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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원사 8화

3. 살랑이는 밤 (2)


골드찬의 집 앞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건가.

“우니버스 님!”

“안녕, 오늘도 예쁘네.”

“……고맙습니다. 우니버스 님도 멋져요.”

“거짓말.”

누구보다 초라한 차림인 걸 아는데 빈말도 잘하네. 평소보다 더 꾸민 모습의 골드찬은 귀여운 NPC 같았다. 오늘 컨셉은 동화인가 보다. 황금색의 화려한 자수가 박힌 남색 망토를 두른 골드찬은 왕관만 안 썼지 꼭 똘똘한 왕자님 같았다. 나는 그를 호위하는 무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차림으로 보아선 시종이나 다름없었다.

밤 축제가 시작하는 입구에 도착하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말끔한 셔츠와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카디건엔 브로치가 달려 있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고추 같았다. 물론 채소를 말하는 거다. 왜 저런 걸 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당당한 자태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도 그는 키가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스타일이라 눈에 잘 띄었다. 나보다 보폭이 짧은 골드찬이 휩쓸려 나갈까 봐 그의 손을 부여잡고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나를 아직 보지 못한 듯 연신 두리번거리다 입에 손을 갖다 댔다. 귓속말하려나 보다.

-우니버스 님, 데이트 잊지 않으셨죠?

말을 해도 꼭 느끼하게 하는 버릇도 있나.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나는 답장을 하지 않고 몸을 한 번 움츠렸다. 소름이 돋을 뻔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리쳤다.

“남자 님! 여기요!”

“오셨네요. 이것부터 받아요.”

“뭐예요?”

“여태 산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요. 제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뭔…….”

남자가 빨간 튤립과 노란 튤립이 알록달록하게 섞인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한테 사 가서 나한테 주는 건 무슨 경우람. 키우기 귀찮아서 다시 주는 거 아니야? 받아서 다시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받기도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이런 목적으로 샀던 것이었나.

“우니버스 님이 버프 걸어 주셨잖아요. 상대방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버프.”

“제가 건 거라서 잘 안 느껴지네요.”

“이런.”

“그래도 감사합니다.”

받아야 또 구매할 테니까 일단 받았다. 예쁘긴 한데 떨떠름했다. 남자가 내 옆에 있는 골드찬을 보고 놀랐다.

“둘만 즐기는 줄 알았더니 골드찬 님도 같이 왔네요? 작아서 안 보였어요.”

“…….”

“들어갈까요?”

눈웃음을 지은 남자가 등을 보이며 입구로 걸어갔다. 나와 손을 잡고 있는 골드찬은 반대 손으로 내게 귓속말을 보내왔다.

-우니버스 님, 저분은 왜 불렀어요? 그리고 꽃은 왜 받아요? 저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셋이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불렀어. 너무 그러지 마.”

-……저 사람 우니버스 님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단 말이에요. 변태 같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자.”

그리고 저 사람 성격이 원래 저런 것 같아. 너무 다정해도 탈이네. 골드찬에게 뒷담 아닌 뒷담을 하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둘이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질투 나게.”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물었다. 골드찬과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서로 마주 보았다. 당연히 들리진 않겠지만 뜨끔했다.

밤 축제가 시작되는 6시가 지나자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남자의 말대로 이방인이 많이 들르는지 평소에 못 보던 차림의 유저가 많았다. 자신의 직업을 유추하게 만드는 듯한 복장을 보니 마치 코스프레 축제에 온 것 같았다. 나도 이곳에 섞이니까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았다. 그래도 쇼핑은 1순위로 하고 싶으니 쇼핑 거리부터 돌아볼까.

밤 축제에서 파는 것들은 대체로 평소에 비싼 상품들이었다. 밤 축제라는 명목하에 쇼핑 거리의 상인들은 파격적인 세일을 하고 있었다. 넓은 거리를 쭉 둘러보다 눈에 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어서 오세요. 인기 상점 실오라기 살롱입니다.”

실오라기 살롱은 포털 사이트에서 자주 보던 인기 옷가게였다. 피플 온라인에서 상점 매출 1위를 찍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밤 축제에서 세일을 할 줄이야. 나는 서둘러 옷을 둘러보았다. 대체로 반값 이상으로 세일을 하고 있었다. 옷 하나를 만지작대고 있는데 점원 NPC가 다가와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지금 하나 남았어요. 오픈하자마자 다 팔렸거든요. 입어 보실래요?”

“네.”

“거울 앞에 서 주세요.”

거울 앞에 서자 점원이 V자 모양으로 손가락을 벌리고 내 몸을 스캔했다. 스킬인가. 그러자 내 몸에 홀로그램이 진하게 입혀졌다.

