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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자취를 더듬은 적 없다

2화



바깥으로 끌려 나온 아비가일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피를 머금어 짙어진 흙바닥 위엔 몸통을 잃은 머리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총 여섯 개. 고통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낯을 한 채였다. 엉성히 잘려 나가고 피에 엉켜 있긴 하지만, 하나같이 자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북마녀의 핏줄을 증명하는 고유한 색. 아비가일은 저 색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하스 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사헬의 왕과 왕녀들의 머리였다.

“……아.”

단말마와 같은 신음을 원시로 아비가일이 절규했다. 울음과 섞여 터져 나오는 신음은 목도한 것에 대한 절망과 경악을 날것으로 내보이고 산화했다. 누군가 그녀의 목을 거칠게 채어 조르는 듯 숨통이 턱턱 막혀 왔다. 세상의 모든 소음들이 귓가에서 멀어졌다. 어디선가 진한 피비린내가 새삼스레 풍겨 와 아비가일은 기진할 것만 같았다.

생각이 흘러가지 못하고 한 곳에서 막혀 맴돌았다. 내 팔다리와 숨통을 끊어 내는 한이 있어도 지켜 내고자 했던 것들이, 이렇게, 볼품없이, 조악하게.

불현듯 목소리가 시야를 갈랐다.

“아사헬의 개로군.”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비가일은 멍하니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장 눈에 들어오는 검은색의 아름답고 휘황한 갑옷. 표면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남자의 회색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아비가일은 멀거니 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서슬 퍼런 안광이 아비가일을 담았다. 희미한 흥미가 눈동자에 스쳤다. 그러다가 문득, 남자가 무얼 할 것처럼 몸을 조금 움직였다.

데구르르― 남자의 발치에서 머리 하나가 굴렀다. 아비가일은 홀린 듯 눈을 내려 그것을 넋 놓아 보다가, 약간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비가일은 완악한 얼굴로 허, 하고 숨을 토했다. 허, 하, 핫, 하핫, 그녀가 발작적으로 웃었다.

그건 셋째 왕녀 벤느에셀의 머리였다.

찰나 이성이 아득해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곧장 아비가일은 정신을 고쳐 잡았다.

피가 마르지 않은 검을 들고, 왕녀의 머리 옆에 서 있던 알렉이 허리를 쭉 펴고는 선득한 시선으로 아비가일을 훑었다. 그가 물었다.

“왕녀 하나는 어디 있나?”

“모른다.”

아비가일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애써 내리누르며 여상하게 답했다. 냉정하려 노력했다. 지금은 감정을 내보일 때가 아니다. 사비나, 그분께서 이제 아사헬의 유일한 후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다. 다짐하는 것만으로 버겁고 벅차고 절박하여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모르기는. 어디 있어?”

“불길에 휩싸이셨다.”

알렉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매를 삐걱삐걱 당겨 올려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약간 휘었다.

“불길?”

“…….”

“웃기는 소릴 하는군. 왕녀의 궁에선 불 따위 나지도 않았어.”

들키지 않으면 거짓은 거짓이 아니게 되는 법이다. 아비가일은 덤덤히 받아쳤다.

“불길에 휩싸이셨다. 그 후론 모른다.”

“몰라? 몸 던져 불길 속에서 왕녀를 구한 게 아니고? 아사헬의 개들은 충성심이 이렇게도 바닥인가.”

“구하려 했으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아아.”

납득했다는 듯 소리를 낸 알렉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불길에 휩싸이셨다. 진정 불길에 휩싸이셨다.

“그래. 그렇군. 불길에 휩싸였군.”

알렉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아비가일과 시선을 마주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비가일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남자가 웃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알렉은 이 상황이 꽤나 재밌었다.

“너, 검은 머리구나.”

“…….”

“아, 그러고 보니 사로잡은 술사들 중 검은 머리 남자가 하나 있었지.”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내 알렉은 웃음을 거둬들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장 아비가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가 향한 곳은 아사헬 궁의 이들이 사로잡힌 곳이었다. 마주한 처참한 광경에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비가일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렉은 무리들 중 남자 하나를 끌어냈다. 아비가일과 같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유약해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아비가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알렉이 제가 끌고 온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물었다.

“왕녀 하나는 어디 있나?”

“불길에 휩싸이셨다.”

“그런가.”

푹. 끌려 나온 남자의 오른팔에 검이 내리꽂혔다. 남자가 비명을 토했다. 알렉은 다시 물었다.

“왕녀는 어디 있나?”

“……불길에, 휩싸이셨다.”

살점 안에서 칼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아비가일은 귀를 갉아먹는 듯한 비명 속에서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단순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저 악마의 조악함 때문이었다. 저건 능숙한 기사의 것이 아니다. 그냥 장난질에 불과한, 서투르고 투박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칼질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더 짐승으로 만드는.

