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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구원자

3화


* * *



저녁 식사가 시작된 지가 진작이었음에도, 식사용 접시는 아직 깨끗했다. 나뿐만 아니라 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그랬다. 나는 시선을 살짝 돌려 식당 한구석에 있는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식사가 시작된 지 족히 10분이 넘었다.

여섯 명이 조가 되어 앉은 테이블에는 많은 것이 차려져 있었다. 양념을 발라 조리한 고기에 생선, 구운 채소가 각각 서너 종류였다. 양도 푸짐해 모두가 한 번씩 덜어 먹어도 넉넉할 것 같았다.

큼지막한 과일 바구니 안에는 종류별로 신선한 과일이 들어 있었고, 그 옆에 포도주 한 병과 언제든 따라 마실 수 있도록 마련된 오프너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각 자리에는 잔까지 하나씩 준비되어 있었다.

견습생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음식에 손을 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다들 동석한 이들이 초면이라 낯을 가리는 것이었다.

잘 찾아보면 같은 신전 출신들도 있었다. 아무리 실적이 나빠도 각 신전에서 매해 두 명 정도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전 대륙에서 모여든 수습 사제들이 있는 이 테베칸 시국에서 아는 사람이 같은 테이블로 배정될 확률은 별로 없었다. 우리 테이블은 그렇지 못한 대다수에 해당되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기와 야채를 듬뿍 덜어 내 접시에 올려놓았다. 원래라면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며 조심스럽게 담았을 테지만, 배고픈 데는 장사가 없었다.

내가 먼저 나서자 망설이며 눈치를 보던 다른 사제들도 이내 식기를 들어 올렸다. 곧 음식을 덜어 내는 소리가 테이블을 꽉 메웠다. 나는 그에 나름 만족하며 포크로 돼지갈비 하나를 찍어 올렸다.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

수많은 테이블 중 어딘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낯선 이들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와 박혔다.

“쟤. 쟤가 바로 카야 맥노프야.”

크진 않지만, 내 이름이 정확히 들려왔다. 이미 어느 정도 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대화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식사에 열중한 척을 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다.

“올해 수석이야.”

그들은 두 달 전, 전 대륙의 견습생을 상대로 치러진 사제 서품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둔 시험이었다.

“아, 쟤가?”

호기심을 담은 대답이 들렸다. 당연했다. 어딜 가나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관심을 끈다.

“어, 그것도 전 과목 만점이라더라. 철학 시험, 너도 악명 알잖아. 절대 만점 안 주기로 소문난 거. 그런데 작문 100점을 받아 냈대.”

작문 만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 철저히 주류 철학자들의 사상과 사고에 맞추어 그럴듯한 문장으로 풀어내면 되었다. 물론 그들의 머릿속이 보일 정도로 글을 해부하고 탐독하는 데는 헤아리지 못할 양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테이블에 식사와 곁들어져 나온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의 말을 계속해서 경청했다. 고맙게도 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진짜 공붓벌레였나 봐. 아니면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건지.”

“우리 오빠가 보좌감은 정해져 있다 했었는데, 저런 사람이 보좌가 되는 건가 봐. 가문만 좀 좋으면 진짜 보좌 달겠는데.”

그들 모르게,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바로 이것을 위해 나는 견습생 시절 내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수습 사제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그로 인해, 신전에서 날 자연스럽게 알릴 기반을 다지는 것.

종국에는 보좌 사제가 되는 것. 성기사와 추기경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교황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존재.

어떻게 해서라도 저 위에 있는 인간들의 눈에 띄어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의 입에서 회자될 만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고아라 배경도 뭣도 없는 내가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공부를 남들보다 특출하게 잘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견습 기간 3년 내내 수석을 유지했다. 그래야 보좌 사제가 될 일말의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지도가 받쳐 주는 상황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한참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포크로 찍던 토마토를 놓치고 말았다.

“…….”

옆구리가 터진 토마토에서 빨간 즙이 쏟아져 나왔다. 꼭 피가 흥건한 것과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엉뚱한 상상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는 데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영 좋지 않다.



