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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베이커리 오는 길이지? 숙취 해소제 하나만.]

[왜.]

[죽을 것 같아.]

[죽으려고 밤새 둘러 마신 거잖아?]

[일단 객사는 면해야지. 우리 오빠야 소중한 사업장에 폴리스 라인 둘러 줄 수는 없잖아?]

기적은 기연과의 지치는 톡 대화창을 홱 닫아 버렸다. 그리고 눈발이 조금씩 날리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꽉 조이는 코트 여밈을 신경질적으로 풀어내고 허리춤에 두 손을 척 얹어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계집애가 주중, 주말 할 것도 없이 일주일 내내 불금처럼 놀 수 있는 거야? 그 뜨거운 청춘과 열정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유흥에 힘쓰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적은 갓길에 세워 두었던 차에 다 갔던 걸음을 큰마음 먹고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전 지나쳐 온 상가 건물의 약국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일단 내 귀한 베이커리에 폴리스 라인 두르는 비극은 면해야 하니까 말이다.

“어서 오세요! 잇취!”

그리고 기적은 열린 문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우뚝 멈춰 언 듯이 섰다.

“뭐 드릴까요?”

약국을 지키고 선 여자는 마스크 밖으로 눈만 동그랗게 떠서 말똥말똥 그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여자를 만난 그저께, 어저께, 그리고 오늘. 그의 인생 속 시공간이 마구 휘저어진 묘한 기분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이었다.

“손님?”

이쯤 되면 우연도 세 번이라 인연이니 얼싸 안고 일단 자빠뜨려야 하는 건 아닐까, 속으로만 신경질적으로 불쾌해해 준 뒤.

“숙취 해소제 하나, 발포 비타민 하나, 드링크제 한 박스, 화상 연고 하나, 그리고 알레르기 약 하나요.”

훌쩍거리면서도 그가 주문한 약들을 열심히 듣고 난 여자는 조제실의 약사에게 물어 진열대에서 차례로 뽑아 봉투에 담았다.

“삼만 이천 원입니다.”

기적은 아무 말 없이 대차게 재채기 후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여자에게 신용카드를 건넸다. 그녀는 봉투에서 알약 상자 하나를 꺼내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켜 보여 주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일반적인 알레르기 종합 증상을 다스리는 약이에요. 낮이라서 잠이 안 오는, 비교적 순한 약으로 챙겼는데 만약 강한 걸 원하시면 다른 걸로 드릴까요?”

“……어떤데요?”

“네?”

여자가 그의 말에 카드 결제기 버튼을 누르다가 그대로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궁금해했다.

“근무 중이니 잠이 안 오는 약이 낫겠죠?”

“무슨……?”

기적은 이마를 얇게 덮은 여자의 앞 머리카락이 긴 속눈썹에 걸린 채 끔뻑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젠장! 불쑥 드는 불길한 예감.

아니나 다를까! 다시 이잇취! 연달아 터지는 그 빌어먹을 재채기 소리!

그는 이제 적극적으로 봉투 안의 알레르기 약을 꺼내 그녀 앞으로 죽 밀어 주었다.

“오늘은 또 어떤 것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거 꼭 먹고 일하라구요. 그렇게 들썩들썩 재채기하고 싸돌아다니다가는 국가 차원에서 그쪽을 격리해야 할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기적은 약을 받아 부디 복용해 달라는 부탁까지는 꾹 삼킨 뒤, 그녀가 건넨 봉투의 손잡이를 손가락 두 개로만 들어서 약국을 빠르게 탈출했다.

보루는 멍청하게 약국 유리문이 다 닫히고, 남자가 저 멀리 사라진 뒤에도 방금 전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한 채로 한참 만에 아, 그 남자! 하고 깨달음이 왔다.

항상 어디로든 일터를 바꾸어 다니는 그녀가 누군가를 각별히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장사인 멍이, 뭉이를 단번에 제압해 주고, 꽃 배달 간 클럽 뒷골목에서 정의를 몸소 실천하려다가 그녀의 선빵에 비틀비틀 전의를 잃고 약통을 순순히 넘겼던 그 남자. 그 축 처진 어깨가 땅에 닿을까 오히려 걱정을 안겼을 정도였으니까.