“아, 악, 아으, 끄으으―”

남자는 성한 팔로 바닥을 긁으며 울음소리를 냈다. 알렉은 가차 없이 팔에 꽂은 칼을 비틀었다. 비명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남자의 껄떡껄떡 넘어가는 숨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가팔랐다.

“왕녀는 어디 있나.”

“불길에 휩싸이셨다.”

“이 술사들을 죄 끌어내 팔다리를 난자하면 그제야 지껄일 텐가.”

짓씹듯 말하며 알렉이 팔을 움직였다. 이번엔 다리였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눈을 까뒤집을 것처럼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아비가일은 그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입에 붙은 듯한 대답을 했다. 하려고 했다.

“불길에……”

“아, 아비가일!”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였다. 남자는 고통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호소하듯 외쳤다.

“말해라. 으윽, 왕녀께서……”

“…….”

“으, 끄으, 왕녀께서, 어, 어디 계신지.”

“……불길에 휩.”

“아비가일!”

아비가일의 표정이 일순 와르르 무너졌다가 재건되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아비가일은 창백해진 낯으로 입술을 한참 달싹였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흘러나왔다.

“……어떻게.”

“와, 왕녀께서, 헉, 어디 계시느냐.”

어떻게 그러십니까.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뒤로 구겨 넣었다. 아비가일은 빠져나가는 썰물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선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남자가 아닌 제 몸이 난도질당하는 듯하다. 그건 마치 삶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알량한 인내가 지껄였다. 어디 계속 똑같은 대답을 해 봐. 늘 그래 왔듯이. 알렉이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네 아비가 맞나?”

“…….”

아비가일은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아아악―”

금속이 살을 쑤시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이 잇따랐으며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아비가일의 아버지이자 아사헬의 술사, 헤메스가 그녀에게 연신 외쳤다. 말하라, 왕녀께서 어디 계신지 말해, 아비가일, 말해!

그리고 아비가일은 같은 대답을 했다.

불길에 휩싸이셨습니다.

불길에 휩싸이셨습니다.

불길에…….

왈칵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죽을힘을 다해 참아 냈다. 차라리 왕녀를 위협하던 이의 머리를 부수고 그 식지 않은 피를 뒤집어쓰던 아까가 나았다. 한계에 이른 힘을 쓰느라 속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던 아까가 나았다. 고귀한 피를 지키다 영예롭게 죽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울 것이다. 적어도 이것보단.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들고 속이 뒤틀렸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내 아버지가 맞는가. 어찌 저리 말씀하시는가. 나를 교육한 이에 당신도 있지 않은가. 아사헬을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보잘것없다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내게서 두려움을 앗아 가고 허영을 쥐어짜 내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서로를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아사헬의 술사들. 북마녀의 핏줄을 지키는 수호자. 태어나길 그리 태어나―

이건 본능 같은 거라고.

우리는 서로를 익히 알고 있다. 그리 생각했다.

알렉의 서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숨죽인 채 서 있는 아비가일을 밀고자처럼 주시했다. 저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개새끼 기질이 장난 없군. 어찌 자라 왔는지 알 만했다. 술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하게 질린 낯을 하고 있었으나, 왕녀의 행방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렉은 그게 조금 웃겼다. 어린년이 빌어먹게 독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더 비꼬았다.

“아사헬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마지않던 개들의 충성심이란 게 이런 거군. 그냥 말하지 그래? 한 번 더 불길 소리 하면 네 팔다리도 모조리 끊―”

“불길에 휩싸이셨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알렉은 그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아비가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정 한 조각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불길에 휩싸이셨다. 그 후론 모른다.”

“재밌네.”

무표정한 낯으로 씹어뱉듯 말한 알렉은 잠시 고민하더니, 헤메스의 등에다 검을 푹 꽂아 넣었다. 알렉의 발밑에서 몇 번 꿈틀거리던 몸뚱이는 이윽고 완전히 잠잠해졌다. 아비가일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린가.

알렉이 보이는 바처럼 왕녀의 행방에 지대한 관심이 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찾아내 죽이면 좋겠으나 못 찾으면 어쩔 수 없고. 딱 그 정도였다. 다만 그는 눈앞에 선 술사가 어디까지 버티나 궁금했다. 개새끼 기질은 학습되는 거라는데 그 학습이 어디까지 효과가 있는 건지. 한 번 더 물은 후에 여자의 오른팔을 끊고, 그래도 버티거든 왼팔을 끊어 내 봐야겠다. 알렉은 대강 계획을 세우고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왕녀는……”

감흥 없는 얼굴로, 이제껏 팔다리를 쑤셔 댄 것들은 다 장난이었다는 양 한순간에― 그렇게 아비가일의 아비를 죽이고 다음을 계획하던 알렉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작게 소리를 냈다.

“……아.”

신음이라기엔 미약한, 그저 알아챘다는 걸 나타내는 것쯤의 소리였다. 알렉은 제 목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피가 조금 묻어 나왔다. 조금 스친 정도였으나 못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나지막이 감탄한 알렉이 웃었다.

끔찍한 정적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