“와…… 우니버스 님, 너무 잘 어울려요.”

“힙 라인이 예술이에요.”

골드찬과 남자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내가 고른 옷은 은하수가 박힌 트레이닝복이었다. 은하수는 멈춰 있지 않고 계속 흐르며 오묘한 색을 보였다. 트레이닝복치고는 세련된 느낌이 강해서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옷이었다. 움직이기도 편하고, 내 닉네임이랑 어울리기도 하고, 가격도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

“이거 살게요. 입고 갈 거예요.”

“탁월한 선택이세요.”

점원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은하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혀졌다. 이건 내 돈으로 사야지. 결제하는데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내 옷을 훑으며 말했다.

“우니버스 님 옷 태가 장난이 아니네요. 제가 옷매무새를 다듬어 드려도 될까요? 엇……!”

“어쩌죠? 제가 해 드렸어요.”

나를 거의 밀치다시피 한 골드찬이 삐져나온 트레이닝복을 거칠게 정리해 줬다. 당황한 채로 고맙다고 중얼거리자 내 눈을 피하며 말한다.

“제가 우니버스 님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에요. 그래도 정말 멋있으세요.”

“어…… 고맙다.”

“전 이미 넘어갔어요.”

“아, 씨…….”

순간 욕할 뻔했다. 귀에 식용유를 들이붓듯 속삭인 남자 때문에 귓바퀴를 거칠게 문지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쪽에 선 두 명은 나를 부담스럽게 쳐다보며 웃었다. 한 놈은 쑥스러워하며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한 놈은 시원한 입매를 자랑하며 연신 나와 눈을 맞추려고 애썼다. 나는 둘과 간격을 넓히고 빠르게 옷가게를 빠져나왔다. 작업복도 하나 더 사고 싶은데. 주변에는 다 평상복만 파는 것 같았다.

옆으로 다가온 골드찬이 슬그머니 손을 잡아 왔다.

“길 잃어버릴까 봐요……. 우니버스 님, 또 살 거 있어요?”

“어, 작업복 사려고.”

“밤 축제엔 직업 관련 복장은 안 팔아요. 제가 나중에 사서 정원으로 가져갈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고마워.”

아싸. 돈을 아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점잖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맛있는 냄새 난다.”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던데 어디서 나는 거지. 킁킁거리며 근원지를 찾자 쇼핑 거리 건너편에서 길거리 음식을 줄지어 판매 중이었다. 음식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볐다. 다른 섬 음식도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밤 축제 음식을 못 먹어 보고 지나갈 순 없지.

뭐부터 먹어 봐야 할까. 둘러보는 족족 맛있는 냄새가 나고 신기한 모양새인지라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사 먹고 싶었다. 그때 눈앞에 있는 가판대에서 화려한 불꽃이 일며 철판에 놓인 떡에 불이 옮겨붙었다.

“시식해 보고 가세요!”

가판대 위에는 ‘이글이글 용암 떡’이라고 적혀 있었다. 뜨거워 보이는데 먹을 수 있을까. 고통 감도를 0으로 낮추고 먹어야 하나? 용암 떡을 바라보며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작은 포크로 콕 찍었다. 테스트할 겸 골드찬부터 먹여 줘야겠다.

“아 해.”

“우니버스 님도 참…… 다 보는 데서 이렇게 티 내시면 저 되게 곤란…….”

“남자 님 준다.”

“아.”

“어때? 뜨거워?”

“달콤하고 맛있어요.”

매울 줄 알았는데 달콤하다니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다시 콕 찍어서 입 안으로 한 번에 넣었다. 떡을 감싼 불길이 혀에 닿자 금세 사그라졌다. 진짜 신기하다.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또 가까이 다가와 간지럽게 속삭였다.

“저는 왜 안 줘요.”

“꼬추 님은 이거 드세요.”

“……컥.”

입 안의 떡을 깨물자마자 요상한 닉네임을 듣고 사례가 들렸다. 꼭 그 닉네임으로 말해야 하나. 괜히 남자 님이라고 하는 게 아닌데. 남자에게 나뭇잎 컵에 담긴 떡을 내민 골드찬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니버스 님! 입에……!”

마치 꿀떡처럼 떡 안에서 달달한 액체가 터졌는데 그게 새어 나왔나 보다. 손등으로 흐른 액체를 닦자 시뻘건 물이 묻어 나왔다.

“이게 뭐야!”

“라즈베리 소스예요. 냅킨은 앞에 있습니다.”

