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기적은 천천히 달리던 다리를 멈추고 커다랗게 한숨처럼 뿜어지는 숨을 쉬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뜨겁게 타던 가슴 안에 시원한 공기들이 들어차자 겨우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캄캄해서 보이는 것 없는 한강에 의미 없는 눈길을 주고 물을 마시려 고개를 젖혔을 때였다.

젖혀진 시선에 저 멀리 걸리는, 시커먼 물가 앞의 더 시커먼 인영. 기적은 멈칫, 마시다 말고 그 위험한 뒷모습에 시선이 묶였다.

두툼한 후드 티셔츠를 입은 작은 몸의 여자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그는 분명히 들었다. 연신 훌쩍이는 소리.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훌쩍이는 소리는 그 아슬아슬한 뒷모습에 애처로움을 보탰다. 참견하거나,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기적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너무 물가에 가까우니, 뒤로 물러서게 하려는 것. 그 사연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위험한 데서 그러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이봐요.”

그래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여자를 불렀던 것이다.

“거기 그렇게 있으면……!”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단발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은 채 여자의 옆모습이 그에게로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기적은 그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하아, 참견하지 말걸.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동그란 눈망울 가득 눈물을 채우고, 한없이 지친 얼굴로 훌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그렇게 가까이 서 있으면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 싶었던 처음과 달리, 기적은 붉어진 코끝을 비비며 볼을 타고 굴러 떨어지는 눈물 줄기를 보자, 그만 망연자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환기되지 않았으면 기적은 더 오랫동안 이 여자의 사연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적은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하나, 그 어두운 심경을 이해한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여자가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아까처럼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의 훼방에도 숨겨지지 않는 눈물인가 보다. 무엇이 이다지도 구슬프게 했을까,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그 순간이었다.

이끅, 이끅!

여자 울음치고는 괴상한 소리였다. 억지로 많이 참는 모양, 서너 번 더 꺽꺽대는 그녀의 잔뜩 움츠린 어깨가 안쓰럽다고 기적은 생각했다. 다시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은 붉은 홍기로 가득했다. 아까보다 더 젖은 눈망울을 후드 소매로 감추었던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훔치고는 눈앞의 그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그리고 다시 급작스럽게 고개를 숙이더니 이번엔 더 크게 히끅, 히끅! 도저히 울음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뭐랄까, 마치……?

“으에에취!”

앞에 선 그의 발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칠 만큼 강렬한 재채기 소리.

“으아아…… 죄송해요. 제가 개털 알레르기가 심해서. 근데 무슨 일이시죠?”

코맹맹이 소리가 길고 조근조근하게 말을 끝냈을 때에도 기적은 작금의 상황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곧 저쪽에서 컹컹 짖으며 달려와, 여자의 주변을 꽉 채워 맴도는 두 마리의 골든 리트리버를 보고, 그 다음 너무 괴롭다는 듯이 히끅, 히끅! 타액 발사를 참아 내는 여자를 보고서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답지 않은 오지랖 용건을 말하지 않은 것이 어쨌든 천만다행한 일이었을까.

“아닙니다.”

기적은 하마터면 멀쩡한 여자를 사연 있는 여자로 만들고, 그 자신도 무안할 뻔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황급히 돌아서서 왔던 길을 나아갔다.

“야, 하지 마! 하지 마! 아악! 제발, 그러지 마!”

빳빳하게 목에 힘을 주고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노력은 연신 터지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이취! 하지 마! 아파! 멍이, 뭉이! 멈춰! 이이취!”

두 마리가 동시에 날뛰며 여자의 몸통을 번갈아 받아 버리고 있었다. 턱, 턱!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여자는 목줄을 놓쳤다가, 잡았다가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종잇장처럼 나부끼던 여자는 결국 가슴에 센 한 발을 맞고 철푸덕 그 자리에 누웠다.

그 자세를 여자가 본격적으로 놀아 주는 신호로 받아들인 두 마리의 골든 리트리버들은 이제 신이 나서 그녀의 몸통 위에서 본격적으로 뛰려 하고 있었다.

기적은 결국 급히 되돌아가 그녀가 놓치고 통통 튀고 있는 목줄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당겨 여자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센 힘으로 날뛰는 행동을 제지 받은 개들은 바로 멈추어 섰다.

“괜찮아요?”

