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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이가 누구야?”

마침 막이 올라갈 시간이 다 되어 극장 안으로 들어서던 장 여사가 어딘가를 보고 멈칫했다. 그 말에 팸플릿에 시선을 주고 있던 한금옥 여사가 고개를 들었다. 멋스럽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장 여사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의심스럽게 훑고 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장 여사가 입을 비죽였다.

“당신, 후사 못 잇는다고 손자며느리 소박 놓았다고 말이 많더니, 괜한 소문만 장했나 보군.”

그 말에 한 여사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 움직임에 와인빛 립스틱을 멋스럽게 발랐다 싶은 입술이 주름지며 나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무슨 소리야?”

“저기, 그 댁 손자 강 대표 아냐? 같이 있는 아이, 한 여사 당신 손부고. 훤칠하게 잘나서 어딜 가든 눈에 띄니 못 본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있나.”

로비 어딘가를 가리키는 장 여사의 눈짓에 한 여사의 고개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홱 바람에 날릴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벌써부터 매섭게 일그러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금 들은 말과 다르지 않았다.

손자 강전조는, 자기 핏줄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장 여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 여사 자신이 만들고 키운 그는 비상한 사업적 수완은 둘째 치고라도 외모까지도 어디서든 눈에 띄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잘난 손자의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물건에 대해서는 틀렸다. 바로 작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회사의 고문변호사를 움직여 이혼 절차를 밟았으니 이제 전前 손부라 하는 것이 맞으니까.

지금껏 흥미롭게 탐독하던 오페라의 팸플릿이 손안에서 흉하게 구겨졌지만 한 여사의 눈에는 제 전남편의 귓가에 뭐라 속살거리는 해연의 가증스런 미소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미는 알고 있었던 게야?”

시어머니 한 여사 앞에 고운 빛깔의 다기를 올려놓던 김효명 여사는, 어제 외출에서 돌아올 때부터 심상치 않던 시어머니의 기색에 이제야 궁금증이 풀리나 싶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평소 무서우리만치 감정을 절제하는 시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렇게 날 선 기색을 보일 때는 딱 한 가지. 당신 손자의 일에서였다. 시어머니의 손자이지만 그 며느리인 자신의 아들은 아닌 그 강 대표 말이다. 남편이 밖에서 낳아 들인 자식이니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신 또한 모성 따위 느껴 본 적 없고.

하지만 자신은 대단하신 한금옥 여사의 며느리임은 분명했고 그것이 김 여사가 지금 한숨을 속으로 삭이는 이유였다.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저는 대단한 집안에 들어와 후사를 잇지 못하는 대죄를 저지른 주제에 어디서 한숨을 쉴까. 게다가 손자며느리가 며느리인 자신을 닮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거라는 기막힌 소리까지 들었으니 말 다 했지.

해연이 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에는 김 여사 또한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해연은 시어머니가 고른 아이였는데 왜 며느리인 자신 탓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의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손자인 전조는 대학 졸업반으로 그룹을 승계받기에는 아직 어렸다. 시어머니는 그런 손자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며 그럴듯한 집안과 혼사를 추진했고 그렇게 들어온 아이가 해연이었다.

덕분에 회사에 입사해 착실히 승진을 거치는 일은 순조로웠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둘 다 건강한데 어째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뒤에는 시험관 아기를 시술해야 했다. 시어머니의 후사에 대한 염려가 강요로 이어진 것이다. 몸이 축나는 그걸 몇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끝내 실패했고 급기야 대리모 얘기까지 나왔다.

사돈댁에서는 당연히 서운한 기색을 비쳤고 그건 두 집안 간의 갈등으로 번졌다. 자식 못 낳는 며느리 꼴은 간신히 두고 보셨지만 손자 대까지 같은 꼴을 볼 수는 없었는지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 여사는 울면서 집을 나가던 해연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이후로 시어머니는 언제 강제로 이혼시켰냐는 듯 다시금 제대로 된 결혼을 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를 썼지만 1년 남짓한 지금까지도 손자는 혼자였다. 때문에 시어머니가 점점 더 히스테릭해지는 걸 느꼈는데 오늘은 유난히 더 그랬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직접 키워 왔다. 본처인 자신이 구박이라도 할까 싶은 건지 아니면 밖에서 낳아 왔어도 어렵게 얻은 유일한 혈육이라 그런 건지는 모른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손에 쥐여 줄 듯 키웠다.

이럴 땐 애지중지라고 해야 하는데. 중하게 여기는 것만은 분명하나 애정까지 줬는지는 글쎄다. 김 여사 자신이 볼 때 지나치게 엄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말없고 점잖은 성격의 전조는 무던히 참아 냈고 한 여사의 지나친 기대에 크게 모나지 않게 부응하며 이때껏 지내 왔다. 그룹의 회장을 맡은 5촌 당숙과 조모의 지도 아래 대표이사로 선임되어 전권을 위임받은 회장 대리가 된 뒤로 회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고.

이혼한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도 전조가 아닌 해연이 탓이었으니, 흠이라고까지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혹시 지금 노하신 이유가 해연이 때문인가?

