“웃기지 마세요. 또 변변찮은 말로 넘어가려는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찾았습니다.”

윤 비서가 멈칫하며 미간을 구겼다.

“뭘 말입니까?”

“과연 뭘까요? 아마도 지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설마…….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늙은이 이래도 귀 안 먹었습니다.”

부정하면서도 윤 비서의 가슴이 잔뜩 부풀었다.

어떠한 기대감.

그것이 단숨에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진, 진짜예요? 정말로 그 사람을 찾은 겁니까?”

“맞는 거 같아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설우는 두 손가락으로 제 눈을 가리켰다.

“그때와 똑같은 게 보였거든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제 머리와 등을 쓰다듬던 그 여자의 손길, 그리고 그 손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주황빛의 어슴푸레한 온기.

설우가 설핏 미간을 구기며 덧붙였다.

“대신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요? 그게 뭡니까.”

윤 비서의 손안 가득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쩐지 좋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제발 엇나가길 바랐지만 신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그 사람 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회사 신입 사원인 것 같던데.”

……신이시여. 제발.

“그것도 우리가 개설한 인테리어 부서 말입니다.”



*



“주희 씨, 뭐 하자는 거야?”

아침부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인테리어 부서를 울렸다. 장본인은 고 대리였다. 제 기준에 엇나가는 행동을 보일 시 야비하게 업무적인 일로 상대방을 걸고넘어지는 게 그녀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오늘도 죄 없는 인턴이 희생당하는 중이었다. 다만 고 대리가 무슨 폭언을 쏘아붙여도 여자는 한결같이 무표정을 유지했다.

“일을 처리할 거면 동등하게 처리하던가.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양 대리한테는 후다닥 달려가면서 나한테는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저거, 저거 또 시작이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쯧쯧, 혀를 찼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보다 못한 오 과장이 나서려는데, 주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고 대리님이 무능력한 분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요.”

“뭐?”

“결재 서류 찾는다고 하셨죠? 여기 있네요.”

주희가 가리킨 곳은 고 대리의 책상 왼쪽이었다. 종이 한 장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큼지막하니 ‘이번 달 결제’라고 적혀 있다.

“늦게 온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오른쪽은 뒤지면서 왜 왼쪽은 뒤질 생각을 안 하셨을까요. 몇 초도 아니고 3분이란 시간 동안.”

꼭 일부러 작정한 것처럼.

그 차가운 시선에 얼이 빠진 건 고 대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팀원들도 하나같이 입을 벌렸다.

고 대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버벅거렸다.

“그러니까 주희 씨 말은 뭐야, 내가 작정하고 그랬다는 거야? 사람을 뭘로 보고!”

“어허, 고 대리. 여기 회사야. 곧 있으면 팀장님 돌아오실 시간에 이게 무슨 추태야.”

“추태요? 오 과장님 지금 말 다 하셨어요? 추태라뇨! 누가 먼저 열받게 했는데. 저는 저 계집애가 하도 괘씸해서……!”

저 계집애?

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고 대리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아, 오 과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발 조용조용히 좀 살자고. 안 그래도 회사 상대로 눈칫밥 먹고 다니는 상황에 고 대리까지 이래야겠어.”

고 대리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정작 주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리로 돌아가서는 무심한 눈으로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



오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설우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남은 스케줄을 확인하려는데, 휴대폰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킷 안쪽과 바지 주머니를 더듬는 분주한 손짓에 윤 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데요?”

“휴대폰을 차에 두고 온 것 같습니다.”

“칠칠맞기는. 기다려요. 금방 가지고 올 테니까.”

“됐습니다. 윤 비서님은 미팅부터 잡으세요.”

“그래도 혼자 가기에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면 몸에 해롭습니다. 그리고 전 집착하는 거 굉장히 안 좋아합니다.”

“누가 집착을 한다고……!”

엘리베이터가 금세 목표 층에 도달하자 설우가 재빨리 윤 비서를 문밖으로 밀어 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층수를 바라보는데,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숫자는 ‘8.’

눈에 익은 숫자였다. 2년 전, 설우가 추진한 인테리어 부서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스르륵.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설우의 눈이 잠시나마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반면 주희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딱딱했다.

여자는 마치 곧은 소나무 같았다. 하얀 피부와 굳게 닫힌 입술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서늘했다. 혼자만의 감상을 끝낸 설우가 나직이 내뱉었다.

“우리 구면이죠?”

주희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제야 제 옆에 서 있는 설우의 얼굴을 확인한 갈색 눈동자가 얕게 흔들린다. 단숨에 그가 누구인지 안 듯싶었다.

그런데 구면이라니?

그 어디서도 설우를 본 적은 없다. 다른 인턴들의 말을 빌리자면 운 좋게 로비에서 그를 스쳐 본 게 전부라지만, 주희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달했다.

주희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빠져나갔다. 찰랑, 거리는 그녀의 포니테일 머리를 지켜보며 설우가 담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

“서주희 씨.”

주희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됐다.

내 이름을 어떻게…….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틈새가 만들어진 순간, 그사이로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조만간 또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