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미옥이 닭 모이 주듯 은밀한 웃음을 뿌리며 바구니에서 고구마가 수북이 담긴 작은 소쿠리와 감주 한 병을 주섬주섬 꺼냈다.

“옆에 있는 병은 또 뭐야?”

몇 달 전, 한 번도 성을 낸 적 없는 오라버니가 조신한 규수를 물들이지 말라고 버럭대며 미옥이 가져오려던 염정소설 서책을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과거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오라버니가 어찌 알았는지 의아하다며 그 후부터는 군것질거리에 몰래 숨겨 가져왔다. 그러더니 서책을 숨긴다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군것질거리를 날라왔다.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허겁지겁 먹다가 목 막히면 큰일 날까 봐 노파심에. 나처럼 잘나가는 전기수로 여기라고 감주를 곁들였지.”

청산유수인 미옥의 너스레에 애희도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전기수 아니랄까 봐 애희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천연덕스레 핑계를 잘도 댔다.

“그 목 막힐 서책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덩그러니 드러난 빈 바구니밖에 없었다.

혹 가져오다 또 오라버니에게 들켰나. 오라버니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빈손이라는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제가 들키기라도 한 양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호통재라! 이 슬픔을 어쩐다. 음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신 아무개 규수조차 금단의 서책에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니. 고 군침 넘어가는 금단의 서책이 어디 있을까나?”

미옥이 염정소설 서책을 낭독하다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에서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킬 때처럼 애희를 빤히 응시하였다.

“그야 가져온 네가 알겠지.”

애희가 얼굴의 열기를 식히듯 불퉁하게 대꾸하였다.

“흠……. 몸에 밴 기품 어린 자태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조신한 반가의 규수가 틀림없는데…… 서책에 대한 편식은 없고……, 심지어 금서조차. 통 누설하지를 않으니 요 속에 여하(如何)히 거대한 비밀을 숨겨두고 있는지 궁금하여 돌아가시겠단 말이지.”

내숭 떨지 않고 감상에 솔직한 애희가 아무리 양갓집 규수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염정소설을 들이밀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돌 가슴인가,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러하였던 애희였는지라,

혹 서책에 대한 소문을 들었나? 서책을 낭독할 때 나 몰래 와본 건가?

여러 추측이 새끼를 쳐나갔다.

제가 아니면 애희 주변에 소문을 전할만한 이가 없었다. 또한, 몰래 와볼 성정이 아니어서 궁금증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들키지 않도록 감쪽같이 간수하여야 할 터인데 말이야. 오늘은 내 반드시 알아낼 참이거든.”

발그레하여진 얼굴에 눈길을 머물러 둔 미옥이 정체 모를 그것을 끄집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심장 부근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콕 찔렀다.

“실없기는…….”

덩달아 들뜨는 가슴을 무감한 표정 안에 감추어 들였다.

미옥이 오늘따라 짓궂게 굴어대며 뜸을 들여서일까. 규수들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한다는 염정소설 서책을 읽어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하던 자신이었건만 이상스레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너를 대할 때마다 굴복시켜 버리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단 말이지. 타락 선비님도 내 마음과 유유상통하지 않을까 몰라. 오늘은 타락 선비님이 요 돌 가슴 규수를 굴복시키려나. 어쩌면 가능할 듯도 한데…….”

얼굴을 붉혔던 이유가 서책 때문이 아니라 군것질거리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당황스러워진 미옥이 얼른 서책 쪽으로 관심을 유도하며 바람을 한껏 불어넣었다.

“타락 선비님이라니?”

그 금단의 서책을 오라버니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져온 거야?

일단은 안도하였다.

“궁금하여 속이 타는 모양이지? 이 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인기 절정의 전기수인지라.”

미옥이 전기수의 품새로 말하고는 씩 웃었다.

전기수에 매료된 미옥은 부모님과 오라버니 몰래 남장하고 나섰다. 처음 시작하였을 당시는 몇 푼 안 되는 푼돈으로 심심풀이 정도였던 것이 차츰 인기가 올라 꽤 짭짤하여졌다.

“어련하겠어.”