“해연이 그것 말이다.”

맞구나, 싶어 김 여사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언제고 시어머니 귀에 들어갈 일이었지만 해연이가 또 눈물 바람을 할 것을 생각하니, 동병상련의 감정이 들었다.

“그것이 우리 강 대표와 밖에서 만나고 다니는 것 알고 있었니?”

“일전에 들리는 소문으로 접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니? 네 자식 아니라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입 딱 봉하고 있었던 게야?”

저리 억지를 쓰실 때면 과거 신여성으로 불릴 정도로 고등교육까지 받으신 분이 맞나 싶었다.

“피차 사업하는 집안들이니 행동반경이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제 불찰이었던 것 같네요. 잘못했습니다.”

김 여사가 생각해 뒀던 변명을 주워섬기자 시어머니의 시선이 돌아갔다. 옛날에나 헤어지면 원수처럼 지냈지, 요즘 애들이 어디 그러냐는 의견 따위는 말 안 하길 잘했다.

그래도 시어머니의 안색에 불편한 심기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의아스런 소식이긴 했다. 원래 전조는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감정을 그리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본인이 여태 누구에게도 살가운 정을 받아 보질 못해 그런지 남에게 잔정도 줄 줄 몰랐고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은커녕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시어머니의 남다른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가혹하다 싶을 만큼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했으니 허투루 감정을 낭비할 여유가 없긴 했을 터였다. 항상 최고의 자리에 항상 올바른 모습으로 있기도 바빴을 테니까.

모난 성격도 아니었다. 실제로도 시어머니가 골라 준 영창산업 무남독녀인 해연과의 결혼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무리 없이 살았으니까. 아내에게 살갑게 굴진 않았어도 조신하고 얌전한 해연 쪽에서 워낙 전조를 좋아해서 그럭저럭 맞춰 산 모양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그 잔정 없는 인사가 전처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얘길 조 비서에게 전해 듣긴 했지만 지금 시어머니의 반응과 달리 그러려니 했다.

호적상으로만 어머니인 김 여사가 전조에게 갖는 관심은 딱 그 정도였다. 그 아이를 처음 맞닥뜨린 30년 전보다는 많이 무뎌져 있었지만 말이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이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을 한집 안에서 보고 살아야 했다.

옛날로 치면 서출인 시앗의 자식을 당당히 제 호적에 올린 남편과 시어머니의 행태보다 자신이 그 상황을 견뎌 내야 하는 고통이 더 컸다. 칼끝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그 통증이 지난 30년 동안 조금 둔해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이를 보는 시선에 미움이나 괴로움 따위를 담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애써 왔을 뿐.

그래서 이제는 무던한 시선으로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 뼈가 굳은 집안의 차녀인 김 여사는, 대학교 졸업반이던 때 어른들로부터 강정환 사장을 소개받아 이듬해 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자식이 많아 다복한 언니 오빠들과 달리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도움을 받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하다못해 시어머니에게 이끌려 부적도 쓰고 굿까지 했으나, 매번 낙심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아들 강 사장의 핏줄이기만 하면 됐지, 꼭 며느리에게서 볼 필요는 없다는 시어머니의 의중을 알게 된 것은, 시어머님이 고른 씨받이의 뱃속에 이미 전조가 자리 잡고 난 뒤였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당장이라도 이 집 안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친정아버지는 당시 4선 의원에 출마하실 예정인 데다가, 자식 못 낳는 며느리를 소박 놓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 여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셨다.

그렇게 지옥 같은 몇 달을 보낸 뒤 시어머님이 강보에 싸인 전조를 집 안으로 들이셨다. 그때 뛰쳐나가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패배감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 아이는 자신이 낳은 아이로 알려질 테니까. 어쩌면 자신도 아버지처럼 고루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는, 김 여사 자신이 낳은 아이였대도 그러셨을까 궁금할 정도로 그 아이 전조를 옆에 끼고 모든 것을 가르치셨고, 김 여사 또한 그것이 야속하다거나 불합리하다 여기지 않았다. 집 안에서 풍기는 아기 분유 냄새도 싫을 정도였으니 제게 키우라 했어도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심지어 김 여사 자신은 아이 얼굴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다. 어여쁠 리도 없지만, 딱히 구박한 적도 없었다. 시어머님이 그런 것을 보아 넘기실 분도 아니고 자신도 아이의 일에 가타부타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너는 너, 나는 나로 살아온 세월이 20년이 훌쩍 넘어, 해가 바뀌면 그 아이 전조가 서른이다.

아이 엄마는 그때 바로 지방 어디로 보냈다는 얘기를 시어머니께 전해 들었지만, 남편 강 사장이 정기적으로 미국 LA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는 아예 들어앉혔구나 짐작만 했다.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강 대표나 해연이가 네게 무슨 말이라도 하던?”

“무슨 말을요?”

“선 자리마다 번번이 퇴짜를 놓는 것이 해연이 그 아이 때문인지 아닌지 말이다. 이혼 후 새삼스레 없던 정이라도 돋았는지 아닌지 강 대표든 해연에게서든 뭐 들은 이야기 없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