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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자취를 더듬은 적 없다

1화


1. 개와 개



늘 그렇듯 지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서느런 냉기가 도는 왕궁 안, 잔뜩 피 먹은 덧옷을 뒤집어쓴 여자가 아이와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핏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것들이 여자의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가느다란 몸은 마른 나뭇가지에 옷을 소략히 입혀 놓은 형상이었다. 격한 피로와 탈진이 뒤섞여 눌어붙은 낯을 한 여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면서도 제 마지막 구원인 것처럼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아비가일은 도망치고 있었다.

진득한 피 냄새가 숨통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호흡이 힘겨워 폐가 뒤틀렸다. 주위에 포진한 피와 불에 타고 남은 재 냄새보다 광막한 공포 탓이었다. 아비가일은 깜박깜박 명멸하는 의식 속에서 헉헉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육체가 한계를 호소한다. 그러나 한 숨 한 숨 버겁게 끊어지는 중에도 쥔 작은 손만큼은 놓지 않았다.

그건 본능 같은 거였다.

아사헬의 어린 왕녀도 상황의 위급함을 아는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아비가일의 손을 붙들고 뛰었다. 쾅, 둘의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뒤돌아볼 새는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무장한 기사 하나와 맞닥뜨렸다. 기사의 시선이 차례로 아비가일, 사비나, 아비가일, 그리고 다시 사비나에게로 꽂혔다. 사비나의 신분을 알아챘는지 기사가 재빠르게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아비가일은 곧장 한 손을 기사의 머리께로 가져다 댔다. 그녀의 흰 손등에 퍼런 핏줄 몇 가닥이 파뜩 섰다.

“으그그극―”

기사가 목 졸린 소리를 내며 얼굴을 괴이하게 일그러뜨렸다. 아비가일은 이를 악물고서 눈을 부릅떴다. 허공을 긁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챙, 챙, 기사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이윽고 아비가일의 얼굴 위로 뜨끈한 피가 후두둑 튀었다. 머리를 잃은 기사의 몸이 고꾸라졌다. 거의 동시에 휘청하는 아비가일의 몸을 사비나가 황급히 작은 두 손으로 받쳤다.

“아비가일!”

아비가일은 휘청휘청 벽에 붙듯 기대서더니,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토기가 치민다. 한계치로 술을 쓴 탓에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죽을 것 같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가빠 오는 숨을 애써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나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아군의 것은 단연코 아니리라.

맙소사. 아비가일은 그만 낮은 비명을 토했다.

끅, 끄윽, 잇새로 울음 섞인 신음이 샜다. 아비가일은 억지로 그것들을 목 안으로 욱여넣고 고인 눈물을 거칠게 훔쳐 냈다. 왕녀께서 보고 계신다. 사비나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큰 눈에선 눈물이 후두둑후두둑 연신 떨어졌고 늘 불그스름하던 뺨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 모습에 아비가일은 진정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고귀한 아사헬의 왕녀. 위대한 북마녀의 적통 후계. 이런 일을 겪어선 아니 되실 몸이다.

왕녀께서 보고 계신다.

아비가일은 속으로 되뇌며 몸을 꼿꼿하게 폈다.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으로 피범벅인 얼굴을 쓸어 대충 닦아 냈다.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놓고 사비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아비가일은 제 목소리가 부디 명료하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왕녀님.”

아비가일은 오늘 처음 살인을 했다. 총 일곱 명의 머리를 날렸고 그들의 피를 뒤집어썼다. 끔찍하고 무참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함께 도망치던 호위와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사비나를 지킬 이는 이제 그녀 자신밖에 없었다. 살아도 왕녀를 위해 살아야 했고 죽어도 왕녀를 지키다 죽어야 했다. 목숨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살인 따위가 대수랴.

아비가일은 태어나길 아사헬의 개로 태어났다. 그녀에게 주어진 이 모든 힘은 오로지 아사헬의 피를 위한 것이었다. 아사헬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고 고귀한 피에 이 삶을 바쳤다. 이것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북마녀의 나라에 대한 술사로서의……

그러니까 그건 본능 같은 거였다.

왕녀를 지켜야 했다. 그녀는 그러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실패한다는 건, 아니, 애초에 재고의 여지가 없다. 실패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냥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가정이었다.

아비가일은 앞으로 길게 뻗은 복도를 주시했다. 다행히도 그쪽 방향에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왕녀님.”

“으, 응.”

“여길 따라 쭉 가다 보면 왼쪽에 계단으로 이어진 긴 통로가 나올 겁니다. 아사헬의 피를 인식하고 문을 열어 줄 테니 걱정 마시고, 거기 노암들이 있습니다. 왕녀님 노암 타는 법 배우셨죠.”

“나 잘 타지 못한다. 네가 타고 내가 뒤에…….”

아비가일은 어설프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부턴 왕녀님 혼자 가셔야 합니다.”

‘왜.’ 사비나는 그리 묻는 얼굴이었다. 아비가일은 사비나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다. 그건 회피라기보다 잘 정제된 단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곤조곤한 말이 이어졌다.