“그게 뭐니?”

“알레르기 약이요.”

“그건 안 산대냐?”

약사님이 콧잔등에 걸치고 있던 두꺼운 안경을 벗어서 습관적으로 닦으며 물었다.

“아뇨. 사서 날 주던데요?”

“널?”

오호, 오랜만에 구경하는 개수작? 하며 손뼉을 찰싹찰싹 치던 할아버지 약사님이 갑자기 흥분을 멈추더니 보루에게 물었다.

“근데 왜 알레르기 약을?”

그러게요, 나 지금 지독한 기침감긴데. 감기약 배부르게 먹어서 이 약, 못 먹는데. 왜 애먼 데에 돈을 쓰고 저러시나.

되게 이상한 남자.



***



지하철 출구 밖으로 뛰어나온 보루는 빠르게 주변 빌딩들을 훑었다. 잽싸게 스마트폰 지도 앱을 열어 주변 건물들과 주소들을 서치하고 방향을 확인했다. 지독한 길치인 그녀를 이나마 사람처럼 살게 하는 고마운 지도 앱. 항상 낯선 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아르바이터에게는 필수 앱이었다.

보루는 내비게이션 기능을 실행하고 이어폰으로 연결해 귀에 꽂아 넣었다.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라고 했으니, 빠르게 달리면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약국 보조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영주가 잡아 준 면접 시간에 맞추기 위해 11월의 초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진땀을 흘리고 있는 보루였다.

번잡한 도심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3층짜리 베이커리 건물.

빵집치고 지나치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 앞에 서서 보루는 들어가기 전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에서 딱 3분 지난 시간.

머리에 쓰고 있던 비니를 벗을까 하다가, 땀을 흘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벗어서 머리만 정리하고 다시 푹 뒤집어썼다. 부디 면접 보실 높은 분이 모자나 캐주얼한 차림에 경기를 하는 꼰대만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다.

<기적의 빵집>. 이름도 빵집치고 지나치게 거창하다.

활짝 열린 입구에 들어서자 따뜻한 빵 냄새와 식욕을 자극하는 진열대 위의 윤기 흐르는 빵들. 늦은 시간인데도 진열대 주변을 맴도는 손님들이 적지 않았다.

“오늘 면접 예정인 소보루라고 하는데요.”

1층 입구 바로 옆 계산대를 지키는 깡마른 남자에게 자신을 밝혔다. 그녀의 말에 푹 수그렸던 고개를 들자, 껑충한 키가 돋보이게 된 남자는 활짝 웃으며 보루에게 말했다. 검은 색 셔츠에 짙은 핑크 빛 금속 이름표에는 ‘이 웅’이라고 적혀 있었다.

“와, 진짜 본명이 소보루였어요? 게임 닉 같은 건 아니구요?”

매우 자주, 실상 하루 열두 번도 더 실명 확인을 요구받곤 하는 보루는 기계적으로 진실의 미소를 달고 끄덕끄덕했다. 실은 본인도 가끔 이 폭신폭신한 본명이 차라리 닉네임이었으면 좋겠다는 절실한 바람이 있으니까. 그러니 저 어린 친구의 의구심을 탓할 수도 없다.

“저기 계단 보이시죠? 바로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카페 매니저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고마워요, 하고 돌아서는데 남자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보루 누나!”

만난 지 약 삼십 초 만에 타인을 누나 삼은, 신이 내린 친화력이 엿보이는 남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면접은 다른 거 안 봐요. 딱 하나, 시간 약속만 보거든요. 그러니까 매니저님이 왜 늦었느냐 꼬투리 잡으시면 1층 잘생긴 직원이 붙들고 늘어졌다고 핑계 대요. 내가 알리바이가 되어 줄게요.”

“왜요?”

몹시 고마운 팁이지만, 왜 그쪽이 굳이 나서서 성실성까지 희생해요?

“보루 누나가 여기서 일했으면 좋겠어서요.”

그의 말에 보루는 바쁘지만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

“빵집에 소보루 없는 게 말이 돼요? 소보루는 빵집에 있어야죠! 안 그래요?”

이제 스무 살 갓 넘어 보이는 어린 친구의 응원이 참말 고마워 마주 웃어 주고 싶었지만, 다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느끼함이 감지되는 바람에 보루는 그만 꾸벅 고개만 숙이고 돌아서야만 했다.

