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장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여자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다가 문득 오싹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장미의 눈앞엔 흥분한 상태의 동족이 서 있었다. 뱀파이어의 하얀 송곳니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

‘떠난 게 아니었어?!’

뱀파이어는 아직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식사 도중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몸을 숨겼던 그는 이윽고 나타난 장미가 제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이내 그녀까지 사냥할 요량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뱀파이어는 장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윽!”

장미는 목을 방어하기 위해 두 손을 교차시켰으나 상대가 더 빠르고 강했다. 뱀파이어는 한 손으로 장미의 목을 세게 움켜잡으며 가까이 끌어당겼고 그대로 입을 벌려 속수무책으로 끌려온 하얀 목덜미를 물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숨을 깊게 들이켜며 장미의 체향을 맡는 순간 뱀파이어는 눈을 크게 뜨며 움직임을 멈췄다.

쿵!

“으윽!”

뱀파이어는 장미를 무는 대신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이곤 비릿하게 웃었다.

“뭐야. D급의 약골 뱀파이어잖아? 한 주먹도 안 되는…… 어?”

의기양양하게 비아냥거리던 뱀파이어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뭐에 놀랐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빛이 들어오는 골목 바깥을 노려보았다.

“…….”

이를 들썩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뭔가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뱀파이어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장미를 두고 순식간에 골목 뒤로 사라져 버렸다. 장미는 벽에 붙은 그대로 굳어 있다가 한참 만에야 겨우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헉! 헉……!”

주, 죽는 줄 알았네!

장미는 놀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어느새 떨어뜨린 노트북과 휴대폰을 챙겨 들고 급하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보복당할까 봐 차마 직접 신고는 할 수 없었던 장미는 봉봉 비어 직원에게 가게 근처에 누가 쓰러져 있다고 알린 뒤 사무실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대리는 왠지 경직되어 돌아온 장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장미가 노트북을 켜 장부 정리를 시작하자 이내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호기심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아무렇지 않게 장미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감탄하고 감동했다.

“와, 진짜 장미 씨 잘 왔네! 잘 왔어! 대체 그동안 어디 있다 이제야 온 거야!”

별거 아닌 일에도 수선을 떠는 대리의 모습에도 아까의 그 두려운 기분을 풀 수 없었던 장미는 계속 미세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묵묵히 자판만 두드렸다.

팀장은 오후 5시쯤이 되어서 돌아왔다. 대리는 팀장에게 오늘 하루 장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도움이 되었는지를 한 5배쯤 부풀려서 칭찬했다.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렇게 도움 되는 직원은 처음이에요. 저 완전 감동했잖아요. 그 많은 걸 벌써 다 끝내 놨어요. 정말 대단해요! 대단해!”

팀장의 반응은 심드렁했지만 대리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결국, 대리는 장미의 환영 인사도 할 겸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간식을 사 오겠다면서 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대리가 빠져나간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팀장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의자에 털썩 앉더니 책상에 다리를 올리며 늘어졌다. 그와 둘만 남아 있는 상황이 여전히 불편했던 장미는 덮은 노트북 위로 올린 손가락만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오늘 할 일을 다 마쳐서 마음 편히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더 없었다.

“야.”

문득 팀장이 장미를 부르며 한껏 젖히고 있던 머리를 세웠다. 장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팀장은 약간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뭐 하고 다녔기에 몸에 피 냄새가 뱄냐?”

“네?”

장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되물었다. 이어서 그는 싸늘한 얼굴로 무척이나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

“생리해?”

‘우와, 성희롱.’

하지만 팀장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어 보였다.

장미는 저도 모르게 꽉 쥐어 버린 주먹을 책상 아래로 내려서 숨겼다.

‘난 인간이 아니다.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처럼 반응할 거 없다고.’

사실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불쾌한 상황임엔 틀림없지만 장미는 어차피 이런 상황에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는 뱀파이어 사회를 등지고 인간 사회에 더 가깝게 스며들어 인간처럼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제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늘 그런 거고 불합리한 상황을 이미 수도 없이 겪어 왔던 장미는 이 상황에 굳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자가 세뇌를 했다.

“아니요.”

“흠.”

애써 담담하게 대꾸하는 장미를 향해 팀장은 여전히 뭔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비음을 흘렸다.

“너 말이야.”

팀장은 가늘어진 눈빛을 장미에게 고정한 채 책상 위에 올렸던 두 다리를 내렸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을 벗어난 그는 장미가 앉은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 것이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섬뜩했다.

‘나한테 피 냄새 어쩌고 자시고 할 군번이 아닌데.’

그는 마치 연쇄살인범 같은 분위기가 나니까 말이다. 장미가 새삼 다시 겁에 질려 의자째로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뺄 무렵 마침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대리가 돌아왔다.

“다녀왔……! 헉!”

활기차게 입을 열었던 대리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경악한 얼굴로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대리는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와 장미의 앞을 지키듯 막아서며 팀장에게 따지듯 외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아, 진짜. 팀장님!”

“아씨 뭐! 왜!”

대리는 손에 든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팀장의 팔을 잡아끌어 사무실 옆에 있는 비품실로 들어갔다. 자기들끼리만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사무실이 작은 데다 컨테이너 건물이라서 기본 방음 자체가 형편없었다. 하물며 장미는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조금 더 뛰어난 뱀파이어였기에 본의 아니게 그들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대리의 한숨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 팀장님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뭘?”

“모처럼 괜찮은 직원이 들어왔는데 왜 또 건들지를 못해서 안달이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지랄이야!”

“위협하셨잖아요.”

“아닌데?”

“제 눈이 옹이구멍이라고 착각하시면 아주 곤란합니다.”

“뭔 개소리야.”

떫은 말투의 팀장에게 대리는 굴하지 않고 간절하게 부탁하듯 말했다.

“제발. 제에발. 얌전히 두세요. 손끝 하나 건들지 마시고 곱게. 그냥 곱게곱게 놔두세요. 네? 아니, 왜 애꿎은 직원을 자꾸 괴롭히려고 하냐고요. 제발 이러지 맙시다. 팀장님.”

“아. 잔소리 진짜. 짜증 나게.”

“네? 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고 얼마 후 팀장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비품실을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대리가 장미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분식 먹자―!”

그리고 그날 대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장미를 공략해 근무한 지 하루 만에 그녀의 호칭을 장미 씨가 아닌 장미로 부르게 되었다.



거지 같은 인성이라고 예상되는 팀장의 존재가 거슬리긴 했지만, 장미는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에 금세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대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외국 무역 회사 계열의 유통 사무소로 본사의 허가를 받아 들여온 물건들을 중개자에게 파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규모가 작아 그런가 팀장과 대리는 이곳을 회사가 아닌 ‘가게’라고 칭했다. 물론 부르는 거야 본인들 마음이니 장미는 별생각 없이 그러려니 했다.

1층과 2층 창고에 들이는 물품들은 오로지 대리만 확인했고 장미는 볼 수가 없었다. 장미가 하는 일은 대리가 물건들을 팔고 들이며 작성된 영수증들을 주면 그것들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과 팀장이 창고에서 가져다 쓴 물품들을 대리가 정리해 주면 또 그것들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일이었다.

본 적 없는 물품들은 이름도 죄 암호 같은 형식이었다. 장미는 이미지 암기가 되지 않아 초반엔 많이 헷갈렸었지만 여러 번 하다 보니 금방 적응되었다. 장미가 간혹 실수해도 상냥하게 알려 주고 고쳐 주는 대리의 도움이 컸다.

대리는 웃음이 많고 친절하며 늘 정중하게 장미를 대했으므로 일하는 내내 함께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