“노암을 타고 북쪽 끝 아몬의 땅으로 가십시오. 거기 오래전 헤어진 우리의 핏줄들이 거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왕녀님을 데리러 갈 겁니다. 그때까지 부디 귀한 몸 보존하고 계십시오. 여기, 피가 묻었지만…… 덮어쓰셔서 머리색 꼭 가리시고. 같이 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어서 가십시오. 꼭 무사히 계셔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꼭……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사헬에 영원한 영광을.”

사비나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님은 어른스럽기도 하시지. 아비가일은 와중에도 뿌듯해하며 미소 지었다. 어서 가라 자신을 떠미는 아비가일의 손길을 사비나가 확 붙잡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믿어. 아비가일. 꼭 살아야 해.”

사비나는 마침표를 찍고서 곧바로 몸을 돌려 뛰어갔다. 아비가일은 멀어지는 작은 인영을 보며 잠시 선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속을 죄어치는 고통에 곧 허물어졌다. 그녀는 컥컥대며 가슴께를 잡아 뜯듯 쥐었다. 북마녀의 술사들은 각기 쓸 수 있는 술의 양에 선이 있었다. 게다가 아비가일은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채 다 성숙하지 못한 술을 한계 이상으로 쓴 탓에 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나하스께서 이제 나를 데려가시려나 보다. 아비가일은 자꾸만 흐트러지는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멍하니 생각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몇 번이나 기침하던 그녀가 성마르게 웃었다. 왕녀께 거짓을 고해 버렸다. 아무래도 그분을 모시러 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일 터였다. 질문을 받지 않는단 무례를 범한 걸로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다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탓이라 해명해 보아도 죄는 죄였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먹먹한 귀에 웅웅대는 이명만 요란하니 어쩌면 지척일 수도 있겠다. 왕녀께선 지금쯤 통로에 당도하셨을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아비가일은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며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허우적댔다.

생각해 보면 늘 정신과 육체는 따로 놀았다. 둘 다 북마녀의 권능 아래 속했으니 온전한 제 것은 아니라지만, 기이하게도 육체만은 지독할 만치 가깝게 느껴졌다. 나약한 육체는 번번이 정신을 배반했다. 가령 고통을 포함한 모든 원초적인 관능 같은 것들. 그래도 고통 따위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아비가일이 아는 언어로는 이런 꺾임 없는 의지와 육체의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건 본능 같은 거라고.

육체는 으스러져도 정신만은 영영 살아 아사헬의 영광에 거하리.

그리 또 한 번 되새기는데 열 걸음 너머, 기사들이 아비가일의 시야에 잡혔다. 예상대로 적국의 상징인 흑색 갑옷이었다. 수는 셋. 왕궁에 숨이 붙어 있는 왕족들의 목을 가지러 온 것일 테다. 아비가일은 힘겹게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의식 한구석에 걱정들을 밀어 넣었다. 이를테면 다른 왕녀님들께선 무사하실까, 왜 사비나 왕녀를 구하러 추가 병력이 오지 않는 것일까, 이 궁 밖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등등.

철컥철컥, 저들끼리 맞물리는 갑옷 소리가 소름 끼쳤다. 투구 사이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녀인가?”

“처리해. 내가 이쪽으로 가 보겠다.”

왕녀께서 가신 길이다. 아비가일은 피가 굳은 눈꺼풀을 파르르 힘겹게 들었다. 세 명. 할 수 있을까. 없었다. 그러나 있을 것이다. 있어야 했다.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힘주어 뜨며 소리 없이 술을 중얼댔다.

“아악!”

사비나가 향한 복도로 가 보겠다던 기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목 사분지 일 정도가 찢겨 나가 피를 내뿜고 있었다. 기사는 짐승 같은 울음을 우짖으며 바닥에 주저앉더니, 찢겨 나간 제 목을 붙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쥐었다. 그러나 기사의 쓸모없는 발악을 비웃듯 피가 속수무책으로 왈칵왈칵 쏟아졌다. 아비가일은 남몰래 혀를 찼다. 목을 치려 했건만 그마저도 온전한 공격이 못 되었다. 저 기사는 곧 죽겠으나 나머지 둘은 어찌해야 하지.

생각은 건조했으되 몸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살인의 공포에 휩싸였다. 별안간 소름이 아비가일의 전신을 훑었다. 그러나 그 미개한 감정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속을 헤집는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피에 젖은 얼굴이 와드득 구겨졌다.

한 기사가 황급히 쓰러진 기사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른 기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아비가일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아비가일은 남은 힘을 바득바득 그러모아 기사의 팔을 속박했다. 팔을 잘라 내려 했지만 그럴 만한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도 자꾸만 깜깜해져 왔다. 쓰러진 이의 목을 천으로 동여매던 기사가 불현듯 소리쳤다.

“필릭스! 잠깐만. 저 여자……”

“술사다.”

“아, 그럼 데려가야 하나. 젠장. 이 힘은 뭐야? 이런 술사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어떻게든 기사의 팔을 잘라 내려 애쓰던 아비가일은 결국 완전히 힘을 소진했다. 그녀는 목 안쪽에서부터 울컥 터지는 핏물을 바닥에 뱉어 내며 캑캑댔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고 폐부가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다. 잔뜩 쉰 숨을 가쁘게 들이켜던 아비가일은 이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던 팔을 턱 떨어뜨렸다. 핏물 섞인 기침이 터졌다. 기사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어른어른 내려앉았다.

“힘을 다 쓴 모양인데. 일단 끌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