그녀의 냉정한 돌아섬에도 굴하지 않고 소리 높여 파이팅을 외치는 젊은이 덕분에 보루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에 속력을 올릴 수 있었다. 부르르, 몸을 연신 떨어 소름을 털어 냈다.

2층은 홀 케이크와 조각 케이크, 샌드위치를 전시한 쇼케이스가 크게 있는 카페였다. 3층으로 안내하는 화살표 안내판 아래에 ‘3층에도 카페 테이블이 있습니다.’라고 적힌 것을 보니, 2, 3층 모두 카페로 운영되어지고 있나 보다. 베이커리에 붙은 작은 카페라고 생각했던 보루는 생각보다 큰 카페의 규모에 살짝 한숨을 쉬어야 했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져 이미 홀을 비우고 청소를 하고 있던 직원이 보루에게 문 하나를 가리켜 주었고, 그녀는 곧 노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오늘 단기알바 면접 보기로 한 바리스타 소보루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작은 사무실 안을 차지한 여자는 짙은 테의 안경을 쓰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트북 모니터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정수리만 보이는데도 일개 면접자를 기다리느라 한껏 지루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보루는 한껏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잠시간 그렇게 벌을 세우는데도 그녀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무시의 수모를 받아 냈다. 늦은 건, 그녀였다는 것만 스스로 되뇌며.

그러나 곧 꽝 얼었던 공간 안의 공기가 출렁이고, 안경을 벗으며 긴 머리카락을 차락 뒤로 넘기는 틈에 얼굴을 보인 매니저의 정체를 확인한 그 순간, 보루는 속으로만 외칠 수 있는 무척 상스러운 욕을 짓씹어야 했다.

“……진짜 왔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일부러 늦게까지 남아서 면접 본다고 한 보람이 있구나?”

이기연. 머무는 시간이 짧은 뜨내기 아르바이트 팔자라서 인연이 많이 없는 보루가 가진 두 번째 인상 깊은 인연.

“괜히 왔네. 알았으면 내가 걸렀을 텐데. 미안, 아까운 시간 뺏었다. 난 그냥 가 볼게.”

보루는 미련 없이 빙그르르 돌아서 방금 닫힌 문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아니. 면접은 봐야지? 네가 말했다시피 이대로 내 아까운 시간 빼앗기만 하고 튈 셈이야?”

기연의 콕콕 찌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뒤통수로 날아들자, 보루는 살짝 심호흡을 해야 했다.

“됐어. 날 이미 알고, 보란 듯이 물 먹이려고 기다린 걸 테니. 굳이 마주 앉아 서로 기분 나쁠 필요 뭐가 있니? 간다.”

“안 돼. 여기 사장이 그런 데에 무지 까다로워서 말이야. 나도 돈 받고 일하는데, 어찌어찌 부족한 사람이라 안 됩니다, 핑계는 찾아야지 않겠니? 그러니까 굳이 마주 앉자, 우리.”

또각또각 걸어 그녀가 붙들고 있던 문을 대신 크게 열어젖힌 기연은 밖에서 청소를 하던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 커피 두 잔이랑, 케이크 두 개만 챙겨서 가져다줄래?”

네, 하고 뛰어 내려가는 직원을 다시 불러 세운 기연이 잽싸게 덧붙였다.

“아, 맞다! 뜨거운 건 안 돼. 아이스로 가져와라.”

그리고 문을 닫고 기가 막혀하는 보루에게 진하게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주 앉으면 뜨거운 커피는 자칫 상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치?”

짙은 아이라인과 아찔한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서 펄렁이는 이 모습은 어쩌면 교태 같은 것인가 보다. 아까 1층 직원이 그녀에게 선사한 소름이 다시 돋는 것을 보니.

기연이 말한 상해 사고 운운은 아무래도 반년 전, 기연의 얼굴에 그녀가 대차게 끼얹은 블루베리 주스 한잔을 일깨우는 말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 억지스러운 만남은 면접이 아니라, 본격 앙갚음의 자리가 아닐까?

젠장, 이래도 내가 굳이 너와 마주 앉고 싶겠니?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