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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지 않는 꽃의 나라



1화



<1부>

1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선과 악은 뒤바뀌고,

빛과 어둠의 역할은 교체되기 마련이다.



버려진 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지만,

어떠한 존재들도 버려진 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 * *



미적 아름다움,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색(色)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귀족들이 걸치고 있는 화려한 비단의 색, 가을이 되면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잎, 그레폴라 섬을 둘러싼 바다의 청록의 물결.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인의 눈동자도, 누군가는 핏빛처럼 보인다는 짙은 포도주색도.

모두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색을 보지 못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레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몰랐다.

정작 살아 있는 낙원이라 불리는 카르셰타움의 귀족이며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는 어째서 이곳이 낙원이라 불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포도주와 여인으로 가득 찬 향락의 연회…….

그 속에서 무료함을 느낀 그레이는 초록 잎으로 가득한 푸른 정원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정원이었겠지만 그레이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잿빛으로 비쳐졌다. 색이 안 보인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의 눈에는 그만큼 색깔이 주는 아름다움이 전해지지 못했다.

아름답다, 그건 그레이가 앞으로도 영원히 느끼지 못할 감상이었다.



* * *



“그 계집은?”

“치장을 마치자마자,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서 있습니다. 마치 인형처럼요.”

“카르타 공에게 내보일 만한지,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군.”

청록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바라보던 귀족은 얼마 전에 구매했던 노예를 급하게 찾았다. 권력자인 카르타 공에게 선물하기 위해 고른 것이었다. 그런 만큼 금발의 어린 노예 계집은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으로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주인어른. 정말로 괜찮을까요?”

“네놈도 또 유치한 저주 소리나 하려고?!”

황금빛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에도 소녀는 좀처럼 팔리지 않았으며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유치하지만 겁을 주기에는 충분한 단어, ‘저주’. 그 단어가 소녀에게 딱지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소녀가 팔려 간 집안에는 안 좋은 일들이 꼭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귀족과는 일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소녀를 카르타 공에게 넘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에게 소녀는 사람이 아니라 한낱 물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물건 취급에도 불평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소녀는 어리지만 잘 알고 있었다.

“주제넘을 정도로 귀한 비단을 두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카르타 공께 인사드리기 전에 드레스를 더럽히면 그 고운 피부를 불로 지져 버릴 줄 알거라.”

굳이 그가 강조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리에이나는 피부가 불에 지져지는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드레스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썼다. 혹시라도 아무 데나 앉았다가 옷에 먼지가 묻을까 봐 그레폴라로 가는 시간 내내 서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순백의 드레스와 붉은 벨벳 망토를 지켜 낸 리에이나는 마침내 먼 길을 지나 카르타 공의 별장에 도착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오랜만입니다, 카르타 공!”

“아, 오랜만입니다, 리카의 차남이 아닙니까.”

“절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요, 그대의 부친과 내가 각별한 사이였지 않습니까?”

마침내 카르타 공과 만난 귀족은 리에이나의 등을 조용히 밀었다. 풍채가 크고 짙은 눈썹을 가진 카르타 공의 눈이 리에이나에게 닿았다.

“오랜만에 카르타 공을 만나 뵙게 된 기념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아간 리에이나의 어깨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굳어 있는 어린 노예를 물건을 품평하듯이 훑어보는 카르타 공의 눈은 서늘했다. 리에이나는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노예는 저보다 신분이 높은 자에게 불쾌함을 느끼는 것조차 건방진 일이었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설마 선물이 여기에서 끝은 아니겠지요?”

“다, 다른 선물이라 하시면…….”

“오해는 마시지요.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이 자리는 내 아들을 위한 자리이지 않습니까?”

카르타 공의 말대로였다. 귀족이 카르타 공의 눈에 들기 위해 준비한 오늘의 이 연회는, 실은 그의 막내아들의 생일 연회였다. 또 다른 선물을 원하는 카르타 공의 뜻을 눈치챈 귀족이 다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물론 소공의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다행입니다. 깜빡하셨다면 실로 실망할 뻔했습니다. 사실 이 연회는 내 아들놈 생일 연회인데, 고놈은 어째 뭘 하든 기뻐하지 않는단 말이죠…….”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카르타 공은 자기 나름대로 그의 아들을 상당히 예뻐하고 있었다. 한때 대장군이었던 카르타 공은 리베리아 황제를 죽인 큰 공으로 그가 목을 벤 황제의 아내를 노예로 선물받았었다. 그레이는 카르타 공과 죽은 리베리아 황제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에게는 일찍이 자식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자식들이 조금씩 다 하자가 있었다.

카르타 공의 자식들은 태어나서 몇 달을 못 넘기고 죽는다거나, 살아남는다 해도 장애를 앓고 있거나 몸이 약하거나, 그도 아니면 광증에 걸려 탑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었다. 후계가 귀했던 카르타 공에게 그레이는 아주 늦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제 어미와 카르타 공을 반반씩 닮은 그레이는 상당히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태어났다.

