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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해연이라면 모를까 강 대표라니. 그 인사가 어미랍시고 자신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는 일이 없다는 것은 시어머님이 먼저 아실 터인데도 오죽 답답하시면 저런 질문을 하실까 싶었다.

어릴 적에도 그랬고 지금껏 집 안을 들고 날 때의 단정한 인사 외에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는 사이였다. 불가분의 관계임은 틀림없지만 서로 가까워질 의지 또한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실이 아닌 의견을 묻는다면 말씀드릴 수는 있다. 아마도 전조는 이혼한 전처인 해연에게 지금 한 여사가 걱정하는 종류의 감정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 정도랄까.

실제 우연히 한 레스토랑에서 두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고 그때의 느낌이 그랬다. 식사 내내 살갑고 다정한 면을 보이는 해연은 이혼 전보다 더욱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만, 전조의 반응은 여전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할 때의 무덤덤함에, 약간의 안쓰러움과 이혼을 막아 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미된 어설픈 마음.

전조 그 아이가 한평생 누군가를 가슴에 담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제 비틀어진 출생에 대해 지금껏 모를 리 없다. 알았다면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지나갔어야 할 것을, 지금껏 아무 소리 없는 것만 보아도 그 무던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호적상의 어미인 자신에게 늘 정중함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적의도 분노도 담지 않은 무던함.

헌데 지금의 시어머님은, 전조가 애정을 가지고 해연이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다니. 어이가 없다. 시어머님이 들이민 그 수많은 선 자리가 성공적인 재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전조의 바로 그 성격 탓이 뻔한데. 바로 시어머님이 끼고 가르치신, 그 잔정 없는 무뚝뚝한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탓.

“해연이 탓은 아닐 겁니다.”

신중한 며느리의 대답에 한 여사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평소 전조에 대해 가타부타 별말이 없는 며느리가 이리 명료하게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 그럼,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기만 하면 될 터였다. 장손의 첫 번째 결혼 때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에미가 그리 본다니, 한시름 놓이긴 한다만. 쓸모없는 아이가 계속 근처를 맴도는 건 안 되지. 우리 강 대표가 마음이 약해 놔서 끊어 내질 못하는 게야.”

강 대표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지만, 제가 한번 싫다 그르다 못 박은 것을 누가 억지로 시키려 드는 것을 용납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전화기를 끌어당겨 버튼을 누르는 시어머니의 모습에 김 여사는 다시 한숨을 참아야 했다.

“이보시게, 진 회장. 나 한금옥이야. 그래, 잘 지냈나?”

안부 인사에 이어 별다른 말이 오가기도 전에 바로 본론을 꺼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어지간히 급하신가 보다.

“지난번 자네 둘째네 손녀가 귀국하는 바람에 골프 약속 취소했던 거 안 잊었지? 아, 글쎄 지난달이고 지지난달이고 서운했어. 그래서 말인데―”

쟁반을 거두어 조용히 물러나던 김 여사는 이 답답한 집 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복도 창밖으로 을씨년스런 바람이 정원수의 가는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가련해 잠시 보고 섰는데 누군가 다가와 쟁반을 받아 들었다. 까무잡잡하고 조밀한 얼굴. 김 여사는 방금 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3. 강전조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정원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싸늘한 초겨울의 공기에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해 전조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흰 와이셔츠가 가슴 앞에서 팽팽히 달라붙으며 한기가 치고 들어왔지만, 답답했던 집안 분위기보다는 상쾌했다. 발걸음을 떼어 놓는 그는 간만에 녀석들을 볼 생각에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단 채였다.

열흘 만에 출장에서 돌아와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할머니께 호출이 왔다.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들어오라는 전언이었다. 역시나 이상했다.

원래 이번 유럽 출장은 이 전무가 갈 예정이었다. 출장 당일, 본인이 지난달까지 추진했던 부산 공장 건에 사후 문제가 발생했다며 쩔쩔매기에 자신이 대신 유럽에 간 것이고.

한데 유럽에 도착한 뒤 받은 보고에 의하면 부산 상황이 애초부터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무가 그것을 파악치도 못한 채 상사인 자신에게 대신 출장을 가게 만들었을 리도 없거니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할 만큼 쩔쩔매던 이 전무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짐작하건대 출장을 그에게 미루게 되어서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회사며 자신에게 그럴 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분, 방금 전까지 저와 마주 앉아 계시던 할머님뿐이니까.

출장 뒤, 시차니 뭐니 해서 피곤이 쌓인 상황이 아니라도 평소 자신이 퇴근 후 어디를 들르는 사람이 아닌데 호출까지 하시나 싶던 의구심까지 더해졌는데 이제야 이런저런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할머님 앞에 자리를 잡자마자, 내놓으시는 사진 꽂힌 파일에 실소를 머금었더랬다. 이거였군.

해연이 얘기를 들으신 모양이지 싶었다. 이혼 후 내내 선 자리를 들이미시긴 했지만, 이처럼 주변 정리를 하듯 출장까지 보내셨던 건 처음이니, 해연과의 만남을 아신 거겠지. 자주까진 아니어도 종종 있던 해연의 전화나 문자가 뚝 끊어진 것도 할머님의 의도일 터.