애희도 미옥이 염정소설 서책을 낭독하는 모습을 몇 번 구경하였는데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다들 사내인 줄 알고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조신한 규수의 애를 태우는 금단의 서책은 바로 요 밑에 있지. 기막히게 감쪽같은가?”

미옥이 그제야 바구니 모양의 덮개를 젖히고 숨겨두었던 서책 한 권을 꺼냈다.

“맙소사.”

마술을 부리듯 아무것도 없던 바구니에서 나온 서책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요즈음 세책점에서 불티나게 나가는 서책이거든.”

미옥이 염정소설 서책의 표지가 보이도록 잡고 살살 흔들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언제는 불티나게 나가는 서책이 아닌 적 있었나.”

염정소설 서책을 빌려올 때마다 늘 하는 말이라 반신반의하면서도 오늘처럼 철저히 숨겨온 적이 없어 어떠한 서책인지 관심이 끌렸다.

“다들 염정소설의 백미인 이 서책을 읽고 나니 전에 읽은 서책들이 시시해졌다나 뭐라나. 무려 열흘을 기다려 겨우 빌려온 서책이라는 사실이나 알아둬. 반가의 부녀자들뿐 아니라 고고한 선비님들까지 은밀히 탐독하는 서책 1순위이지……만, 요 그림이 그려진 표지야말로 희귀하디 희귀하여서 말이야. 요 필사본의 표지 그림과 제목은 지은이가 직접 그리고 쓴 거래.”

“표지 그림을 지은이가 직접 그렸다고?”

그림에 관심이 많은 애희는 그 말에 솔깃하여졌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더니. 표지 그림을 지은이가 직접 그렸다니까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지? 처음엔 필사본으로 나오던 것이 선비님들에게까지 인기를 끌자 방각본으로 나오고 있지. 이러한 추세로 나간다면 케케묵은 통념이 깨져 버리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오래전에 깨졌어야 마땅하지만. 이참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 반가의 규수들을 잡는 쓰개치마 올가미나 벗어 던져 버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조신함을 구실로 치마를 얼굴에 뒤집어쓰도록 강요한 것은 대체 어느 망령 난 작자의 발상이람. 치마면 치마답게 허리에 둘러야지. 규수들의 미색을 볼썽사납게 망가뜨려 놓으려는 사내들의 심술이 아니고서야.”

미옥은 어쩔 수 없어 쓰개치마를 쓰는 날이면 올가미처럼 죄어드는 기분이 들어 답답하였다.

“여인들에게만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도록 하는 등 합당하지 못한 관습들을 당연시하는 선비들에 대한 생각은 나도 너와 같지만…… 이 서책은 뭔가 낯선 느낌이 들어. 혹자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을 과도한 비약이랄까…… 이러한 내가 고루한 것인지…….”

원체 서책을 좋아하여 낯뜨거운 염정소설 서책들도 편견 없이 읽어 넘기던 애희였으나 두 선비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표지를 대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키가 헌칠한 선비를 마주 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왜소한 데다 또한 곱상하였다. 두 선비가 서로를 향한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키가 헌칠한 선비의 눈 속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왜소한 선비는 그러한 선비를 아련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

남색 하는 자들의 이야기인가?

“쓸데없는 속단은 넣어 둬.”

애희의 표정 변화를 알아챈 미옥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한층 비밀스레 웃었다.

“그러한데 어찌……?”

어떤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려 하였다.

“사내만 둘이냐고? 읽어보면 알아. 세책가(貰冊家)에서 어느 선비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는데 뭐라더라…… 스포…… 금지라던가. 여하튼 미리 알려주면 재미를 떨어뜨리니 너도 당연히 사절이지?”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문 미옥은 가까이에 두고도 모르느냐는 표정을 쓰윽 지었다.

“……스포?”

표지 그림만치나 생경한 말에 애희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뒤에 더 있는데 생소한 말이라 기억나지 않아서.”

미옥이 배시시 웃었다.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걸 의미하는 말인가.”

“역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니까.”

애희 앞에 바짝 서책을 들이밀며 덧붙였다.

“아마 타락 선비님이 미리국에서 수학하고 온 모양이야.”

“미리국에서 수학하고 온 타락 선비라…….”