개들의 뒷덜미들을 만져 마저 진정시키며 기적이 큰 소리로 물었다. 헉헉거리며, 기운 없이 일어나 앉은 여자는 그를 올려다보며 아까는 보이지 않던 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치워진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일렁이듯 구겨지더니, 또 빠르게 붉어지는 것이다. 앙증맞은 코끝이 진동하고, 눈망울 가득 설운 물기가 찰랑찰랑 채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부르르 천천히 벌어지는 입매.

아아, 하지 마.

“푸에에에취!”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분무된 강렬한 한 방.

꼼짝없이 촉촉하게 뒤집어쓰고는, 딱 들어맞은 예감을 자축할 새도 없이 여자는 연달아 두 번 더 몸살을 앓듯 격렬하게 뿜어 댔다.

“정말 죄송해요. 멍이, 뭉이가 나쁜 애들은 아니에요. 놀아 주는 건 줄 알고, 흥분하는 바람에.”

그러면서 여자는 호주머니 속에서 새카만 마스크를 꺼내 그제야 얼굴을 반 이상 덮어 버렸다.

“착한 애들이에요. 산책 알바가 유일한 친구라서 그래요.”

개는 안 나빠요, 지금 나쁜 건 그쪽의 요란한 재채기라고 친절히 알려 주고 싶었지만 기적은 사력을 다해 뾰족한 말을 참아 냈다.

“주인 부르는 게 어때요?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손잡이를 넘겨주지 못하고 개보다 작은, 개털 알레르기 산책 알바를 못미덥게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이제 한 번 치렀으니 두 번은 안 할 거예요. 이리 주세요.”

세상 힘들게 일어나 아무 데나 두들겨 터는 척만 하더니, 그에게서 손잡이를 가져간 여자는 익숙한 듯이 질질 이끌려 흐느적흐느적 저쪽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적은 덕분에 축축하고 불쾌한 기분을 마지막으로 어필해 볼까 했다가,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드러눕는 바람에 흙이 묻은 트레이닝복 엉덩이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군데군데 매달린 마른 잔디가 남은 오지랖을 지워 버린 것이다.

아, 샤워가 필요해.



***



[보루! 내일 혹시 시간 되니?]

눈코 뜰 새 없이 빡빡한 알바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그녀에게 몇 없는 인맥인 영주 언니. 늘 뜨내기처럼 머물렀다가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오랜 시간 곁을 주고 먼저 챙겨 주는 따뜻한 영주 언니의 메시지.

[내일?]

시끄럽고 요란한 클럽의 입구에서 벗어나 오늘 할당량인 꽃 양동이들을 죽 세워 놓던 보루는 반가운 언니의 메시지에 하던 일을 멈추고 대화에 참여했다. 한참 힘을 쓴 뒤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카페 알바 자리가 있대서. 한 달만 오후부터 폐점까지 있어 줄 사람 필요하대. 로스팅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라테 아트는 할 줄 알아야 하나 봐. 다른 거 없으면 너 할래?]

클럽 뒷문이 홱 열렸다가 닫히는 동안 숨죽였던 음악소리가 바깥으로 잠시 새어 나왔다. 톡 대화여서 별 방해가 없음에도 보루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골목으로 피해 섰다.

[나요, 나! 나 두 손 번쩍 들고 있어! 내가 할래!]

안 그래도 단기 아르바이트들이 줄줄이 끝이 나는 바람에 당분간 구멍 난 일정들을 채울 아르바이트가 필요하긴 했었다.

이게 다야? 하고 저쪽에서 꽃할매가 눈짓으로만 물어 왔다. 보루가 한껏 처연하게 입고 장사에 나온 꽃할매에게 예쁘게 웃어 주며 인사했다.

“네, 여덟 통 맞죠? 사장님이 장미 가격 올랐다고 남는 것 없다는 앓는 소리 전해 달래요!”

“오케이! 너희 사장이 못 남긴 만큼 나는 더 붙여 팔아먹겠다고 땡큐라고 전해라!”

벌써 한 아름 뽑아 안고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서려는 꽃할매의 야무진 목소리에 보루는 빙그레 웃었다.

이태원 거리의 이름난 꽃 장사꾼, 일명 꽃할매. 낮에는 수레 가득 꽃을 싣고 젊은 연인들에게 어필하고, 밤에는 한껏 처량한 분장으로 클럽마다 돌아다니며 취기 어린 남녀를 자극한다.

“소보루야!”

꽃집 사장님의 몸살감기 때문에 부득이 그녀 혼자 나온 배달. 꽃할매는 만 원짜리 두어 장을 꺼내 그녀가 타고 왔던 미니승합차 차창에 꽂아 두시며 눈짓했다.

“오늘은 나 혼잔데, 할매!”