만나서 그리 모진 말씀은 하지 않으셨길 바라 보지만, 자신의 일이라면 원체 물불을 가리지 않으시는 터라 그다지 소용없는 염려일 것이다.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 또 한 번 울었겠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도 애틋한 정이 가지 않아 늘 미안했는데.

정원을 돌아 개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한숨이 찬 공기 속으로 담배 연기처럼 진하게 뱉어졌다.

버틀러와 버스커 두 놈이 넓은 정원을 자유롭게 뛰노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훌훌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기분 말이다.

녀석들이 원체 거만하고 거친 탓에 밥을 챙겨 주는 정원사 아저씨와 자신만을 따르는 것에, 해연은 늘 서운해했다. 제 식구를 알아보는 탓에 짖거나 물지는 않았지만, 친근하게 굴며 쓰다듬는 그녀를 무시하곤 했으니까. 전조는 남편인 자신이 줄 수 없는 애정을 개들이라도 전해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지만, 녀석들이 영 눈치 없이 구는 통에 해연은 번번이 마음을 다치기 일쑤였다.

개들의 구역으로 정해진 울타리의 입구를 열자 녀석들이 삽시간에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발걸음 소리를 기민하게 눈치챈 것이다.

앞발을 치켜들고 일어서면 거의 한 길 버금가는 녀석이 둘씩이나 반기며 달려들자, 전조의 굳어 있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소리 없이 웃으며 두 손으로 번갈아 어루만져 주자, 덩치가 산만 한 녀석들이 긴 혀를 빼물며 어리광을 부린다.

골든 레트리버 종인 버틀러는 좀 덜했지만, 도베르만인 버스커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흠칫 물러날 정도로 날카로운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낑낑대며 전조의 허벅지에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를 떨었다. 그 모습에 전조가 활짝 웃었다. 그가 그런 미소를 지을 줄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바였다. 오직 녀석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드러내는 모습이니까.

한참을 잔디밭을 뒹굴며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빛 같은 초겨울 하늘 저 높이엔 바람이 꽤 부는지 구름이 언뜻언뜻 달을 가리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버틀러는 전조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고 버스커는 여전히 그의 애정을 갈구하며 그의 손에 제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그들아, 어딨니?”

점차 한기가 들어,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싶은 때, 버스커가 먼저 고개를 번쩍 쳐들었고, 잠시 후 들려온 작은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였다. 애처럼 가는 목소리 같기도 했고 어른이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새로 바람이 스치고 가는 소리인가 싶어 잘못 들었나 싶기도 한. 눈의 여왕이 변해 버린 카이의 귓가에 속삭인 소리가 저렇게 달콤하게 들렸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순간 찡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가 궁금증을 느끼기도 전에 튀어 나간 녀석들이 자신을 반길 때보다 더 총알같이 달려가는 모양새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녀석들이 그를 버려두고 간 것이 어이가 없어 천천히 뒤를 따라가 봤다.

길게 이어진 울타리 반대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두 놈이 허리 높이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머무는 별채 쪽으로 면한 출입구 쪽이었다. 정원사 아저씨의 목소리는 아닌데, 누구지?

“응, 이뻐, 이뻐. 응, 너도. 옳지.”

저 덩치 큰 녀석들더러 아그라고 한 것도 웃긴데, 이쁘다고? 그저 어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간질간질한 말들에 전조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한데 그 목소리는 계속 듣고 싶었다. 이상도 하지.

울타리 안쪽으로 심어진 향나무 그늘을 따라 움직인 터라, 상대방은 아직 전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선 그는,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얼른 들어섰고 녀석들이 이어 내밀어진 작은 손에서 무언가를 받아서는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상황에 다시 한 번 기가 막혔다.

“이제 없어. 내일 또 줄게.”

더 달라고 침을 흘리는 녀석들보다 더 서운한 목소리로 놈들을 달래며, 제 손보다 훨씬 더 큰 개들의 머리를 썩썩 쓰다듬는 조막만 한 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까보다 가까이서 듣는 목소리로 보아하니, 어린 여자애 같긴 한데. 이젠 쓰다듬다 못해 두 놈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기까지 한다.

가만히 대고 있는 놈들도 우스웠다. 아니, 가만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버스커를 끌어안은 상대에게 버틀러가 낑낑대며 매달리는 것을 보니, 기가 찼다.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녀석들의 애교를 받는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질투까지는 아니어도 글쎄 뭐랄까. 궁금증?

계속 듣고 싶어지는 목소리를 가진 이의 정체도 궁금해졌다. 목소리만큼이나 외모도 달콤한지 어디 한 번 확인을…… 내가 지금 달콤이라고 생각했나? 여자 목소리가 다 그렇지, 달콤은 무슨 얼어 죽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살피는 시선은 여전했다. 여성 고용인들의 유니폼인 흰 블라우스 차림인 것도 보았다. 그럼 애가 아니라는 소린데. 손도 작고 덩치도 자그마했다.

그냥 좀 작은 이일 뿐. 어른들께서 어린애를 데려다 부리실 리는 없다.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는 그의 입장에서야 가까이서 보면 솔직히 다들 너무 작긴 하다.

헌데 개들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먹이다니 무슨 짓이지?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반드시 당부받은 사항일 텐데.

자신이 애착을 갖는 개들 일인지라 조금 열이 난 전조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버스커 녀석이 여자의 검은색 치마 옆구리를 툭툭 들이받았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여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더 있는 거 눈치챘구나, 똘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