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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주머니에서 나온 손이 다시 개들에게 내밀어지려는 순간, 손목을 낚아챘다.

원래 녀석들이 사람을 무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저…… 블라우스 소매 아래로 내밀어지는 작은 손에 녀석들이 침으로 범벅된 억센 이를 들이대자 겁이 덜컥 났을 뿐이다. 그 손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리고 달콤하고 다정한 그 속삭임이 비명으로 변할까 봐 순간 심장이 조여들었던 것이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 숨을 삼키며 주저앉았고 개 두 마리는 그대로 얼굴을 굳히며 전조를 향해 사나운 눈빛을 던졌다. 뭐야, 이 어이없는 상황은. 저게 뭔지 몰라도 겨우 그걸 못 먹게 했다고 네놈들이 나를 노려보는 거냐?!

“앉아.”

배신감에 낮게 읊조리자, 놈들은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마지못해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 앉아 있는데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노려보던 개들에게서 여전히 그에게 팔을 잡힌 채 우스꽝스럽게 주저앉은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닌 모양이다. 개들한테 하는 말인지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도 못 알아듣고 있는 걸 보면.

그때 빠르게 흘러가던 구름 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낯설었다. 고용인들과 그다지 살갑게 지내는 편은 아니더라도 들고 나는 이들이 자주 바뀌는 것은 아닌지라 어느 정도 안면은 있어야 하는데― 어깨 길이의 머리칼을 목 뒤에 얌전히 묶어 앳된 얼굴을 온전히 드러낸 상대는 처음 보는 이였다.

달빛이 있다 해도 밤이고 게다가 흰 블라우스와 대비된다고 해도 어쩐지 좀 까무잡잡한 얼굴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두 눈동자가 반짝이는데― 무슨 조화인지 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성큼 제게 다가서는 것만 같았다. 뭐지? 착시현상인가?

낯선 느낌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그 느낌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시선이 의지대로 거둬지지 않고 제멋대로 이것저것을 담아 들였다. 작은 얼굴. 작은 손. 좁은 어깨. 여자가 아니라 애 같았다. 여자애.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 끝. 엉겁결에 다리를 벌리고 뒤로 주저앉은 터라 치맛자락이 허벅지 위로 기어 올라가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흰 속옷이 전조의 눈을 찌를 듯 덤벼들었다.

“아앗!”

상대가 잡힌 손목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도 전조는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순간적으로 아랫도리가 저릿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준 모양이다.

그 손목이 여전히 자신의 손 안에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챘다. 굳은 손가락을 간신히 풀어 가느다란 손목을 놓아주었다. 진짜 가느다랬다. 아무리 그의 손이 크다고 해도 손목을 감싸고도 손가락 한두 마디 이상 더 돌아갈 정도로 가느다랬다. 그 손목을 부러뜨릴 뻔한 것이다. 다음에는 힘 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응? 다음에는―이라니?

방금 전 몸의 반응도 그렇고 생각까지 제멋대로 뛰노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조의 시선은 울상이 된 얼굴로 손목을 주무르는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아프다는 손목을 주물러 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저릿하던 아랫도리는 갑자기 저만의 다른 제어 기관이 생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멋대로 힘이 들어갔고.

그제야 퍼뜩 이성이 돌아왔다. 하. 자신이 왜 이러나 싶었다. 출장 때문에 많이 피곤했나?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스스로의 반응에 상대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한 전조는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불유쾌할 정도로 육체를 잠식하는 욕구는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런 경험은.

지금껏 지나치게 성적으로 담백한 쪽이었던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더 그랬다. 그 담백함을 의도한 것은 아니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고 할까.

SY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로 태어난 데다가 우월하기까지 한 외모는 그 기회를 한껏 증폭해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건 짧지 않은 결혼 생활 중에도 다를 바 없었다.

강전조, 그에게 성적 쾌락이란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조금은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이마에 닿은 앞머리마저도 어쩐지 간질거리는 것 같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찬 공기도 가슴 깊이 들이마셨고.

점차 이성을 찾아가는 머릿속으로 이전 상황이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든 건 저 ‘여자애’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탓이다. 안면이 없는 걸로 봐서 자신이 출장 갔던 사이에 들어온 사람일 것이고 열흘이 채 되지 않은 신참이라 해도 분명히 주의를 받았을 것이 뻔한데 말이다.

“개들에게 함부로 먹을 것을 주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을 듣지 못했나?”

개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본능에의 욕구 때문인지, 그의 말투는 평소 고용인들을 대하던 때와 달리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어려 보여서 말이 짧았다기보다는 어쩐지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말이다.

그 소리에 멍하니 올려다보던 여자애, 아니 여전한 그 자신의 신체 반응으로 보아 ‘여자’라고 은근슬쩍 정정하고 싶은 상대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지만 신중한 건지 인터벌이 긴 것인지 대답이 나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그동안 그 눈을 주시하던 전조는 또 다른 이상스런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깜박이고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가슴이 따라서 울렁거리는 것만 같은 것이다. 뭐야, 이건?

