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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의 인정 소리에 통금을 피하여 들어간 물레방앗간에서 두 선비가 만나며 이야기가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또 물레방앗간인가. 평범하다 못하여 진부하잖아.

예사롭지 않은 필명과 표지 그림을 보고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튀어나오나 하여 두근거리던 기대감이 식상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남녀가 아니니 아직 실망하지 말자, 애써 스스로 고무하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서임호요.]

먼저 물레방앗간 안에 들어와 있던 키 큰 선비가 뒤이어 들어온 왜소한 선비의 가문에 관하여 묻지 않고 제 가문에 관하여서도 말하지 않은 채 곧바로 이름만 밝혔다.

“흠……. 가문을 밝히지 않고 통성명이라…….”

식은 기대감에 슬며시 온기가 올랐다.

[저, 저는…… 정…… 미, 민하라고 합니다…….]

들릴 듯 말 듯 더듬거리던 왜소한 선비의 음성이 꺼져 버릴 듯 잦아들었다.

애희는 ‘정민하’라는 선비가 구석에 몰린 쥐처럼 쩔쩔매며 통성명하다 더듬거리는 대목에서 사레라도 걸릴 것만 같아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통성명하는 동안 서임호는 상대를 당당히 똑바로 마주하였으나 정민하는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듯 초조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솔직하고 호탕한 성정인 서임호에 반하여 정민하는 수줍음을 타며 말수가 적었다. 주로 서임호가 말하고 정민하는 가만히 듣는 쪽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정민하가 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낸 서임호는 반색하며 미리 떼어둔 운에 맞추어 시를 지어 읊었다. 서임호도 시에 조예가 깊었으나 섬세한 감성의 정민하를 따라갈 수 없어 혀를 내둘렀다.

긴 밤을 지새운 두 선비는 서로에게 마음이 끌렸다.

웬일인지 두 선비가 통금에 쫓겨 피할 때마다 같은 물레방앗간이었다.

[이런. 또 만났군. 이리 만나는 걸 보면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오. 의형제를 맺으면 어떻겠소? 내가 나이가 많으니 형이 되고, 민하는 나이가 적으니 아우가 되면 좋을 터인데. 나는 삼대독자라 아우가 없어서 말이오.]

두 번째 만난 날 밤, 마음이 뜨거워진 서임호가 정민하에게 진중히 제안하였다. 정민하는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오경(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파루 소리를 들은 민하는 임호가 잠든 틈에 몰래 가 버렸다.

의형제를 맺은 민하가 인사도 없이 가 버려 섭섭하고 아쉽던 차에 또다시 물레방앗간에서 만났다. 세 번째 만난 그 밤, 저를 향하여 모로 누워 곤히 잠든 민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임호는 기분이 야릇하여졌다.

[키도 여인처럼 작은 사내가 얼굴마저 여인처럼 조막만 하다니. 속눈썹은 또 어쩌자고 이리 길어서는…….]

임호가 장난삼아 손끝으로 민하의 긴 속눈썹을 쓸었다.

[사내의 콧방울이 어찌 구슬처럼 어여쁜 것이냐.]

구슬을 굴리듯 콧방울을 문지르며 중얼거리던 임호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인중을 더듬어 내려가 입술을 더듬었다.

애희는 미옥에게서 자주 듣던 말인지라 서책을 읽다가 속눈썹과 콧방울을 만져보았다. 마치 타락 선비가 그러한 제 모습을 보고 있기라도 한 양 가슴이 두근거려 얼른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사내인 네가 여인처럼 애를 태우는 연유가 무엇이냐…….]

품으로 끌어당겨 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임호가 어렵사리 참아내며 중얼거렸다.

“뭐야. 속단은 넣어두라더니.”

더듬어 내리는 임호의 손길을 따라 내리던 애희의 눈길이 접힌 부채처럼 찌푸려졌다.

설핏 잠들었다가 제 코를 더듬는 임호의 손길에 잠에서 깨어난 민하가 깨어난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아랫배에 꽉 힘을 주었다.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짜르르 일어나는 떨림을 참으며 잠든 척하고 있던 민하는 꾹 눌린 입술에 움찔, 놀랐다.

입술을 좌우로 더듬자 찌릿찌릿 날 선 떨림이 하체로 찔러 내려와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뻔하였다. 돌연, 그이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느라 등에서 진땀이 바작바작 날 지경이었다.

“남색이 아니라면…… 남장?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하였지?”

이 서책을 가져온 미옥만 하여도 사내처럼 남장하고 돌아다니지 않는가.

“무슨 사연이 있기에……?”

궁금한 마음으로 중얼거리던 애희는 저도 모르게 서책 속으로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내렸다.

임호의 손길을 간신히 참아낸 민하는 임호가 잠든 사이에 또다시 몰래 가 버렸다.

부잣집 삼대독자인 임호는 민하의 모습이 눈에 밟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자 아예 물레방앗간을 매수하였다. 그러한 후에 밤마다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갔으나 번번이 헛걸음만 하였다.

[민하야, 어찌하여 오지 않고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냐. 나는 네가 이리 보고 싶은데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냐. 섭섭하구나.]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품어보고 싶었다. 제아무리 호탕한 자신이라도 민하를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이 나간 듯 발길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봐야겠다, 작정하고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는데 별안간 비가 쏟아졌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 얇은 도포가 흠뻑 젖어 버렸다.

민하도 임호를 잊으려 모질게 마음먹고 아무리 애써도 잊히지 않았다. 만나고 싶어 견디다 못하여 임호를 만나러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던 중에 비가 쏟아져 그만 홀딱 젖어 버리고 말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아.]