* * *



식사 도중 우리는 제각기 앞으로 우리가 지내게 될 기숙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내가 살게 될 곳은 203호였다. 나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한 명씩 주어지는 약도를 손에 쥔 채 내 방이라고 안내받은 곳의 위치를 짚어 보았다.

저녁을 다 먹고 난 뒤 식당이 상당히 한산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보다 식사를 늦게 마친 편이라, 식당에는 남은 인원이 몇 없었다. 나는 그중에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았지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동행을 포기한 나는 약도에 의존해 기숙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숙사는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수도자의 경건한 자세에 딱 부합했다.

나는 복도 구석구석에 걸린 등에 의존해 어스름한 복도를 걸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코너를 돌자 곧바로 내가 머무를 방의 번호가 보였다.

방문 앞에 도달한 나는 비뚤어진 짐을 고쳐 든 채 천천히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등이 켜진 방 안에는 이미 한 소녀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며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의 고개가 절로 내게로 돌아왔다. 그녀의 발치에 커다란 가방 같은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그녀 맞은편 책상 아래 짐부터 내려놓은 나는 여전히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최소 1년을 함께하게 될 룸메이트였다. 좋은 인상을 남겨야 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적갈색의 곱슬머리에 장밋빛 뺨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나이는 나와 같거나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였다.

“아까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수석이라면서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서 순수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먼발치에서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일대일로 칭찬을 들으니 민망했다. 나는 대답 대신 멋쩍게 웃었다.

“정말 대단해요! 신앙심이 그렇게 깊으시다니……. 존경스러워요.”

“아……. 아니에요. 별것 아닙니다.”

애써 자신을 낮추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으니 꼭 겸손을 떠는 것 같은 말이 나왔다. 날 보며 생긋 웃은 그녀는 가슴에 손을 살짝 얹어 보였다.

“저는…… 모르바디 공국에서 왔어요. 이름은 알리사 키엘이라고 합니다.”

키엘? 키엘가(家)라면 현재 모르바디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공작 가문이었다. 베르시카에 살던 나도 알고 있는 큰 가문의 일원이 내 룸메이트란다. 나는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키엘……이라.”

“저희 가문에 대해 들어 보셨나 보네요.”

그녀가 익숙하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런 반응이 익숙했는지 손동작에서 여유가 넘쳤다. 아,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재빨리 정신을 붙잡고 그녀를 따라 내 소개를 했다.

“저는 베르시카에서 온 카야 맥노프라고 합니다.”

“아……. 베르시카.”

허공을 향해 눈을 도르륵 몇 번 굴리던 그녀가 이내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미소를 지었다.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는 선천적으로 웃음이 많고 순한 성격인 듯했다.

“여행은…… 몇 번 가 봤어요!”

“아, 그렇군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좀 무뚝뚝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성격상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몇몇 가문 이름도 알고 있어요. 맥노프는 처음 들어 봤지만…….”

자신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맥노프 가문은…… 어느 지방을 다스리나요?”

“네? 그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이 소녀는 당연히 내 집안이 귀족일 것을 전제한 채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맑은 눈이 순진하게 나를 향해 깜박여졌다.

우리 집안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구나. 그러나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저는…….”

나는 일부러 뜸을 들인 다음, 느릿하게 답했다.

“……얘기해도 잘 모를 만큼, 깊은 시골에서 왔습니다.”

수습 사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직위에 있었다. 황족이건 난민촌의 거지 출신이건 신전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제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는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와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제를 차별하는 것이 공공연했다.

직접 겨냥해서 신분을 물어본다면 숨길 수 없겠지만, 굳이 평민임을 드러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교회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형된 어미를 두고 있었기에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내 출신이나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는, 맥노프에서 보유한 영지가 없습니다.”

이리 말하면, 예전에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부 날려 먹은 몰락 귀족쯤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오해할 것을 알면서 일부러 돌려 말했다.

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 친지도 없는 내게 유일하게 남은 맥노프는 나뿐이고, 내가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두루뭉술하게 일러두었으니, 이쯤에서 이 화제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 저런. 어쩌다가…….”

그녀는 본인이 알 수 없는 사연으로 영지를 ‘잃어버린’ 내 처지를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공주님처럼 자랐으니 내가 불쌍해 보일 만하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