매사에 재미없게 구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그 또한 카르타 공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가져다주는 점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름대로 아들을 아끼고 있던 카르타 공은 그레이의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일부러 이 그레폴라 별장에서 성대한 연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연회 곳곳을 찾아봐도 어린아이를 위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대된 사람들은 카르타 가문과 정치적인 세력으로 얽히거나, 그도 아니면 얻을 게 있어서 찾아온 어른들이었으며, 아이를 위한 생일 연회에 올라온 것들은 죄다 술과 정력에 좋다는 음식들이었다. 연회에 초대된 무희들이 선보인 춤과 의상도 상당히 풍기 문란 했으나, 어쨌든 이 연회는 올해로 여덟 살이 된 그레이를 위한 생일 연회였다.

“어찌 되었든, 선물은 진심으로 마음에 듭니다. 특히 금발이…… 아주 탐스럽군요.”

카르타 공은 리에이나의 금발을 움켜잡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예뻐……. 이걸 내 뱀들에게 던져 주면 어떤 예술적인 풍경이 펼쳐질지 아주 궁금해. 황금 같은 금발이 고 녀석들의 미끈한 몸통에 휘감기는 모습은 아주 환상적일 거야…….”

리에이나는 고작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민한 편이었다. 카르타 공의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언행에서, 그 언행을 내뱉는 목소리와 목의 울림에서, 눈빛에서, 손길에서. 그의 모든 것에서 흉포한 광기가 느껴졌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지나친 부와 향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

리에이나는 등꼬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참지 못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리에이나를 샀던 귀족은 화를 내며 소녀의 등을 밀었다.

“어허, 그러지 마세요. 어린아이를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 못 쓰죠.”

자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그가 자애롭지 못한 인물이라는 건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어차피 난 네게 그런 짓을 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그의 말은 상황과 맞지 않았다. 그는 이제 리에이나의 주인이었고, 리에이나는 그의 노예였다. 그러니까 리에이나가 원치 않아도 카르타 공은 얼마든지 소녀에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신에게 사랑받는 아이에게 죄를 저지를 순 없지.”

똑같은 어린아이여도 노예는 보호받을 수 없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저런 말을 하는 카르타 공의 행동은, 리에이나에게는 조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리에이나의 화려한 금발을 만지다가 다른 귀족들의 부름에 가 버렸다. 비록 그의 앞에서 결례를 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곁에 서 있는 귀족에게 맞을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카르타 공이 리에이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지나가던 이들이 얼핏 보기만 해도 눈치챌 정도였다.

이렇게, 선물이 선물의 역할을 다 하였으니 불로 지져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 후 리에이나는 다른 노예들에게 이끌려 카르타 공의 뒤에 서서 그에게 부채질을 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카르타 공은 리에이나에게 종종 말을 걸고는 했는데 썩 듣기에 좋은 말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곳에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의외였던 건 아들의 생일 연회라고 했는데, 정작 그의 아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아들, 그레이는 또 어디에 있지?”

카르타 공은 아주 뒤늦게서야 아들을 찾았다. 리에이나가 보기에 그는 연회가 지루해지자 새로운 재밋거리로 아들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타 공의 아들은 아버지의 부름을 전해 듣자마자 온 것인지 얼마 안 가서 금세 연회장에 도착했다.

붐비던 사람들 틈이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작고 어린 소년이 나왔다. 카르타 공의 어린 아들을 처음으로 본 리에이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나 긴장이 아닌, 놀라움이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어른들을 위한 향락의 연회라서 그의 아들도 어리다 해도 자신의 또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막상 본 그레이는 척 보기에도 리에이나보다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린 소년은 그의 키에 맞게 만들어진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소년을 위한 연회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잠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년의 작은 발은 망설이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

아주 찰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리에이나를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눈길을 이끄는 소년의 외모에 리에이나는 홀린 듯이 그 입 모양을 읽어 냈다.

오랜만이야.

‘……나한테 하는 말이야?’

오랜만이라는 말은 처음 만난 사이에 할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소년의 입 모양을 맞게 읽은 것인지 의아해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소년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아비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괘씸한 것. 몰래 잠에 들 꿍꿍이였구나. 이 연회가 지루하든?”

리에이나가 홀로 착각을 했다고 알려 주듯이 소년의 시선은 이후 리에이나를 향하지 않았다.

“재밌진 않지만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혼자만의 착각이 사그라든 후, 리에이나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자 두 번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작고 왜소한 소년인데도 말투나 표정, 태도는 어지간한 어른들 못지않았다.

“한데 어째서 내내 연회에 모습을 비치지 않았지?”

“꼭 제가 모습을 보였어야 했나요?”

“이건 널 위한 연회이니 당연한 것을.”

“이것이 절 위한 연회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냐?”

“기분이 언짢으실 텐데요.”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왜 널 위한 연회라 생각하지 못한 거지? 나는 분명 이 연회가 내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라고 밝혔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