늘 팁이 후한 꽃할매는 오늘도 그녀를 챙겼다.

“둘이 할 일, 혼자 했으니 두 배 받아! 두 끼 사 먹고 들어가! 피죽도 못 얻어먹는 몰골로 다니지 말고, 좀!”

피식 웃은 보루는 마침 도착한 영주 언니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으려 액정을 그었다.

[내일 너 알바 끝나고 간다고 말해 둘게, 그럼. 추워진다더라. 든든히 입고 다니고, 응? 오늘도 수고해, 소보루.]

파이팅을 외치는 이모티콘까지 전송이 되는 것을 보며, 보루는 찬바람에도 좀체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야구점퍼를 어깨까지 내렸다. 안에 입은 민소매 티셔츠를 들었다 놓으며 열기를 연신 내쫓았다. 그리고 여태 일하느라 의식하지 못했던 간질간질한 콧속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아, 이 지긋지긋한 꽃가루 알레르기.

마스크를 하고 있었는데도 꽃을 만지고 안고 하는 통에 증세가 시작되었던가 보다. 보루는 마스크를 내리고 점퍼 주머니에 둔 알레르기 약을 꺼냈다.

치밀어 오르는 재채기의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손바닥 위에 새하얀 알약을 얹었다. 물이 없어도 삼킬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복용 생활. 캄캄한 골목의 벽에 기대어 지긋지긋한 알약을 입에 털어 넣은 그 때였다.

열려 있던 클럽 뒷문으로 새어 나온 낮은 조도의 조명이 비추는 자리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골목을 차지한 그녀 때문에 나오지 못한 것일까 봐, 보루는 고개를 숙이며 그 앞을 비켜나기 위해 움직였다.

“숨어서 해야 하는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인 걸 모를 나인가?”

문을 차지하고 섰던 사람은 남자였던가 보다. 보루는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스크를 다시 올리며 걸었다. 그리고 젖혔던 야구점퍼를 홱 올려 입다가 툭 하고 약통이 떨어지고 말았다.

데구르르, 구르는 약통을 급히 따라갔다가 선수를 놓친 보루는 대신 그녀의 약통을 집어 올린 남자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다.

되게 크네, 거.

“보아하니 아직 미성년자인 모양인데, 이건 도의상 돌려주지는 못하겠는데 어쩌지?”

뭔가 오해를……, 대꾸하려다가 보루는 불쑥 치받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160cm가 조금 안 되는 작은 키와 마르고 여린 덩치 덕분에 한평생 모두의 동생뻘로 대우받는 오랜 보루의 한. 하필 그걸 건드린 상대였다.

그래서 험한 이 사회의 어둑하고 컴컴한 뒷골목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대쪽 같은 성품을 칭찬하지 못하고 발끈하기로 했다.

“누가 미성년자래요? 내놔요, 그거!”

“미성년자가 아닌 자도 이런 건, 범법인데?”

손에 든 약통을 낚으려던 그녀의 손길을 피해 저 높이 들어 올려진 남자의 얄미운 팔뚝을 노려보다가, 끝내 약 오른 보루가 마스크를 홱 벗으며 소리쳤다.

“이봐요!”

내가 지금 금지 약물이라도 먹은 걸로 아는 거야? 그러면 뭐? 자기가 이 구역 보안관이야, 뭐야.

그 남자에게 볼모 잡힌 그녀의 휴대용 약통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알레르기 약이 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는 이대로 어이없는 오해를 받고 빼앗길 수 없는 치기가 생겨 버렸단 말이다.

“그런 거 아니니까, 내놔요!”

더 강렬한 항의를 담아 그를 쏘아보기 위해 그 남자의 밝은 조명 안으로 보루가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본 남자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고 느껴진 그 순간이었다.

살랑이며 밤바람이 골목 안을 휘저었다. 저 앞에 줄 선 꽃 양동이들을 차례로 다녀온 모양, 보루의 모두 열린 콧구멍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아아, 그렇지만 한껏 성질을 피워야 하는 단계였다. 이대로 눈싸움을 피할 수 없어서 그녀는 치받는 욕구를 꿀꺽 삼키며 버텼다.

그러나 핑글, 눈이 젖고, 온 얼굴이 금세 뜨끈해졌다.

아아, 여기서 지고 싶진 않은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씨, 지금 아닌데……!

“푸에에에취이!”

눈싸움 와중이라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던 그녀의 앞을 차지하고 있던 대쪽 같은 남자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아, 미안. 의도치 않게 선빵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