우리 셋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요리사가 재빨리 냅킨을 가리켰다. 입을 꼼꼼하게 닦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 약한 사람은 조심해야겠네.

냅킨 두어 장을 뽑은 골드찬이 내게 고개를 숙이라며 손짓했다.

“우니버스 님, 저 보세요. 여기 아직 묻었어요.”

“어.”

“…….”

내 턱 밑을 닦던 골드찬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방향감을 상실한 손이 내 볼을 타고 아무 곳이나 닦아댔다. 그러면 제대로 닦을 수가 없잖아. 그의 손목을 잡고 턱 주변을 문지르자 골드찬의 목이 라즈베리 소스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돼, 됐어요. 다 닦였어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추했냐.”

“추하다니요! 얼마나 멋진……! 아니에요. 기대감 심어 주는 말은 자제할게요.”

칭찬을 할 거면 마저 하지. 소심하기는.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저 목소리만 들으면 무슨 말을 할까 괜히 긴장이 되는 것 같다.

“뱀파이어 같고 섹시했어요.”

“…….”

골드찬이 준 용암 떡을 우물대던 남자가 입술을 핥으며 나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라즈베리 소스가 묻은 선홍빛의 혀가 느끼하게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다. 진짜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저렇게 변태 같을까. 눈은 마음의 창이라더니. 단골인 남자에게 정이 조금 떨어졌다.

우리 셋은 가판대를 돌아다니며 시식 코너를 섭렵했다. 괜히 눈치만 엄청 봤는데, 원래 다른 마을 음식을 팔기 위함이 아니라 홍보를 하러 온 거라고 해서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다. 전기가 찌릿 오르는 레몬 케이크를 먹었을 땐 눈동자가 잠시 노란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말캉한 혓바닥 모양의 젤리를 먹었을 땐 남자에게 첫 키스가 떠오른다며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이상한 드립을 듣기도 했다.

HP를 빵빵하게 채우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밤 축제를 구경하러 광장으로 왔다. 한 시간 후부터는 밤 축제의 묘미인 피플 오엑스 퀴즈와 보물찾기를 하는데, 우리는 그 전에 광장에서 하는 미니 게임을 먼저 해 보기로 했다.

미니 게임은 정말 다양했다. 피플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게임보다는 물풍선으로 하는 사천성, 거대 테트리스, 수중 달리기, 독이 든 포커 등 기본 유명한 방식에 새로운 룰을 적용한 게임이 많았다. 대부분이 HP를 많이 소모해야 할 것 같은 게임이라 소란스럽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을 구경하다 맨 끝에 놓인 선인장 다트 장에 왔다. 이거라면 힘들지 않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트 장으로 급히 들어간 남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 꽂아 주실래요?”

“……예? 뭘요?”

“이거요.”

남자는 나와 골드찬에게 선인장 가시 다트를 나눠 주며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곳에 들어가 섰다. 그러자 남자의 옷이 순식간에 두툼한 선인장으로 변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왜 나서서 가시를 맞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시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때 골드찬이 뾰족한 가시를 남자에게 던졌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걸 왜 던져……!”

“……하윽.”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골드찬의 머리 위로 작은 폭죽이 터졌다. 가시는 남자의 옷에 뚫려 있는 빈 구멍에 쏙 들어갔다.

-100점! 와우! 솜씨가 대단한걸? 남은 다트를 차례대로 던져 봐! 또 맞힐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킬킬! 아 참, 아프진 않겠지만 얼굴은 피해 달라구!

남자의 머리 위에서 덜렁이는 선인장 캐릭터가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

나는 입을 작게 벌린 채 남자의 몸으로 스며드는 가시를 보았다. 룰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스타일의 게임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골드찬이 다섯 개의 선인장 가시를 모조리 던질 때까지 한 발짝 물러서서 게임 규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세 번째 가시까지 백 점으로 명중시킨 순간 남자가 입은 선인장 옷이 마구잡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곧 폭발할 것 같은 미러볼처럼 말이다.

“워호!”

굉장히 따끔할 것 같은데 남자는 신이 난 듯 소리를 지르며 환하게 웃었다. 남자 위에 달린 선인장의 표정이 울긋불긋해졌다. 골드찬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옷의 빈 구멍에 가시를 쏙쏙 박아 넣었다.

-으으… 분하다! 이렇게 내 동료를 하나 더 잃는구나! 골드찬, 널 인정하겠다. 나의 신선한 열매를 가져갈 기회를 주겠다!

남자가 입고 있던 선인장 옷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는 후련한 모습으로 골드찬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골드찬 님 한 솜씨 하네요? 덕분에 잘 느꼈습니다.”

