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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연회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인해 굳어 갔다. 반면에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그레이의 얼굴은 태평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쉽게 입을 열진 않았지만 당황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제게 뭘 원하는지 의사를 묻지 않으셨으니까요.”

공기에 긴장감이 서렸다. 사람들은 화가 난 카르타 전 대장군이 어떤 광기를 보일지 긴장하는 기색들이었다. 카르타 공은 한동안 아들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었다.

“그럼 말해 보거라. 뭘 원하지? 다 말만 하렴. 이 아비가 너를 위해 뭔들 못 해 주겠니. 이곳에 있는 양식장이라도 주랴? 아니면 이 저택을 통째로 주리?”

리에이나는 저게 농담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귀족들이 갑자기 깔깔 웃는 것이 아닌가. 어떤 이들은 바닥을 뒹굴며 배를 붙잡기도 했다. 한참 뒤에야 리에이나는 저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가 카르타 공만의 유머라는 걸 알았다.

“그래, 그래. 사내에게 선물로 계집 만한 것이 없지!”

카르타 공은 그의 주변에 있던 성숙한 노예들의 머리카락을 물건 집듯이 차례대로 잡아당기며 아들의 앞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레이의 손이 움직였다. 하얀 손가락이 아버지의 뒤를 가리켰다.

“저 아이요.”

작은 손이지만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리에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제게 쏠렸다.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때는, 카르타 공의 시선도 제게 향해 있었다.

“저 아이를 제게 주세요.”

그레이는 잔잔하게 웃으며 한 번 더 제 아비에게 리에이나를 요구했다.

노예로서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은 익숙했으나, 자신보다 어린 아이에게 ‘저 아이’라며 더 어린 취급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불편한 것은 지금 이 상황 자체였다.

“……매번 같은 걸 선택하는 모습이, 내가 다 지겨울 정도군.”

그레이의 선택에 카르타 공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타 공이 웃자 주변의 다른 귀족들도 웃었다. 그러나 리에이나는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연회장에서 웃지 않는 이들은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리에이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심정으로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소년이 대체 왜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말이다…….”

쉽게 허락해 줄 줄 알았던 카르타 공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그는 가면을 쓴 것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또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해할 수 없는 두 부자 간의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건 애꿎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정작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는 어린 소년은 크게 긴장하거나 굳어진 기색도 없었다.

“아버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레이가 리에이나의 금발 끝을 매만지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카르타 공에게 말했다.

“제 안에 있는 것이 원하고 있어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카르타 공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쁨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변한 그는 곧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하하! 이 아비가 장난 좀 쳤다. 그래, 가지거라. 그렇게나 원한다면야.”

아비와 한참 어린 그의 아들 간의 이상한 기 싸움은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 진짜 주인은 이 작은 소년인 건가.’

저 늙고 흉포한 늙은이보다 어린 도련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노예의 인생은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차분해 보이는 이 도련님이 저 광기 어린 사내보다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리에이나의 직감이 경고를 날렸다.

조심해, 뭔가 위험한 느낌이야.

하지만 이 소년이 왜 위험한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선물을 받았으면 직접 써 봐야지! 어서 데리고 가거라!”

정작 리에이나를 선택한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카르타 공이 앞장서서 모든 일을 진행시켰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다른 노예들에게 끌려간 리에이나는 그대로 뜨거운 목욕탕에 집어 던져지다시피 들어가 목욕재계를 하고 예쁘게 새로 단장을 했다. 설마하니 카르타 공은 정말로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제 아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기 바라는 것인가.

카르셰타움에 미치지 않은 귀족은 없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비상식적이었다.

‘고작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귀족들의 잔악성이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귀족들도 그들 가족은 끔찍하게 여겼다. 가끔 권력의 중심인 황제나 황족들에게 아내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열 살도 안 된 아이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진 않았다. 제물이 아니라 본인이 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는 상당히 어린 나이였다. 리에이나도 어리긴 했지만 그레이는 채 열 살도 안 되어 보였다.