통금에 걸려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임호보다 먼저 물레방앗간에 도착한 민하는 쩔쩔매다 안으로 들어가 황급히 도포를 벗고는 물기를 짜냈다. 하필 그때 임호가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이닥쳤다. 임호를 본 민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민하구나. 네가 왔구나. 보고 싶은 내 아우.]

임호가 기쁨에 찬 얼굴로 민하에게 다가가며 팔을 활짝 벌렸다.

[…….]

자신을 안을 기세인 임호를 보고 당혹스러워진 민하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찌 그러는 게야? 나는 민하 너를 만나 반갑기 그지없는데 너는 내가 반갑지 않은 것이야?]

실망하여 벌렸던 팔을 거두어들인 임호가 툴툴거리며 갓과 도포를 휙 벗어 아무 데나 걸쳐놓았다.

[……그러한 까닭이 아니오라…… 옷이 젖어서…….]

민하는 뭐라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 궁색하게 변명하였다.

[피차 젖었거늘. 의형제를 맺고는 몰래 가 버린 연유가 무엇이야?]

속잠방이만 남겨두고 스스럼없이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버린 임호가 민하를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그, 급히 가 볼 데가 있어…….]

민하가 흠칫 놀라 상체를 웅크리며 대답하였다.

[어서 벗어 말리지 않고 어찌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게야?]

도포만 벗은 채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민하에게 못마땅한 내색을 하였다.

[그, 그것이…….]

속잠방이만 입고 있는 임호의 모습에 민하가 얼굴을 화르르 붉히며 눈을 내리떴다.

[여인처럼 부끄럼을 타는 것이야? 같은 사내끼리.]

네가 여인처럼 수줍음을 타며 나를 사내 대하듯 하니 내 가슴이 이리 타는 게 아니냐.

애타는 가슴을 감추고 민하를 바라보던 임호의 눈길이 가슴에서 멎었다.

[모, 몸에…… 보, 보이지 모, 못할 것이 있어서…….]

임호의 눈길이 찰싹 달라붙은 옷보다 더 찰싹 달라붙자 민하가 움찔하여 가슴을 더욱더 움츠렸다.

[의형제가 된 마당에 이 형님에게 못 보여주며 거리낄 게 뭐 있다고. 괘념치 말고 어서 벗거라. 이참에 가슴이 사내다운지 확인하여 보아야겠다. 보나 마나 빈약할 게 뻔하여 이 형님이 데리고 다니며 단련시켜 주어야 할 터이지.]

민하를 자주 만날 구실을 찾아낸 임호가 흡족한 얼굴로 말하였다.

[아, 아니 되옵니다.]

민하가 펄쩍 놀라 소리쳤다.

[어찌 그러는 게야? 이 안에 여인의 가슴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이야?]

더는 핑계 대지 못하리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민하의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흣.]

짓궂은 임호를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사태에 민하가 소스라치게 놀라 신음을 터뜨렸다.

[헛.]

임호도 전혀 예기치 못하게 민하의 가슴이 여인의 가슴처럼 제 손아귀에 뭉클, 만져지자 흠칫 놀랐다.

[여인이었소?]

민하의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을 황급히 떼어낸 임호가 믿기지 않아 제 손바닥과 민하의 가슴을 번갈아 보며 휘둥그레진 얼굴로 물었다.

[…….]

민하는 얼굴만 새빨갛게 붉힌 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제야 급히 오느라 가슴이 드러나지 않게 두르던 띠를 깜박 잊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임호의 손아귀에 잡혔던 젖가슴이 아직도 찌릿찌릿하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간 양 휘청거려졌다.

[민하 낭자! 그대가 여인이라니, 기쁘기 그지없소. 그대에게 정신없이 끌린 연유가 여인이어서였구려. 여인인 줄도 모르고 같은 사내를 연모하게 된 줄 알고 내 얼마나 번민하였는지 모르오. 그대를 만나지 못하자 심지어 상사병에 걸려 버렸소.]

아침 해가 뜨기라도 한 듯 얼굴이 환하여진 임호가 휘청거리는 민하를 와락, 끌어안고는 기탄없이 제 마음을 밝혔다.

[…….]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던 이의 품에 안긴 민하는 뜻하지 않은 고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민하 낭자! 그대를 이리 연모하오.]

임호가 민하를 으스러뜨릴 듯이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선비님…….]

가슴이 벅차오른 민하는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임호를 올려다보았다. 그이의 단단한 가슴팍에 제 젖가슴이 눌리며 일어나는 야릇한 흥분을 감추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 붉은 입술로 사내를 미혹하는 게요? 내 백 번이라도 미혹당하여 주리다.]

입술을 질끈 깨문 민하의 색기 어린 요염한 모습에 더는 견딜 수 없어진 임호가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니라고 말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그이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젖가슴마저 그이의 손아귀 안에 움켜쥐어져 희롱당하였다. 그러한데도 웬일인지 그 희롱이 싫지 않았다.

[아…… 아아아…… 선비님…… 하아아…… 흐음…… 으읏.]

싫기는커녕 야릇하게 터져 나오는 교성에 민망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런. 그대가 여인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그만 격하여져서. 송구하오.]

그제야 제 입술과 손을 떼어낸 임호가 민하를 품에서 내보내 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을 말하여 버린 민하의 얼굴은 다홍치마를 뒤집어쓴 양 붉어졌다.

[진정이오? 그대의 전부를 가져도 괜찮다는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