“아, 안녕하세요…….”

웬 동문서답인지. 작은 몸만큼이나 목소리도 가늘어서 다시 ‘애’로 깎아내리는 전조의 입가가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추, 출장 가셨다던 사장님이신가 보네요.”

선생님 앞에서 잔뜩 주눅 든 문제아처럼 자꾸 말을 더듬으니 ‘애’ 맞다.

“그런데?”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딱딱거린다는 것을 인지할 이성은 있어도 정정할 여유는 없었다. 여전히 묵직한 아랫도리까지 불쾌해지고 있었으니까.

“저, 전 지난주에 가사 도우미로 들어온, 박 아무개입니다.”

그는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로 삐딱하니 서서 내려다보았다.

“아무개가 진짜 이름이라고? 그리고 원래 말을 더듬는 건가, 아니면 듣는 사람 속 터지게 하려고 일부러? 물론 후자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자신은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이어 조막만 한 입술까지 옴짝거리는 걸 보니 자신이 느끼는 울렁거림이 부당하다 여겨진 탓이었다.

더 몰아붙이고 싶었다. 옆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배신자들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로 전조는 요 낯설고 조그만 여자애에게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사악한 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요…… 그것도 아니고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건대 까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자세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자, 당황한 전조는 자신의 얼굴도 조금은 붉어졌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피곤함을 또다시 핑계로 들이대기에는 자신은 무척이나 별스럽게 굴고 있었다. 전 같으면 벌써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텐데.

“마, 말은 안 더듬는데 지금은 놀라서 그런 거고요……. 이름은…… 시시콜콜 말씀드리는 것 안 좋아하실까 봐……. 다른 분들도 박 양이라고들 부르시고…… 게다가 사장님은 늘 바쁘시다고 들어서…….”

“아무리 바빠도 처음 만난 사이에 통성명은 기본적인 예의지 않나?”

“아, 네…… 죄송합니다…….”

“그만 죄송하고.”

얼른 이름이나 대라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순간 전조는 대화의 방향이 어긋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상대의 이름을 들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박동희예요.”

“동희인가, 동희 씨인가?”

“예?”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는 그녀가 답답했다. 성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을 빨리 들으려고 초조해진 자신을 깨닫지 못한 전조가 성마르게 물었다.

“몇 살이지? 학교는 졸업했나?”

문득 상대가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결코 미성년자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봄 되면 졸업식 하겠죠.”

‘하겠죠’라니? 안 갈 거라는 말인가? 자신과 상관없다는 그 어투에서 씁쓸함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졸업식? 대학을 졸업할 나이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데.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대체 몇 번이나 질문을 거듭해야 속 시원히 들을 수 있는 거지? 무뚝뚝하단 소리를 수도 없이 들은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물어 대는 거고. 신체적인 충격이 컸나?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마지노선이다.

“중학교는 아닌데요.”

아직 열아홉이라고? 전조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래도 중학교 졸업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한데 질문의 의도를 상대방은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작은 입을 조금 비죽이는 폼이, 어려 보인다는 말깨나 들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주눅 든 것처럼 바르르 떨더니 이젠 파르르하니 말이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전조의 턱 밑에 보글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찼다. 간지러웠다. 이마 위 머리칼처럼 쓸어 올릴 수 없는 느낌은 점점 진해졌다.

턱을 으쓱거리다 치켜든 그는 팔짱을 더욱 단단히 끼며 가늘게 뜬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이 자세에 주눅이 들지 않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호리호리하지만 190이 넘는 키와 더불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많은 것으로 인해 배어 든 위압감과 오만함까지. 자신이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기 위해서는 상당히 효과적인 자세였으니까.

이 작은 여자애를 눌러서 무얼 얻으려는 게 아니었다. 뭔가 여기서 더 넘어서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게 어디인지, 정해 놓은 경계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난 유치원 졸업하는 줄 알았지. 영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계속 팬티를 보여 주고 있어서 말이야.”

잠시의 침묵 후. 상대가 꽥 비명을 지르며 치마를 끌어 내렸다. 그 모양새에 전조는 턱 밑에 차오른 것이 웃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내 차오르던 그것이, 상대가 허둥지둥 도망가는 뒷모습에 순간적으로 터져 나올 뻔했다.

터뜨릴 걸 그랬나? 아랫입술을 질끈 베어 물었지만 이후로도 한참이나 목 근처가 간질거려 죽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그 까만 얼굴이 정말로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텐데. 손에 랜턴이 있었다면 작은 어깨를 잡아채서는 확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혼자 남은 사내의 중얼거림이 떨어져 내리자, 개들이 귀를 쫑긋했다.

“박 아무개 양, 너 웃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