저보다 어린 소년에게 선택을 당하고 억지로 목욕과 단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리에이나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은 들었지만 그 생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정리가 불가능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정리되지도 못한 채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서 마침내 그레이의 침실까지 들어오게 된 리에이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침실 안에는 그레이가 침의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

리에이나가 안으로 들어오고 문이 닫히자 그레이는 탁, 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위에 책을 올린 그레이가 침대 위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리에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여자 노예, 그것도 얼굴이 반반한 노예들이 가는 길은 대개 비슷했다. 하지만 그건 어른이 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리에이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거기다가 잠자리 시중을 들더라도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의 시중을 들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사를 올려야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전에 허락 없이 목소리를 냈다가 건방지다며 뺨을 맞은 적이 있지 않았던가.

고민하던 리에이나는 간단하게 허리만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긴장감으로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참느라 가슴께가 들썩였다. 리에이나는 자신보다 작은 키를 가진 소년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레이 또한 리에이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리에이나도 상대방이 너무 조용하자, 고개 숙인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리에이나는 민망함과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얼핏 곁눈질로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 두 손가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해서 리에이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소년은 리에이나의 손 모양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리에이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리에이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소년은 아까의 리에이나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리에이나가 고개를 든 걸 눈치챈 건지 얼마 안 가서 소년도 고개를 들었다.

“…….”

“…….”

리에이나와 소년은 둘 다 침묵을 유지했다. 점점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리에이나는 점점 입술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소년도 리에이나를 따라 입술을 벌리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지?’

리에이나가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그레이도 똑같이 따라 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리에이나는 잠시 두려움도 잊고 먼저 입을 뗐다.

“……주, 인님?”

리에이나가 먼저 입을 열자 그레이도 그녀를 따라 하는 놀이를 멈추었다.

“도련님이라 불러. 이 집안의 모든 재산은 아버지 것이라서, 널 내게 주셨다고 해도 아직은 너도 아버지의 것이니까.”

“……예, 도련님.”

소년은 아주 특이하고 이상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이름은?”

소년은 여유롭게 이름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리에이나는 그런 그레이가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여러 가문을 모셔 왔지만 한낱 노예의 이름을 첫 만남에서부터 물어보는 주인들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로.

“리에이나입니다.”

“너한테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감사합니다.”

“언제 들어도 참 예쁜 이름이야.”

“네……?”

“만나서 반가워, 리리.”

순간 리에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들어도 예쁜 이름이라니? 거기다가 내 애칭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묻고 싶었지만 건방지다고 매를 맞을 게 두려워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리에이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레이를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뭣보다 그레이 같은 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면 무조건 기억했을 것이다. 일단 이 소년은 얼굴부터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였으니 말이다. 소년의 눈부신 금안은 리에이나의 금발 못지않게 눈부신 빛을 가졌다.

“아직도 긴장돼?”

“아, 아닙니다.”

“그럼 이리 와.”

그레이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손을 뻗어 리에이나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잡히자 리에이나는 다시 긴장감에 몸이 뻣뻣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가 리에이나의 손을 잡아 이끈 곳은 침대였다. 그레이는 고갯짓으로 리에이나에게 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턱이 떨려서 미세하게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도 리에이나는 고분고분하게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레이도 침대 위에 올라왔다. 리에이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레이는 리에이나에게 건전한 것을 요구했다.

“그 뒤로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거든.”

“…….”

“이리 와서 팔베개해 줘. 그리고 계속 목소리를 들려줘.”

잠시나마 긴장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품을 파고드는 소년이 하는 요구들은 순수했다. 이런 상황이 리에이나를 몹시 당황케 했다. 아버지의 광기에도 차분하던 소년은 어디 간 것인지, 지금 자신의 눈앞에는 그 나이대의 맞는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

“그냥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도 좋아.”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제 얘기는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책이라도 읽어 줄래?”

“책이요?”

그레이는 협탁 위에 있는 책을 들어 리에이나에게 주었다. 어린아이들답게 동화책이나 읽겠거니 싶었는데, 의외로 그레이는 제국의 역사학을 읽고 있었다. 책 속에 글자들은 리에이나의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책 내용을 이해하며 리에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 내려갔다.

옆으로 누워서 자신의 팔을 벤 소년이 입술을 우물거릴 때마다 피부가 간지러웠으나 꾹 참았다.

긴 시간을 인내하며 오랫동안 책을 읽어 주자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한 건지 소년의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결국 소년의 눈꺼풀이 완전히 잠기고 그 상태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리에이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책을 원래대로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