“……뭘 이 정도로.”

둘은 다트 게임으로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골드찬은 남자의 시원한 웃음을 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어느새 그의 손엔 연보라색의 큰 열매가 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열매를 자연스럽게 받아 아이템 창으로 넣었다. 용도는 나중에 확인해야지. 미니 게임에서 받은 것인 만큼 엄청 좋은 아이템은 아닐 듯했다.

나는 즐기지도 못했는데, 남자는 이제 반딧불이를 보러 가자며 나와 골드찬을 양쪽으로 감싸고 걸었다. 나는 억지로 발을 옮기면서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게임이에요?”

“그냥 다트예요.”

“무슨 다트를 사람으로 해요. 잔인하게…….”

“그래서 19금 표시 저기 붙어 있잖아요. 여기 붙어 있을 이유는 없지만. 생각보다 우니버스 님 마음이 여리시네요. 더 내 스타일이야.”

또 개소리……. 답답한 남자의 팔을 걷어 내고 떨어져 걷자 나와 같이 그의 팔에서 빠져나온 골드찬이 내 옆으로 쪼르르 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19금 게임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던데. 발랑 까진 골드찬은 이런 게임을 몇 번이나 해 본 것 같았다. 여태 본 정이 있으니까 신고는 참아야지.

“이런 거 많이 해 봤어? 잘하던데.”

“왜요?”

“물어보지도 못하냐.”

“하긴, 사소한 것도 궁금할 때이긴 하죠. 작년에 패밀리랑 한번 해 본 적 있어요.”

“패밀리?”

남들과 다르게 골드찬의 닉네임창은 다른 사람보다 옅어서 잘 몰랐는데, 작게 F 표시가 있었다. F는 저번에도 말했듯이 패밀리를 가입했다는 표식이다. 그의 닉네임창 투명도도 비싼 아이템이라 관심 있게 지켜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소심함이 닉네임에서부터 드러나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딪히는 사람들을 피해 내 쪽으로 더 붙었다. 남자는 잘 따라오고 있나? 조금 뒤처진 남자가 잘 따라오고 있나 돌아봤는데, 나를 보고 윙크를 하는 바람에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패밀리랑은 왜 같이 안 살아?”

“혼자 사는 게 더 좋아요. 안 친하기도 하고. 그냥 친구 권유로 든 거라서 인원수만 채워 주는 거예요.”

“거기 레벨 제한 있어?”

골드찬이랑 같은 패밀리가 되면 패밀리라는 이름하에 더 많은 것을 마음 편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쉽게 놓치고 싶지 않은 게임 속 인연이었다.

“네, 30부터 들 수 있어요.”

“높네. 나중에 나도 들어갈래. 친구한테 잘 말해 줘.”

“저랑 패밀리 맺고 싶어요?”

“패밀리 맺으면 너랑 같이 살 수 있어?”

“아…… 저랑 같이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요? 그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패밀리와도 같이 지내지 않는데 그 큰 집에 외로이 혼자 사는 건 공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현실처럼 청소를 주기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방 하나만 주면 좋겠다. 사유지 유지비는 은근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정원사 하나 고용하는 셈 치면 되지 않나. 그렇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기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응,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

잡은 골드찬의 손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는 대답 없이 길 건너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아직은 너무 부담스러운 제안이겠지. 일단 레벨 업부터 하고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그때 다시 가까이 붙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우니버스 님, 이사하게요? 우리 집은 어때요?”

언제부터 듣고 있었지. 잡초 더미에서 계속 자는 한이 있어도 저 남자의 집에서 살기는 싫다. 그냥…… 위험할 것 같다. 나는 못 들은 척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그러자 자기 집 자랑을 해 댄다.

“침대도 엄청 넓고 푹신한데.”

“괜찮습니다.”

“두 명이 못 잘까 봐 그러시는구나. 안고 자면 충분히 가능해요. 침대를 새로 살 의향도 있고요.”

그런 의향은 전혀 안 궁금하다.

맞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골드찬을 내려다보니 입을 작게 내민 채 남자를 불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 나 대신 그렇게 쳐다봐 주는 게 웃기고 귀여워서 한마디 던졌다. 아무리 남자의 집이 좋아 봤자 이 마을에서 제일 큰 골드찬의 집만큼은 못하겠지.

“신경 쓸 거 없어. 난 너희 집이 더 좋으니까.”

“……알아요.”

“알면 됐고.”

“진짜…… 너무 적극적이세요.”

후우. 골드찬은 가슴팍에 손을 대고 심호흡을 하며 말했지만, 남자가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징징대는 바람에 골드찬의 말을 마저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