필명을 확인한 애희의 기분이 묘하여졌다.

붉은 글씨로 쓰인 ‘타락’을 보자마자 불타오르는 듯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떠오른 것이 ‘야합’이었다. 제목도 ‘꽃보다 선비’였다.

‘꽃보다 여인’이라면 모를까, ‘꽃보다 선비’라니.

내용을 읽기도 전부터 기분이 야릇하게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편견 금지야.”

미옥이 농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말하였다.

“절묘한 필명이랄까. 서책 내용도 그렇고. 읽어봐야 오묘한 참맛을 알게 될 거야. 다 읽고 나서 타락 선비님께 홀랑 빠져 버리지나 마.”

잔잔한 호수에 물수제비를 뜨듯이 애희의 마음을 흘깃거렸다.

“그럴 일 없어.”

애희가 딱 부러지게 부정하였다.

“단정하긴 아직 이르지. 서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럴 일 있으면 어쩌려고. 편견 금지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 ‘墮落(타락)’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조신한 규수와 고고한 선비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駝酪(타락:우유)’일지도 모르니.”

미옥이 바닥에 대고 글자를 써 보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駝酪(타락)……?”

墮落 속에 駝酪을 중의적으로 숨겨두었다는 말인가.

“그림으로나 문장으로나 타락 선비님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내가 틀림없어. 곧 2탄이 나올 거래. 아, 참. 어머니가 심부름시키셨는데 깜빡 잊고 사설이 길었네. 어젯밤에 다 읽은 나는 이만 갈 터이니 목 막힐 때마다 감주를 타락 삼아 마시며 케케묵은 통념을 깨는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여 봐. 오늘 저녁까지 반납하여야 하는 거 잊지 말고. 원체 인기를 누리는 서책이라서 말이야.”

빈 바구니를 들고 일어선 미옥이 ‘오늘 저녁까지 반납’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세책이 아니라 소장하려 이미 값을 치렀으나 서둘러 읽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어머니의 심부름은 핑계라는 것을 애희는 모르지 않았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한 인물 났을 터인데…….”

안타까운 마음에 방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바라보다 시장기를 느낀 애희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밤고구마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어제 종일 굶어서인지 고구마가 팍팍하여서인지 첫입에 목이 콱 막혀 감주를 따라 마셨다.

“편견 금지라고?”

고구마 한 개를 먹고 나서야 낯선 서책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서책 내용에 대한 편견이 없을 뿐이지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서책에 대한 편견이 없어도 야합하는 내용이라면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한 야합만도 아닌 듯한 분위기를 은밀히 풍기는.

그러한 서책이 고고한 선비들까지 은밀히 탐독하는 서책 1순위일 리 없지 않은가.

혹 내가 읽지 않을까 봐 미옥이 부풀려 말하였나.

의심의 눈초리로 필명을 노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 붉은 글씨였는데 다시 보니 옆의 ‘선비’와 같은 검은 글씨였다.

묘하게 재주를 부리는 듯한 필명이 호기심을 부채질하였다.

이 표지 그림을 지은이인 타락 선비가 그렸다고?

시서화에 능한 선비들이 많아 그림을 잘 그리는 재주가 특별할 것도 없었으나 타오르는 노을을 배경으로 마주하고 서 있는 두 선비의 모습을 보노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아서. 왜소한 선비는 당장에라도 키가 헌칠한 선비의 품으로 뛰어들어 버리고, 키가 헌칠한 선비는 왜소한 선비를 너른 가슴팍에 으스러지도록 와락, 끌어안을 것처럼 아슬아슬하여.

애희는 저도 모르게 가빠진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타락’을 붉은색으로 본 것은 두 인물의 배경, 짙붉게 타오르는 노을빛의 영향인 듯하였다. 그 노을빛이 ‘타락’을 비추고 있어서. 그만큼 타락 선비의 그림 솜씨가 빼어났다. 눈썹을 휘날리는 듯한 필체도.

아직 서책 내용을 읽기 전이건만 그동안 염정소설 서책을 읽었어도 동한 적 없던 그 무엇이 동할 것처럼 기묘하게 스멀거리는 기운을 추스르듯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